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정성으로 읽는 거에요
 
최주호/크리스찬리뷰

어느 날 지하철을 탔는데 옆 자리의 아주머니가 불경을 꺼내서 읽는 것이다. 난 지하철 같은 공공 장소에서 성경을 읽는 사람은 더러 보았지만, 불경을 읽는 사람은 처음 보았기에 신기한 눈으로 유심히 그분을 보았다. 곁눈질로 그분이 읽고 있는 불경을 보니 한자로 쓰여져 있었고 그 밑에 한글로 음역이 달려 있었다.
 
나는 그 책과 아주머니를 번갈아 보다가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 아주머니가 과연 저 어려운 한자를 이해할까?” 그래서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그분에게 물었다. 마치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물었던 것처럼~
 
“아주머니! 지금 읽는 것 이해하십니까?”
 
그러자 그 아주머니가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째려 보면서 말했다. 
 
“이 책은 정성으로 읽는 거에요”
 
나는 난생 처음 책을 정성으로 읽는 방법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에 알았다. 그분은 책에 쓰여진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그 정성스러운 행위(?)를 더 중요시하는 분이었다. 세상에나… 이런 방법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다가 갑자기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떠올랐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잘못된 기도의 하나였던 중언부언 기도를 책망하셨는데 어쩌면 이 경우와 흡사한 것 같았다. 중언부언의 기도란 주문을 외우듯이 하는 것인데 이는 기도의 내용보다 내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정성과 그 행위가 더 강조되는 기도를 말한다. 그 아주머니의 경전 읽기가 정성으로 무장한 중언부언의 기도 버전이라는 생각이 드니 왠지 씁쓸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가끔 신앙인 중에서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덮어놓고 믿으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난다. 실은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인데 그 이유는 어떻게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로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 토달지 말라는 말은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 다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 기독교란 하나님이 계시한 말씀을 깨닫고 그것이 마음에 믿어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종교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고 부르는데 인간의 행위나 정성이 아닌 계시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때, 지정의(知情意) 즉 사유하고 느끼고 이해하고 책임지는 인격체로 만들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생각없이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에게 계시하셨다. 이 말은 첫사람 아담이 입력된 프로그램대로 행동하는 로보트가 아니라 들려진 그 말씀에 따라 스스로 선택하는 책임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무게있는 말씀인지를 아담은 분명히 이해했을 것이다. 어쩌면 사단이 아담이 아닌 하와에게 접근했던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듣고 이해했던 지혜(?)로운 아담보다 간접적으로 들었던 하와가 더 공략하기 수월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무튼 창세기의 시작부터 인간은 덮어놓고 믿게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듣고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이다.
 
작년 한 해 동안 계시록을 공부하면서 배운 것은 계시록도 성경의 한 권이고 그렇기에 다른 성경처럼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은 감추어진 말씀이 이미 요한에 의해서 드러나게 되었다고 선포하고 있다.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의 인이 어린양 되신 예수님에 의해 봉인 해제되었고 이제 우리는 그 두루마리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계시록의 마지막 장인 22장은 이렇게 마친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계 22;7)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
 
계시록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 것과, 또 지키라는 말을 했다면 이는 이미 이해된 계시의 말씀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계시록을 포함한 66권의 말씀 전체를 듣고 이해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언젠가부터 기독교에 침투한 세속적인 시류들이 계시 종교인 기독교의 참 맛을 잃어버리게 만든 것 같다. 한동안 베스트 셀러로 많이 팔렸던 긍정적 사고류의 책들이나, 시크릿 같은 자기 암시를 기초로 한 성공지향적 책들, 또한 모든 문제를 세속적인 심리학에 근거해서 상처의 해결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내적 치유류의 책들이다. 어쩌면 계시된 말씀인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오류들일 것이다. 
 
중세 기독교의 타락 원인을 언급할 때에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은 라틴어로 쓰여진 성경을 깨닫지 못했던 사람들의 무지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더 심각했던 문제는 평신도가 아니라 목사들도 성경에 대해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오덕교 교수가 끈 “청교도 이야기”에는 J.C Ryle 주교가 말한 중세 기독교의 타락 상황을 이렇게 언급한다.  
 
“16세기 중반의 영국 교회는 거의 암흑 가운데 있는 교회였다. 존 위클리프에 의해 번역된 신약 성경이 있긴 했지만 문제는 예배가 라틴어로 드려졌기에 설교나 기도의 내용을 알아 들을 수 없었고, 성경을 접하지 않은 평신도들은 성경의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설교는 일 년에 네 번 밖에 없었다. 목회자들도 무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사역이란 공부할 필요가 없던 사역이었다.
 
후퍼가 1551년 부임한 글루스터 지역에는 311명의 사제가 있었는데 그중에 168명은 십계명을 외울 수 없었고, 31명은 십계명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도 몰랐다. 40명은 주기도문이 어느 성경에 있는지도 몰랐고, 31명은 주기도문의 저자가 누군지도 몰랐다 이것의 결과는 결국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을 낳게 했고, 이런 생각은 성자 숭배로 이어졌다.
 
농사짓는 사람은 성 도로시, 정육점은 성 바돌로매, 광산업과 관련된 직업은 성 안나 등 직종에 따른 수호 성자를 숭배했지만 대개는 마리아 숭배가 제일 심했다. 성자들의 유품이나 유해 또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십자가의 고행이나 맹목적인 금식 같은 자기 고행이 유행했다.
 
정성으로 불경을 읽는다는 그 아주머니의 이야기에서 좀 멀리 갔지만, 실은 ‘덮어놓고 믿으라’는 결코 기독교 방식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는 작업을 해야 한다. 말씀을 듣는 일, 읽는 일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성령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빠져버린 기독교인은 껍데기 신앙만 남은 기독교인일 뿐이다.
 
우리는 더 정기적으로(?)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하고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성경은 처음 쓰여질 당시부터 일반인을 위해 쓰여진 글이다. 이 말은 이해 가능한 책이지 불가능한 비밀스러운 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게다가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번역된 다양한 역본들이 있지 않은가? 그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일전에 본 다큐멘타리에서 티벳 불교를 대표하는 마니차라는 원통을 보았다. 마니차는 티벳 말로 경통, 법륜 또는 기도륜이라고 부르는데, 중앙에 경전을 둘둘 말아 넣어 그 무게 추의 원심력에 따라 자연스럽게 원통을 돌릴 수 있는 통이다. 그들은 마니차를 돌리면서 그 마니차가 일으키는 바람이 경전을 읽어 주어 경전을 돌리는 사람은 바람으로 그 경전의 의미를 알아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정성으로 읽는 것과는 좀 다르기는 한데 결국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하지 않고…. 경전을 읽는 것인데 분명 글을 모르던 신도들을 위한 궁여지책으로 고안해 낸 것일 게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금 기독교의 위대함을 인정하게 된다. 읽고 듣고 깨닫고 행하고… 어쩌면 가장 단순한 이 모습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가장 큰 힘인지 모른다.
 
정성이 아니라 ~~〠   


최주호|멜번순복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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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1/29 [17:48]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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