현장취재 : 호주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를 찾아서(1)

두 번째 길을 떠나다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4/29 [16:23]
부산 - 「새로운 변화의조짐들」 
 
우리가 처음으로 호주 선교사들의 선교현장을 찾아 나선 것은 10년 전인 2000년 3월 3일이었다. 크리스찬리뷰 창간 10주년 기념특집으로 '호주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를 찾아서'라는 연재물을 기획하고 2주일간 부산, 마산, 진주, 통영, 거창, 산청, 거제, 함양 등 호주 선교사들의 선교 현장이었던 지역을 일일이 발로 뛰면서  취재하여 연재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하신 주의 명령을 푯대로 한국 땅에서 복음의 전령으로 신명을 바쳤던 믿음의 선배들, 그들의 선한 자취를 살피는 일은 중요한 역사의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 지를 터득하게 되어있다. 그것이 성도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역사의식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땅에 개신교 신자 1천 만 명을 헤아리고 개신교 교회가 5만이 된다고 자랑을 하면서도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 준 그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그들이 한국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고 있는 성도가 몇이나 될까? 

우리는 개신교 선교 1백 년이다, 2백 십년이다 요란하게 자축하면서 우리가 지고 있는 복음의 빚에 대하여 혹시 소홀하지는 않았는지, 더욱이 우리는 개신교 선교 초기에 한국 땅에서 일한 언더우드, 아펜젤러, 헤론 등의 이름은 알고 있다.

그러나 부산 경남지방에서 일한 호주 선교사들의 신앙의 발자취에 대해서는 죄스러울 만큼 둔감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한국 땅에 심으신 뜻은 무엇인지, 한국 땅에 누워있는 그들의 목숨의 값이 어떤 것인가를 짚어 보아야 했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크리스찬리뷰는 창간 20주년을 맞아 호주 선교사들의 사역을 집대성한 '호주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들'을 단행본으로 출판하기로 결심하면서 다시 한 번 호주 선교사들의 선교 현장을 답사하게 되었다. 마땅히 미진했던 부분과 그동안 변화된 모습들을 알려야 할 책임감을 느꼈고, 두렵고 떨리는 길이었으나 우리에게 순종을 주시는 것도 오직 주님의 은혜인 것을 알았던 덕이다.

 
세계로 뻗는 동북아시아의 관문 부산

그렇게 우리는 이 머나먼 부산 땅에 왔다.

큰 가마솥(釜)을 엎어 놓은 것 같은 산(山)이 있다고 해서 부산(釜山)이라 했던가?

그 산 때문에 교통이 썩 좋지는 않지만 부산은 분명 대한민국 제2의 도시다. 부산광역시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과 2002년 FIFA 월드컵, 2005년 APEC 정상회담이 개최됐고, 오는 2020년 하계 올림픽도 유치할 계획이다. 기네스북에 오른 해운대 해수욕장과 달맞이 고개, 자갈치 시장, 광안대교 등 항구도시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도시이며, 또한 부산 비엔날레와 세계적인 영화제인 부산 국제영화제가 매년 열리고 있어 다양한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도 있다.

인구는 설마? 하겠지만 10년 전보다 3만여 명이 줄어 현재 350여 만 명이다. 전문가들은 그 원인으로 저출산과 일자리 부족을 꼽는다. 어쨌든 지금 부산은 출산장려 운동과 일자리 창출 캠페인이 한창이다.

사실 부산은 한반도 제1의 항구도시로 일본을 거쳐 태평양으로 나가는 관문이기에 일본과 맺은 역사도 오래고 거기서 형성된 해양문화도 풍부하다. 기독교 역사와 관련해서 부산의 역할 또한 그러했다. 19세기 말 복음의 파장이 한반도에 미쳤을 때, 중국으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북쪽 관문이 의주였다면 부산은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복음의 남쪽 관문이었다.

알고 보면 복음 전도자가 서울보다 일찍 들어온 곳이 부산이다. 1882년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가 만주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한글로 번역, 인쇄한 후 그것을 도쿄에 있는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일본지부 총무 톰슨에게 보냈는데 톰슨은 그것을 일본 전도사 나가사카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부산에 가서 전하도록 하였다. 이에 나가사카는 고토와 함께 1883년 7월 24일 일본 군함을 타고 부산에 도착, 부산에서 성경반포소를 개설하고 고토로 하여금 정착해서 전도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부산 선교의 출발이다.

한국 선교가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후 부산은 일본을 거쳐 내한하는 서양 선교사들의 중간 기착점이 되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인천에 상륙하여 한국 개신교 선교를 개척한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장로교의 언더우드도 실은 이보다 사흘 앞선 4월 2일, 부산에 먼저 들렸다.

즉, 이들을 태운 배가 3월 31일 일본 나가사키를 떠나 4월 2일 아침 부산항에 도착해서 하루 정박하는 사이 아펜젤러 일행은 부산을 반나절 산책하는 것으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아 본 것이다.

▲ 해방 전 부산 동북부 법원청사 일본인 거주지(왼쪽)와 현재의 부산항. 부둣가에 컨테이너가 산적해 있는 부산은 한반도 제1의항구도시이다. ©크리스찬리뷰    

계속해서 선교를 목적으로 부산을 찾는 선교사들의 발걸음이이어졌으니 1885년 11월 중국 복주지방에서 활동하던 영국성공회 선교사 울프(J. H. Wolf)가 중국인 전도자 두 명을 데리고 부산에 와서 전도 활동을 폈다. 그리고 1889년 8월, 아펜젤러가 후배 선교사 존스(G .H. Jones)와 함께 육로로 원주와 문경, 대구를 거쳐 8월 31일 부산을 방문하였고 같은 기간 캐나다에서 온 독립 선교사 게일(J. S. Gale)이 배편으로 부산에 와서 집을 마련하고 전도를 시작했으며, 1891년 4월에는 캐나다 독립 선교사 하디(H. A. Hardie)가 부산 영국세관 전속 의사로 부임했다.

이 무렵 부산에서 활동하던 울프 선교사가 본국 교회의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해 부산 선교를 접어야 할 형편에 처하자 그 안타까운 소식을 편지로 호주 교인들에게 알렸다.

"한국 선교의 필요성과 기회를 절감하고 영적으로 죽었거나 죽어가는 한국인들을 구하기 위해 일할 사람을 보내주시오"

이 편지는 호주의 한 선교지에 실렸다. 이 내용이 데이비스 목사의 눈에 들어왔다.

호주 빅토리아장로회 소속 데이비스 목사가 선교를 지원하기 위해누이인 메리와 함께 한국 땅을 밟은 것은 1889년 10월 2일. 잘 알려 진대로 데이비스는 다섯 달 동안 서울에서 한국말을 익힌 후 육로로 20일 만에 부산에 도착했으나, 천연두에 걸려 도착 하루 만인 1890년 4월 5일 게일 선교사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소식을 접한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 교인들은 한국 선교를 더욱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로 하고 1891년 10월, 메케이(J.D. Mackay)목사 부부와 멘지스(B. Menzies), 페리(J. Perry), 포셋(M. Fawcett) 등이 부산에 도착, 수정산 자락 좌천동에 선교부를 세우고 경남지역 선교를 추진해 나갔다.

기자는 마치 곁에서 지켜본 것처럼 그 풍경이 선연히 떠올랐다.

"과연 우리 하나님이시구나! 그렇게 죽어간 희생을 통해 결국 열매를 거두셨구나."

기자는 하나님의 그 섭리와 사랑에 탄복하였다. 하나님은 저 막히고 황무한 조선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서는 안전하고 편안한 틀을 벗어나 땅 끝을 지향하는 영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이 말씀이 미치도록 좋았다.

데이비스가 적임자였다. 그 희생의 터 위에 지금 부산진교회가 서 있는 것이다.


▲ 부산진교회가 있는 좌천1동 일대는 호주 선교부의 중심지였다. ‘한국 한센환자들의 친구’라 불린 매견시 선교사의 기념비 뒤로 부산진교회가 보인다. ©크리스찬리뷰     

부산진교회, 한국교회 건전한 모델 제시 힘써

부산 답사는 당연히 부산진교회를 찾아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좌천 1동 언덕에 우뚝 솟아있는 빨간 벽돌 건물의 부산진교회. 부산역에서 지하철 1호선 노포동행 지하철을 타고 좌천동역에서 내려 일신기독병원 방향으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 교회를 세운 이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소속 윌리엄 M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그는 1890년 부산진에 한옥 한 채를 짓고, 그해 11월 부인과 함께 당시 공관에서 일하던 미국인 가족들과 자기 집에서 일하던 한국인 몇 사람과 예배드린 것이 부산교회(부산진교회)의 시작이다.

이듬해 정식으로 교회를 창립한다. 이후 1900년 10월 엥겔(한국명 왕길지) 목사가 초대 당회장으로 부임하면서 교회의 모습을 찾았다.

▲ 왕길지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1904년 5월 27일 부산 최초의 세례자였던 심상현의 동생 심취명이 장로로 장립됐다. 부산진교회의 당회가 조직된 날이다. 3.1 독립만세운동 때는 교회의 자매학교라 할 수 있는 일신여학교 교사였던 박시연 등 7명이 부산진교회에 출석했다. 이 밖에도 최상림 목사와 최재화 목사가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피난민이 부산으로 밀려들었다. 교회가 위치한 좌천 1동 지역에만 2만 채의 판잣집이 들어섰다. 53년 11월에는 큰 화재가 발생해 3천 채의 판잣집이 잿더미로 변했다. 교회는 화재 지역에 위문금 2만 5000환을 보내 재건에 동참했다. 81년에는 현재의 건물인 새 성전 기공식을 갖고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했다. 

드디어 부산진교회가 눈앞에 나타났다. 긴 시간 여행으로 잠잠하던 마음이 갑자기 두근거리고 흥분이 번졌다.

"주님, 이제 시작입니다. 도와주셔서 순전한 주님의 역사의 본질을 만지게 해주세요. 세상을 뒤흔드는 성장이라는 형식의 그 치장보다는 그 속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진실을 만지고 싶습니다."

기자는 전투를 앞둔 병사처럼 수첩을 꺼내어 손에 꼭 쥐었다.

그날은 부활주일이었다.

▲ 광역교회를 지향하고 있는 부산진교회는 영남지역의 모교회로서 한국교회에 건전한 모델을 제시하는 교회가 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사진은 부활주일에 세례를 받기에 앞서 선서하는 세례자들. ©크리스찬리뷰    

4월 4일 오전 11시에 드리는 부활 축하 전교인 연합예배.

이종윤 목사(61)의 설교제목은 '그리스도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라'성경본문은 '요한계시록 1:1-8'

이 목사의 목소리는 신중하지만 느리지 않다. 설교 기술을 가지고 청중을 끌어당긴다. 성가대가 드리는 찬양은 짜임새와 순도가 너무나 돋보였고, 교인 중에 외국인의 모습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예배 중에 세례식과 함께 간증이 이어졌을 때 여기저기에서 훌쩍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 부활주일에 찬양하는 부산진교회 꿈나무 청소년들  ©크리스찬리뷰    

예배가 끝나자 김경석 장로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러니까 그의 얼굴은 뭐랄까, 좋아서 죽겠는, 그런 얼굴이었다. 함박 벌어지는 입매며 잔 주름진 눈은 속세로 말하면 복권이 당첨된 사람의 얼굴처럼 밝았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 전 이곳에 취재 나왔을 때 함께 동행해 주었던 장로님이었으니까 구면이었다.


그의 가족은 잘  알려진대로 한국 초대교회사에 족적이 분명한 믿음의 후손가정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선대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모범적인 가정을 지켜가고 있다. 김 장로의 부친 김년순 장로(1891-1969)는 호주 선교부에서 세운 나병원에서 일했으며 대지교회를 설립, 많은 기독교인을 배출한 인물이다. 모친 고성애 권사(1899-1977) 역시 호주 선교사의 요청으로 거창지방 순회전도사로 일했다. 

또한 김유실이 김 장로의 조모이다.  김유실이 누구인가. 1890년대 무어 선교사, 멕켄지 선교사 등과 최초로 순회선교를 한 여 전도인이다. 부산진교회(전 부산교회) 초대 여 전도사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녀는 부산진교회 창립 40주년 기념일에 표창장을 받았다. 김 장로는 ‘부산진교회 100년사’, ‘부산진교회 사진 100년’, ‘부산장로성가단 10년사'’최근에는 ‘부산진교회의 항일운동사’, ‘부산 복음의 증인들’ 등의 편찬위원장을 맡아 집필했는데 이 책들은 한국교회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집이다.
 
▲ 초대 여전도사 김유실이 부산진교회 40주년에 받은 표상장    ©크리스찬리뷰

▲ 초대 여전도사 김유실   © 크리스찬리뷰

부산진교회는 현재 광역교회를 지향하고 있다. 또 영남지역의 모교회로서 한국교회에 건전한 모델을 제시하는 교회가 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창립 120주년이 되는 2011년을 목표로 세부계획을 세워 실행하고 있다. 한국교회 지도자 배출을 위해 청년과 청소년에도 중점을 두고 있다. 중. 고등부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수료해야 하는 사회봉사 훈련을 수용 '청소년 토요봉사학교'로 발전시켰으며 새 성도들의 원활한 정착을 위해 새가족 전담 교역자와 훈련을 받은 새가족 전담 양육위원을 배치했다.

또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로 자라나기 위해 교회 인근 독거노인 400여 명을 선정, 사회봉사위원회에서 지원하고 있다. 2001년에는 부산지역 최초로 여장로가 탄생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1904년 당회가 구성된 이래 1000회 정기 당회를 맞아 외부내빈이 참석해 가운데 공개적으로 감사예배를 드리고 교회의 사명을 더욱 충실히 감당하기로 다짐했다.

2010년에는 왕길지 기념관을 건립하여 지난 1월 17일 봉헌예배를 드렸다. 이종윤 목사는 "왕길지 기념관은 청소년들의 교육장소와 쉼터로 또 지역주민들에게도 개방하고 있다"고 말했다.

"돈 없이 시작했어요. 기적이지요. 사실 이 상태로는 교인들을 훈련시킬 수 없었어요. 특히 젊은이에 대한 비전이 없어요.  그리고 이 지역은 우범지역으로 처음에는 주민들이 교회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았어요. 너희들이 우리를 위해 하는 일이 뭐가 있느냐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를 오픈시키고 주민들이 뭘 원하는지를 묻고 대접하고 야쿠르트 아주머니들을 전부 ‘사랑의 전도사’라는 명칭을 붙여서 계약을 맺어 우리교회가 매일 아침 독거노인들을 방문했어요. 그것도 만만치 않더라고요. 연간 예산이 3천 만~5천만 원이들어요. 그러면서 지역에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봉사위원회'를 따로 만들어 돌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교회건물과 기념관을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었는데 사실은 이 건물 사이가 소방도로라 법적으로 안 되거든요. 그런데 주민들이 동의를 한 겁니다. 제가 돌아다니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지역 통장들이 직접 돌아다니면서 해 준 거에요. 이 정도면 교회에 대한 신뢰가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 교회 건물과 왕길지 기념관을 연결하는 다리 ©크리스찬리뷰     

이 목사는 "교회 구조 자체를 다 바꿔버렸다"고 말했다.

"안으로 향하던 것을 밖으로 다 돌렸어요. 노숙자 센터도 만들었잖아요. 소망관이라고 목사님 한 분이 관장으로 있고 쪽방상담소도 만들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주위에 쪽방이 많은데 한 방에 보통 10명 씩 기거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번 부활절을 맞아 달걀 6천개를 삶아 예쁘게 포장하여 교인들은 물론 지역 공무원들에게 전달했습니다. 교회 이름 안 쓰고요."

이 목사는 "교회 본질 회복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부산진교회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한 열방 예배팀도 운영하고 있다. 김재봉 전도사(33)는 "5년 전부터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30여 명이 예배드리고 있다"면서 "부산에도 외국인 근로자들이 늘어가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김 전도사는 "훈련과 양육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확신을 심어줘 자국으로 파송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 부산진교회 담임 이종윤 목사   ©크리스찬리뷰    

선교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는 이종윤 목사는 특히 미얀마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보통 한국 선교사를 훈련시켜 파송하는 기존의 선교방식에서 벗어나 미얀마 현지인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신학 교육을 받도록 하고 직접 교회에서 훈련을 시켜 현지사역자로 만들어 다시 미얀마로 파송한다. 한국에서 훈련받고 돌아간 현지사역자들은 한국 선교사보다 지역 실정을 더 잘 알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데 더욱 효과적이라고 한다.

"제 목회철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알면 믿음은 저절로 생깁니다. 저희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알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 부산진교회 묘지
 
▲ 부산진교회 묘지에는 호주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묘가 있다.  ©크리스찬리뷰     

선교사는 죽어서도 말한다. 가난과 절망, 무지와 억압의 땅에 떨어진 한 톨의 밀알이 동토를 뚫고 새순을 틔웠다. 그들은 무엇이 아쉬워 아비 집을 떠나 이역만리 한국 땅을 찾아 갔는가.  그들은 지금 잡초만 무성한 허허벌판에 누워 못다 부른 사랑의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 산 105-2번지 부산진교회 묘지에는 부산에서 30년간 활동하면서 나병 환자를 위하여 평생을 몸 바친 맥켄지(J. Noble Mackenzie 한국명: 매견시)의 아들 제임스 아더 고든(James Arthur Gordon), 맹호은 선교사(F. J. Macrae)의 딸 캐서린(Katherine Macrae) 그리고 예원배 선교사(Albert Wright) 부인 니븐(Wright, Alice G. Niven) 의 묘가 있다.

제임스는 1921년 3월 2일 출생하여 1922년 12월 27일 디프테리아로 두 살의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부산외국인묘지(부산시 중구 동광동 5가 26번지 추정)에 안장되었다가 경남 진주시(평거동 298-2번지)로 이장된 후 1992년 6월 9일 현재의 부산진교회 묘지로 재 이장되었다. 묘비에는 'In memory of little Jim. son of Rev. J. N. Mackenzie, died 27. Dec. 1922. 쳔국에 있는 자가 어린 아해와 갓으니라' 라고 쓰여있다.

캐서린은 1927년 7월 25일 질병으로 생후 2년 반 만에 세상을 떠났고 니븐은 1927년 12월 10일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51세였다. 니븐은 1905년 한국으로 건너가 여성교육과 전도사역에 많은 노력을 경주하면서 성경공부반을 운영하고 문맹을 퇴치하며 새로운 문물을 익히도록 하는데 힘썼다. 그는 남편과 함께 1924년까지 마산에서 활동하였으며 진주로 옮겨 선교활동을 계속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진주시 평거동 298-2번지에 묻혔다가 1992년 6월 9일 현재의 부산진교회  묘지로 이장되었다.

한국인 초기 전도자들의 묘도 있다. 부산진교회 초대장로이며 제2대 담임목사인 심취명 목사. 심취명의 원래 이름은 심상호였다. 1896년 6월 10일 심상호는 이 지방 최초로 아담슨 목사의 주례로 김봉숙과 기독교 예식으로 결혼하였다. 그는 1903년 장로로 택함을 받았고 1904년 장립하여 이름을 심취명으로 개명하여 서울 이남 최초의 장로가 되었다. 후일 당회장 엥겔(Rev. G. Engel)목사의 권유로 평양신학교에 입학, 수학한 후 1909년 목사안수를 받음으로 이 지방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 부산진교회 초대장로이며 2대 목사인 심취명 목사의 묘 ©크리스찬리뷰    

유적지를 답사할 때마다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지만 이곳에서도 역시 이들이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의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일까 되새겨 봤다.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은 용기 있는 신앙적 자세를 깨우쳐 주고 싶었을까, 아니면 이름만을 드러내는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일깨워 줌으로써 사회적 명성만을 추구하는 우리들에게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려는 것일까.

무덤 앞에서 기자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묘지의 침묵은 장중했으나 영혼의 귀를 열기만 하면 신비롭고 다정한 속삭임이 들릴 듯도 싶었다. 묘지를 둘러 본 기자의 마음은 참으로 뿌듯했다. 믿음의 선배들이의 신심이 되살아나 기자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발걸음은 가볍지가 않았다.

그들에게는 젊음과 꿈과 인생의 청사진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날 때 스스로가 설계했던 꿈과 청사진을 모두 버리고 오직 예수 이름 하나 의지하고 땅 끝을 향해 달려왔다. 그들은 복음을 위하여 우리에게 목숨을 주었다.

그런데 이곳에 선교사의 묘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설혹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뜻있는 화제로 올릴 사람이 몇이나 될까. 

 
초량교회, 전통교회에서 섬김의 교회로


▲ 초량교회는 1992년 11월 8일 창립 100주년을 맞아 전교인이 기념촬영을 했다. ©크리스찬리뷰    
 

선교사들의 유적지를 처음 찾아갔을 때와 두세 번 찾아갔을 때의 감동은 똑같지 않다. 오히려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저 그렇다는 느낌만이 더욱 강하게 다가왔다. 똑같은 장소에 한 번 갈 때와 두 번 갈 때 마음에 와 닿는 점이 달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는 기자의 마음이 점점 삭막해져 가는 느낌을 받게 되는 까닭은 웬일일까. 잘 다듬어진 곳일수록 그 같은 느낌은 더욱 강하게 다가왔다.

무엇보다도 원형을 잘 보존하지 못하고 해가 갈수록 부시고 치장해서 더 크게 만들어 놓고 방문자들을 맞는다. 

다시 강조하지만,  믿음의 선배들의 얼을 받들자면 원형을 잘 보존해야 한다. 아무리 비석과 기념조형물을 건축한다 해도 그 옛날 우리 선배들의 삶이 녹아있는 유물이나 유적을 그대로 보존하고 가꾸는 것만  못하다.

물론 기념조형물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관광객이나 순례자들의 단순한 볼거리의 대상물이어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영혼이 없고 얼이 빠진 유물이 그 얼마나 많은가.

 
▲ 초량교회 담임 김대훈 목사  ©크리스찬리뷰    

초량교회(김대훈 목사. 49)로 가는 길은 그림 찾기처럼 흥미롭다. 부산역 지하도를 건너 10여 분 골목길을 오르면 부산지방국토관리청이 나온다. 교회는 초량초등학교 오른쪽, 소림사 왼편 언덕배기를 베개 삼아 우람하게 서 있다. 교회 머릿돌에는 1963년이라고 적혀있다. 회색과 갈색톤의 벽돌로 지어진 예배당은 고개를 힘껏 들어 올려야 십자가 끝이 보일 정도로 우뚝 솟아 있다. 교회 지붕 위의 하늘은 푸른 바다를 옮겨놓은 듯 구름 한 점 없다.

초량교회는 1891년 9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한국명. 배위량)가 영선현에 거처를 마련하고 사역을 시작할 때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한국인과의 접촉점으로 삼았는데 이곳이 '동네 사랑방'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작은 시작을 통해 차츰 믿는 자가 일어났고 후일 호주 선교사 아담슨(Adamson)의 지도를 받는 신앙 공동체와 연합하여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한강 이남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의 하나이다. 초량교회는 1892년 설립된 것으로 보는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선교사의 치리를 벗어난 1912년 제1대 한득룡 목사가 부임하면서부터였다. 그러다가 1920년 호주 선교부소유의 초량동 6백90여 평의 땅으로 교회를 지으면서 급성장하게 됐다.

초량교회는 한국기독교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조국의 근대화와 한일합방, 8.15 해방, 6.25 전쟁 대한민국 정부수립 등 한국의 근. 현대사의 희로애락을 함께 했다. 특히 6.25 전쟁 당시 피난민 수용과 국난극복 수양회에서 통회운동을 전개했다. 임시수도 당시 서울 남대문교회와 합동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초량교회는 지역사회를 위해 다양한 섬김 사역을 펼치다가 2004년 10월 전문적인 복지사역을 펼치기 위해 사회복지법인 설립총회를 가진데 이어 2005년 1월 부산시로부터 사회복지법인 설립허가를 받고 11월 10일 사회복지법인 '빛과소금복지재단' 개소식을 가졌다. 영남지역의 어머니교회 역할을 했던 초량교회는 2000년대를 접어들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교회구조를 바꾸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회복지'다. 물론 과거부터 보통 교회가 해오던 구제나 장학사역을 해 왔다. 그러나 지역현실에 맞는 사역을 감당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지난 99년 IMF 직후 끼니를 거르는 지역주민이 많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래서 성도들이 십시일반으로 쌀을 모아, 매일 쌀이 필요한 주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기 시작했다. 섬김의 짜릿함을 맛본 초량교회 성도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공부하기에는 열악한 지역 환경을 감안해 청소년들을 위해 무료공부방을 운영하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는 교통비를 지원했다.

또한 끼니를 거르는 주민을 위해 사랑의 도시락 배달을 하며 지역 어르신을 위해 노인대학도 운영했다. 작은 섬김이라도 진심어린 마음을 담아 실천했던 일들이 쌓이고, 확장되면서 사회복지법인 '빛과소금복지재단' 을 태동시킨 것이다.

▲ 초량교회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 ‘빛과소금복지재단’ ©크리스찬리뷰    

초량교회의 사회복지사역은 그야말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혜자의 욕구에 입각한 사역을 펼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만나도시락'이다. '만나도시락'은 경제적. 신체적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65세 이상의 어르신들에게 아침식사를 배달해 주는 사역이다. 휴일이나 명절 상관없이 365일 매일 아침, 금방 조리한 영양식을 담은 도시락을 가가호호 배달하는 것이다. 만나도시락은 복지혜택을 누리기 가장 취약한 아침시간에, 그것도 매일 한다는 것은 초량교회가 얼마나 지역주민을 위하고 섬기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이제 만나도시락 사역에 인근 교회들이 교단교파를 초월해 동참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도 고무적인 일이다.

김대훈 목사는 "최근 부산진구에서 100억 되는 장애인·노인복지관 건물을 우리교회 복지재단에서 운영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지역사회를 잘 섬기다 보니 하나님이 큰 선물을 주셨다"면서 "5월 경에 정식 오픈하는데 지역교회들과 함께 연합해서 운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2년 전부터 장애를 가지신 노인 집에 가서 두 시간 세 시간 봉사를 하면 급여가 정부에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봉사해서 좋고 또 봉사를 받는 사람은 우리교회 복지재단에서 훈련시켜 보낸 사람이라 좋고 봉사의 질이 다르거든요. 세상 사람들보다요.  그리고 봉사하는 우리 교인들도  참 좋아해요. 일자리가 생기니까요." 

김 목사는 우리 일행을 교회 1층에 있는 역사관으로 안내했다. 역사관에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부산의 버팀목이 됐던 유물들이 고스란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20년대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온몸을 던져 나라와 교회를 지켰던 강대상에 서면 가슴이 뭉클해 진다. 부산으로 피난 온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이 교회에서 구국기도회를 갖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김 목사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지역자체가 사람들이 자꾸 떠나가는 지역인데 하나님께서 기적같이 해마다 조금씩 채워주셨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세워주신 교회인데 잘돼야죠. "

김 목사는 숨을 한 번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음, 그래서 그 분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는 겁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그 때는 제가 막 부임한 직후였기 때문에 상황을 잘 몰랐어요. 그런데 교회가 100년이 되어 100년사 편찬을 하려고 하는데 자료가 빈약해서 장로님이 호주까지 가셨어요. "

"잠깐만요 목사님, 그 분이 백응기 장로님이 아니십니까?"

"맞아요, 그런데 장로님은 세상을 떠나셨어요."

잠깐 비애 같은 것을 느꼈다.

김 목사는 “역사성이 없다는 것이 죄송하다”며 “일찍 눈을 떴더라면 그 분들의 가족이라든지 또는 관련된 교회라든지 이어져 왔을 텐데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관련되신 분들은 다 떠나셨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 때 갑자기 권순형 발행인이 흥분된 어조로 "찾았다"고 소리쳤다. 

사실 이번에 권 발행인이 경남성시화 본부에서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을 건립한다하여 기증할 족자 하나를 가지고 왔는데 이 족자를 손에 넣게 된 것도 신기하거니와 이 족자에는 달랑 '호주빅토리아 장로교 100주년 기념"이라는 글씨만 씌어져 있어 언제 누가 왜 보냈는지 몰라 답답했었다. 그런데 초량교회 역사관을 돌아  보던 중 벽에 걸려있는 한 장의 사진을 발견한 것이다. 

▲ 초량교회 제4대 담임목사인 이약신 목사는 호주 빅토리아주 장로교 1백주년 기념행사에 참석차 출국에 앞서 1937년 7월 7일 전교인과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오른쪽 족자는 당시 이약신 목사(경남노회)가 축하선물로 갖고 갔을 것으로 사료된다. ©크리스찬리뷰    

이 사진은 초량교회 4대 담임이었던 이약신 목사가 1937년 8월 8일 호주 빅토리아장로교 100주년 기념을 축하하기 위해 경남대표로 호주로 출발하기 전 1937년 7월 7일 교인들과 단체로 찍은 사진이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이미 이상규 교수(고신대 부총장)에게 확인을 했지만, 이약신 목사가 호주 빅토리아장로교 100주년 기념행사에 이 기념 족자를 가지고 가 전달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이 족자가 호주 경매 사이트에 나와 한 중국인이 구입한 것을 소원춘 장로가 이를 알고 다시 사들여 경남성시화 본부에 기증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 이 소식을 듣고 기자는 가슴을 쓸어 내렸었다.

초량교회는 118년이라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부하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갱신과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비단 사회복지 사역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전화를 하거나, 교회를 방문하거나, 성도들 간에는 항상 "축복합니다." 또는 "사랑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넨다. 예배 역시 열정적이면서도 감동이 있다는 고백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체계적인 양육 역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처럼 감동있는 예배, 체계적인 양육훈련, 밝은 모습, 모범적인 사회복지 사역이 가능한 것은 초량교회가 갖는 표어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초량교회는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를 영구표어로 삼고 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면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이 공유되면서 예배든, 복지든, 모든 분야에서 전통을 뛰어 넘어 생명력 넘치는 사역의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전환은 교회사역은 물론 교회양적으로도 성장의 결실을 가져오고 있다.

그래서 초량교회는 꿈꾼다. 과거의 흔적을 찾아 보기 위해서 초량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는 생명의 끈기를 보러 오는 교회가 되기를.〠<계속>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