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

김환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8/08/29 [16:23]
▲ 평양 대동강변에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장면. ©위키토피아    

토마스와 조선

제1차 조선 선교여행
 
1865년 7월 27일, 토마스는 지푸에서 8개월 동안 몸담고 있었던 세관 통역관의 자리를 내려놓고 조선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그때까지 그는 런던 선교회로부터 재임 통보를 받지 못했다.
 
조선 선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대리인 자격으로 가게 되었다. 선교회에서는 기본적인 경비와 다량의 성경을 지원하였다. 토마스에게 한글을 가르쳐준 김자평과 또 한 명의 조선인이 동행하였다.
 
드디어 1865년 9월 4일, 중국인 우웬타이가 항해하는 배에 토마스는 몸을 실었다. 그들이 처음 도착한 곳은 백령도의 두문진 포구였다. 백령도는 중국에서 조선으로 올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섬이다. 백령도를 지나 9월 13일 조선 본토에 상륙하였다. '조선왕조 신록'에 의하면 그가 첫 발을 내디딘 땅은 황해도의 창린도 자라리였다.
 
"배에 타고 있던 한 영국인이 모래사장에 종이 뭉치 하나를 던지고 남해를 향해 달아났다. 그 종이 뭉치 속에는 종이 한 묶음과 167권의 금서와 서양 달력이 있었다."
 
토마스는 배를 타고 한양으로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때마침 불어오는 강풍으로 그가 탔던 조선배가 파선되었고 그는 한양으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는 조선을 떠나 만주의 피쯔위 항구에 도착했고 거기서 걷기도 하고 말을 타기도 하여 베이징으로 갔다.
 
토마스는 2개월 반 동안 조선에 체류했고, 4개월 만에 베이징으로 돌아온 것이다.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토마스에게 기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대하던 대로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재임명되었으며, 베이징 지부로 발령이 났다는 통보였다.
 
사실 그는 1865년 8월경 이미 재임명되었다. 다만 관련 서신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전달되기까지 몇 개월이 소요되었기에 늦게 알았을 뿐이다.
 
▲ 셔먼호로 추정되는 당시 군함 그림 ©위키토피아  
 
제2차 조선 선교여행
 
1866년 8월 9일, 토마스는 미국의 무장 상선 '제너럴셔만호'의 통역관으로 제2차 조선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토마스는 런던선교회 소속의 선교사이었지만, 이번에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의 윌리암슨 선교사의 도움으로 성경을 가지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토마스의 편이 아니었다.
 
1866년은 병인년이다. 대원군은 본격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1863년부터 1873년까지 10년간 아들인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했다.

▲ 제너럴 셔먼호 사건 당시 평안도 관찰사였던 박규수 초상화. 박규수가 셔먼호에 대한 화공 명령을 내렸다. ©위키토피아    

 
▲ 토마스 선교사 무덤 ©크리스찬리뷰 DB    


▲ 토마스 선교사  ©크리스찬리뷰 DB 

중국은 제2차 아편전쟁의 패배로 '베이징 조약'(1860년)을 맺게 된다. 전쟁 당사자도 아닌 러시아는 조약을 중재해주었다는 명목으로 중국에게 연해주를 할양받고 조선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부동항을 찾아 남하 정책을 펼치던 러시아가 조선을 위협하여 통상을 요구하자, 대원군은 조선에서 선교하는 프랑스 신부와 협상하여 조·불·영 동맹을 체결하려고 했다. 프랑스 신부와의 만남이 지연되면서, 러시아는 특별한 이유 없이 물러갔다.
 
대원군이 천주교와 내통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정치적 기반이 위태롭게 되자, 대원군은 초기의 천주교 '묵인정책'에서 '탄압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되었다. 왜 조선이 천주교를 박해했을까? 당시의 교서를 보면 박해의 원인을 알 수 있다.
 
▲ 구세군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마가복음 한문 쪽성경 표지. ©김환기    

"'사교를 금지하는 교서', '요즘의 서양인 사건은 참으로 일대변괴이다. 우리 백성들의 떳떳한 윤리를 파괴하고 우리나라의 풍습과 교화를 어지럽혔으니 천도로 용납할 바가 아니며 왕법으로도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다.'
 
 '만약 이들을 숨겨주고 아뢰지 않다가 발각되었을 경우 결단코 응당 남김없이 코를 베어 죽여야 할 것이다. 1866년 3월 10일 대왕대비 조 씨"
 
박해의 원인은 조선사회의 근간인 유교사상을 천주교가 흔들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가 박해 받은 이유도 유사하다. 기독교는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계급사회에서 인간평등을 주장하고, 다신교 사회에서 유일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용어로 인하여 식인종, 근친상간자들이라는 오해까지 받았다. 주후 64년 로마의 대화재로 황제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자, 네로가 희생양으로 기독교인을 지목하면서 본격적으로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8월 27일, 제너럴셔만호의 승무원 6명이 작은 배를 타고 평양의 한사정으로 향했다. 순시대장이었던 중군 이현익이 그 배를 뒤쫓았으나, 오히려 제너럴셔먼호 승무원들에 의해 억류되었다. 순식간에 붙잡혀 본선으로 끌려간 이현익은 그곳에서 자신의 인장 역시 빼앗겼다.
 
조선법에 따르면 군인이 공식 인장을 잃어버리면 누구든지 참수되거나 귀향을 가게 되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과 제너럴서먼호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화포와 조총이 난무하면서 2주간의 대치 끝에, 9월 5일 제너렬셔먼호는 불길에 휩싸이게 된다.

27세의 토마스는 성서를 강가에 뿌렸고 육지에서 체포된 후, 참수를 당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목을 베는 '박춘권'에게 성서를 건네주었다. 토마스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박춘권'은 훗날 회개하고 장로가 되었다.
 
▲ 92세의 김석태 전 구세군 한국 사령관은 이 시대 역사의 산증인이다. ©김환기    

 토마스와 김석태 사령관
 
김석태 사령관은 1926년 1월 23일 생이다. 20년은 일제 통치하에서, 해방되고 5년은 공산치하에서, 6.25가 터지고 인민군으로 내려와 반공포로가 되어 거제도 수용소에서 3년, 석방 후 국군으로 3년, 제대 후 구세군 사관이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정말 파란 만장한 삶을 걸어왔던 이 시대 역사의 산 증인이다. 그는 '한국 구세군 사령관'으로 은퇴하고 5년마다 책을 출간하여 지금까지 5권을 썼다. 고희에 발간한 첫 번째 책은 ‘내 인생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나요’이다. 자신의 70 인생을 되돌아보니 한마디로 "내가 산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음"을 간증한 책이다.
 
75세에 쓴 책은 '예수傳家'이다. "언젠가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상봉할 기회가 온다면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예수를 믿었고 또 전하며 살았다는 말을 이 책이 대신하여 말하리라."
 
그는 평안남도 영원에서 태어났다. 전통적인 유교가정에서 자랐지만 소학교 때 교회를 다닐 수가 있었다.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가 크리스찬이라는 것을 알고 교장은 양자택일을 하라고 했다. 그는 신앙을 택하고 교사를 그만두었다.
 
6.25가 발발하고 인민군으로 징집이 되었다. 그는 총을 들고 기도했다. 이 총으로 아무도 죽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의 응답인가? 그는 포로가 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거제도 수용소에서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반공포로로 석방되어 국군에 입대했다. 춘천에서 근무할 때 구세군교회를 다니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제대 후 구세군 사관학교에 입교하여 구세군 사관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두고 온 산하, 가족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예수 전가'는 언젠가 그들을 만나서 해야 할 이야기를 쓴 것이다.

▲ 강영진 부교가 김석태 구세군 사령관에서 보낸 손편지. ©김환기     © 크리스찬리뷰

책 내용 중에 피로 물든 성서란 제목 하에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2018년 7월 12일, 광화문 뷔페 집에서 구세군역사박물관장인 황선엽 사관과 함께 만났다. 그는 한문 쪽성경인 '馬加福音'을 편지와 함께 가지고 왔다. 편지는 구세군 제일교회에서 찬양대를 지휘하는 강영진 부교가 김석태 사령관에게 쓴 글이다.
 
"존경하는 김석태 사관님, 하나님의 축복이 사관님과 가정에 항상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사관님의 예수전가를 보며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특히 제1권의 '피로 물든 성서'에서 조선 선교에 하나의 밀알이 된 토마스 선교사님의 거룩한 순교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10여 년 전 중국 산동성 연대시 서쪽에 있는 봉래(옛 지명 등천)라는 곳에서 오래된 마가복음 구했습니다. 아마 토마스 선교사가 1866년 순교할 때 마가복음, 쪽 성경을 들고 순교할 당시의 성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사관님께서 제게 손수 책자도 전달하셨는데 제가 사관님께 드릴 자그마한 답례가 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주의 일을 위해 힘써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2016년 7월 3일
                                                  강영진 올림
 
▲ 토마스 선교사가 1866년 순교할 당시의 성경으로 추정되는 마가복음 한문 쪽성경이 구세군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김환기    

김 사령관은 어릴 때 '토마스 선교사'와 '주기철 목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꿈을 키웠다. 그가 쓴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평양성 사람들의 구전에 의하면 관헌들은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대동강변에 있는 대동문에 달아 이를 공개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토마스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 속으로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토마스가 순교하고 50년이 지난 1918년이 되서야 오문환 장로가 토마스를 만나 성경을 받았거나 그와 면담했던 조선사람 200명을 만나보고, 연구를 계속하여 1928년 ‘토마스 목사전’을 썼다.
 
그 후 1932년 대동군 대동강면 조왕리교회를 '토마스 선교사 기념교회'로 선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북한이 공산화 되면서 모든 교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토마스와 김진경 총장
 
2001년 1월 '연변 과학기술대학교' 김진경 총장은 북한에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북한 대표단이 김 총장을 찾아 뵙겠다는 내용이다. 찾아온 대표단은 김진경 총장을 평양으로 초청한다는 내용문을 전달했다.
 
평양을 방문하니 김일성 종합대학 총장과 김책 공대 대표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김 총장에게 연변과 똑같은 과기대를 평양에도 세워 줄 것을 요청했다. 북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 받고, 평양과학기술대학 부지를 조사하던 중 김 총장은 대동강변을 택했다.
 
그곳은 군부대 땅이었다. 북한 교육청 관리들은 깜짝 놀라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김 총장은 "최고지도자가 뭐든 다 들어주라고 했으니까, 일단 우리 안을 올려나 보라"고 말했고, 얼마 후 군대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군대를 옮기고 평양과기대의 기초공사를 하던 중,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땅을 파던 중 토마스 선교사의 기념교회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토마스 선교사의 기념교회가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다음 호 계속>  

글|김환기 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구세군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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