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스마니아대학의 살아있는 전설

UTAS 컴퓨터학부 종신학장

글|주경식,사진|권순형 | 입력 : 2019/03/28 [17:17]

 

▲ 타스마니아대학 컴퓨터학부 종신학장 최영주 교수가 오랜만에 타스마니아대학 론세스톤 캠퍼스를 찾았다.     © 크리스찬리뷰

 

“역사와 드넓은 야생 구역을 자랑하며 호주에서 가장 멋있는 산,  눈부신 해변, 신선한 음식과 와인이 공존하는 타스마니아가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이것은 타스마니아 관광청이 타스마니아를 소개하며 홍보하는 글이다. 타스마니아는 호주의 보물섬으로 통한다. 전체 섬 크기는 남한(약 10만 평방 km)의 약 2/3 크기인 6만 8천여 평방 킬로미터인데 인구는 50만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약 1/4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을 정도로 타스마니아가 가지고 있는 자연환경은 세계 어느 곳과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섬이다.
 

이 섬을 찾았다. 타스마니아의 살아있는 전설, 호주에서 한국인 최초의 교수(professor) 최영주 학장(타스마니아대학 컴퓨터학부 종신학장)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 비가 와서 그런지 론세스톤은 서늘한 날씨였지만 깨끗한 창공은 미세먼지로 고생하는 한국의 동포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맑고 청명했다.

 
한국인 최초 ANU 대학 학사 졸업생

 

▲ 광주제일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실려 있는 최영주 군 (1965) ©최영주    

 

그는 광주제일고교를 졸업하던 해인 1966년 11월에 호주에 도착했다. 그리고 1967년에 호주국립대(Australia National University) 수학통계학과에 입학했다. 그의 아버지 최명준 씨는 주 호주 대한민국 대사관의 참사관 및 초대 호주 총영사로 그보다 일 년 먼저 호주에 와 있었다.
 
아버지가 외교관이어서 다른 동생들은 아버지를 따라 함께 옮겨 다녔지만 큰 아들이었던 최영주는 한국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지금도 호주 최고의 대학으로 손꼽히지만 그때도 호주를 대표하는 캔버라국립대학교에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그가 적응하기에는 쉽지 않았으리라.
 
“영어를 못해서 수학통계학과를 선택했습니다.”
 
겸손하게 대답하는 그의 말에 재치가 넘친다. 그의 억양과 말씨는 오히려 외국인이 한국어를 하는 느낌이었다. 부드러운 미소와 호의적인 매너가 몸에 밴 그의 제스처는 오랜 세월을 호주 주류 사회안에서 지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그는 호주국립대학교(ANU)를 1970년에 졸업하며 학사(B.A)학위를 받았다.
 
“그때 호주국립대학교의 사무처에 일하던 과장이 여자분이셨는데 저한테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한국사람으로는 최초로 ANU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대요. 호주 전체는 모르겠고, ANU에서.”
 
1970년이면 아직 한국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때였다. 더욱이 사람들이 미국은 알아도 호주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고 더군다나 호주 자체도 백호주의 정책이 시행되고 있었을 때였으니 한국인이 호주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는 일은 드문 일이었을 것이다.

 
컴퓨터와의 인연

 

▲ 최 교수의 부친 최명준 씨는 초대 호주 총영사를 지냈다. 사진은 캔버라 대사관에서 촬영한 가족사진(1969). ©최영주    
▲ 최영주 군이 1966년 10월에 발급받은 여권. 당시 17세였다. ©최영주    


그가 ANU에서 마지막 학년을 다닐 때 운좋게도 수학통계학 과정에 전산코스가 선보였다. 그래서 졸업하기 전 전산과정도 얼마간 맛볼 수 있었고 이 계기로 그는 1970년에 ANU를 졸업하고 바로 ANU대학원 전산학(Computer Science)과로 진학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1980년도가 되어서야 개인용 컴퓨터가 시장에 선보일 때였고 1970년에는 고작해야 정부 부처에만 컴퓨터가 몇 대 있을 때였으니 이미 호주가 교육부분에서 한국보다 앞서 있었던 것 같다. 그는 ANU대학원 전산학과를 다니며 호주 외무성의 전산일에서 잠깐 일을 하기도 했다.

 

▲ 지난 시절을 회고하며 본지와 인터뷰 중인 최영주 학장.     © 크리스찬리뷰


 
“그때는 호주도 컴퓨터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을 때라 전산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대학원 전산학과를 다니며 호주 외무성의 전산실에서 근무를 했었지요.

 

▲ 최영주는 육군 병장 시절인 1973년 지금의 아내 이희순을 만나 결혼했다. ©최영주    

 

그런데 그때 한국에서 영장이 나왔다며 군대를 가라고 해서 한국에 들어 갔어요. 그러나 제가 호주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군대 안가도 됐어요.”
 
그러나 그는 군 병역 의무를 다하기 한국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정치인들이나 정부 고위층 인사 가운데 군대를 교묘하게 면제받은 일로 세상에 회자되는 일들이 많다. 그러나 그는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고 3년간 군생활을 모범적으로 마쳤다.
 
그리고 다행히 군대에서도 그의 전공을 살려 컴퓨터 시스템 프로그래머로 근무하게 되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육군본부 중앙경리단에 있었어요. 육군의 모든 돈, 재정을 관리하는 곳이 중앙경리단이거든요. 그런데 그때 한국에 큰 컴퓨터가 3대가 있었는데 전부 미국 정부에서 원조를 한 거에요. 한 대는 육군본부 중앙경리단, 또 한 대는 중앙정보부, 나머지 한 대는 육군본부. 이렇게 세 대가 들어와 있었는데 모두 군대에 있는 거에요. 그런데 컴퓨터가 들어온 지 얼마 안되니까 컴퓨터를 아는 사람이 없는 거에요.”
 
그는 한국에 와서 군복무를 하는 동안 컴퓨터를 조작하고 가르침으로 많은 경험을 쌓게 된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아내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다.

 

▲ 최영주-이희순의 결혼사진 ©최영주    

 

다시 호주로

 
결혼을 한 그는 앞으로 그의 인생에 대해 진지한 고민 끝에 본인의 적성에 교수생활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하던 공부도 마칠 겸 다시 캔버라로 돌아와 ANU에서 전산공부를 더 하게 된다. 그러면서 ANU대학에서 자리를 찾아보았지만 조건이 좋은 ANU대학에는 그가 일할 자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 친구의 소개로 아들레이드 대학(Adelaide University)을 소개받게 된다.
 
“1975년경 제가 아내와 함께 다시 호주 ANU로 돌아왔어요. ANU에서 공부도 하며 연구를 계속했지요. 그러면서 여기서 자리를 찾아 보았어요. ANU가 조건이 좋거든요. 그래서인지 자리가 없었어요. 그런데 우연히 친한 친구가 아들레이드대학을 소개해 주었어요.
 
그래서 제가 아들레이드대학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공부도 하고, 주로 연구를 하면서 아들레이드대학에 있다가 1978년에 교수가 되었어요. 1978년에 레벨 A,  Senior Staff Tutor , 지금으로 말하면 Associate Lecturer가 된 거에요. 교수가 된 거죠.  아들레이드에서 유일한 한국인 교수가 된 겁니다.”
 
상기된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말이 다소 빨라진다. 그도 그럴 것이 외국인이, 그것도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호주로 와서 대학공부를 시작했는데, 그는 인생의 기초를 세울 나이인 이립(而立), 30세의 나이에 호주대학의 정식 ‘교수’가 된 것이다.
 
호주국립대 최초의 한국인 학사 졸업생, 그리고 아들레이드대학 최초의 한국인 교수. 아마도 호주 전체를 확인해 볼 길이 없기 때문에 아들레이드라 한정했지만 호주 전체를 따져 보아도 1978년에는 한국인이 호주대학의 교수를 하는 사람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에게 따라다니는 ‘최초’라는 수식어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아들레이드대학에 있다가 1983년에 플린더스대  학(Flinders University)에서 전산학(computer science)과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동료 세 명과 함께 플린더스대학으로 옮긴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84년에 플린더스대학 전산학과 학과장(head of department)이 된다. 그의 나이 35세 때였다.

 

▲ 플린더스대학 교수 시절 아들레이드 자택에서(1984) ©최영주    


그리고 1987년에는 플린더스대학 내 수리과학(school of mathematical science) 단과대학 부학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플린더스 수리과학(school of mathematical acience) 단과대학 안에는 수학과, 통계학과, 컴퓨터과학과 등 많은 학과가 포진하고 있는 종합대학 내 단과대학이다.
 
아마도 호주 아카데믹 사회(academic society)에서 소수민족 1세대가 이렇게 빨리 자리를 잡는 경우는 흔치 않으리라.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만 하기에는 설명이 충분치 않다. 물론 운도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의 컴퓨터과학과 학문에 대한 열정과 노력은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 본지와 인터뷰 중인 최영주 학장. ©크리스찬리뷰  


 
그는 거기서 그의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플린더스대학 수리학과부 부학장에 임명된 지 얼마 안되었을 때에 친구들로부터 소식을 하나 듣게 된다. 타스마니아대학 론세스톤 캠퍼스에 전산학부를 새로 만드는데 이 학부의 종신학장(permanent head)을 구한다는 공고가 나왔다는 것이다.


최초의 한국인 교수(Professor),
타스마니아대학 컴퓨터학부 종신직 학장

 
“타스마니아대학에 자리가 하나 새로 나왔는데 한번 지원해 보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때 타스마니아를 전혀 몰랐어요. 타스마니아대학이 호바트와 론세스톤에 있는데 둘이 경쟁관계에 있었어요. 론세스톤이 좀 약하니까 좀 새로운 분야인 전산학과(Computer Science)를 만들어서 학교를 키운 후 합치자 그럴 때였어요. 저는 기대를 안했어요. 그때 제가 레벨 B, Lecturer 였을 때였어요. 그런데 이곳은 레벨 D, Professor 포지션이었거든요. 그러면 한 10년은 차이가 나는 거였어요.
 
게다가 저는 아직 젊고 더구나 동양사람이고 타스마니아대학에는 동양인 교수가 한 명도 없을 때였어요. 안될 건 알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자 안되면 타스마니아나 한번 관광하고 오자 하는 마음으로 부담없이 지원을 한거에요. 그런데 인터뷰를 아주 힘들게 했어요. 무려 이틀 동안이나 했습니다.” 

▲ 서재에서 최영주 교수(2010) ©최영주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는 정말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같이 지원한 교수들을 보면 거의가 다 호주 백인들이었고 교수의 등급도 자기보다 다 상위인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한번 호주 아카데믹 사회의 교수 등급을 확인해보자. 호주 아카데믹 사회에서는 한국과 달리 교수의 등급이 확실이 구분된다. 처음에는 레벨A, Associate Lecturer로 시작해서 어느 정도 경력과 학문적 성과가 쌓이면 레벨B, Lecturer가 된다. 최 학장은 그때 레벨B 등급이었다. 그리고 다음이 레벨 C, Senior Lecturer이다. 다음이 레벨D, Associate Professor. 평생 교수를 해도 레벨 D까지 못 가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은 레벨 E, Professor 정교수이다.

 

호주 대학에서는 레벨 E, Professor가 단과 대학 안에 한 명 내지 두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정도로 호주 아카데믹사회에서는 영예로운 타이틀인 것이다.
 
“그런데 인터뷰를 마치고 아들레이드로 돌아가려고 론세스톤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멜번공항에 내려 기다리고 있을 때였어요. 그런데 PA시스템에서 제이름을 불러요. 그래서 갔더니 비상 전화를 받으라는 거에요. 무슨 일로 전화를 받으라는 걸까 하고 가서 받았는데 타스마니아대학에서 전화 연락이 온 거에요.

 

▲ 최영주 교수 부부는 아들 진오 군과 딸 진주 양 등 1남 1녀를 두고 있다. ©최영주  


타스마니아대학 이사장인 에드문드 라우즈(Edmund Rouse) 씨에게서 직접 전화가 온 거에요.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저에게 최 교수, 올거야? 하는 거에요.”
 
그는 전혀 기대도 안하고 갔던 인터뷰였기 때문에 아주 편하게 인터뷰에 응했을 뿐만 아니라 학교에 대해 자유롭게 비판도 했다고 한다. 그랬기 때문에 된 것일까?
 
 지금까지 그의 행적을 보면 그에게는 분명 운도 많이 따랐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타스마니아섬을 위해 자신을 부르셨다고 믿는다.

 

▲ 타스마니아대학에 컴퓨터학부를 신설하고 198 9년 종신학장으로 취임한 최영주 교수는 크고 작은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다. ©최영주    


최 학장은 후일 에드문드 라우즈 이사장에게 쟁쟁한 경쟁자들 가운데 왜 나를 선택했냐고 물었다고 한다.
 
“제가 궁금해서 나중에 물어봤어요. 쟁쟁한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나를 선택했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반대도 많았는데 ‘우선 나이가 어리다는 의견도 있었고, 교수 등급이 낮다.(그때 레벨B인 사람은 저 혼자였어요.) 또 동양인이다.’
 
물론 호주가 백호주의를 포기하고 다문화주의로 돌아선 게 1975년이지만 아직도 타스마니아는 보수적인 곳이었어요. 동양인이 많지 않았어요. 그런데 에드문드가 그러더라고요. 다른 경쟁자는 자기가 질문을 할 때 모두 자기가 듣고 싶어하는 정답들만 이야기하더래요. 그런데 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대답을 했다는 거에요. 약간은 신선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는 대답이었대요.
 
그 사람이 원래 사업가잖아요. 타스마니아의 ENT라고 하는 큰 TV 및 라디오 방송국과 신문사를 소유한 언론 재벌이었어요. 원래 사업가는 모험심이 있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사업가여서 모험을 해보았던 거 같아요. 사업가가 아니었다면 위험부담이 따르는 저를 선택하지 않았겠지요.”
 
최 학장은 자기를 뽑아준 사람이 에드문드 라우즈이지만, 그 뒤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확신한다. 그는 1987년 5월에 타스마니아로 건너왔다. 그리고 타스마니아대학 론세스톤 캠퍼스에 새로운 학부를 신설하기 위해 이사장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직접 교수 및 직원들을 채용하고 모든 시설들도 만들고 행정업무를 시작해서 1988년에 타스마니아 대학 론세스톤 캠퍼스의 ‘응용컴퓨터학과’(school of applied computer)를 신설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1989년 이 학부의 종신학장(permeant head of schoo)이자, 부교수(associate professor)로 취임했다. 소수민족(ethnic) 출신으로 호주의 국립종합대학의 종신학장이 된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 HIT Lab이라 불리는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시현할 수 있는 연구소를 세계 3번째로 타스마니아대학에 세운 최영주 교수.     © 크리스찬리뷰


아니 없을지도 모른다. 종신학장은 말 그대로 본인이 싫어서 사임하기 전까지는 영원한 보직인 것이다. 이때가 그의 나이 불혹(不惑)이었던 40세 때였다. 
 
“그때 제가 마흔 살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당시 행정처장이 와서 말하는데 한국사람으로 학장이 된 사람이 제가 처음이랍니다. 공식적으로 호주대학교에서 Dean이 된 사람이 제가 최초랍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90년에 마흔한 살에 제가 정식 레벨 E, professor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그때 총장이 와서 그러더라고요.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이사회에서 결정이 났는데 레벨 E, 정식 교수(professor)로 임명하기로 했다고. 그러면서 자기가 알아봤는데 호주 전체에 한국사람이 레벨 E 인 교수는 한 명도 없더라고. 제가 최초랍니다.”
 
그를 따라다니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이제 낯설지 않다. 그는 호주 아카데믹사회에서 한국을 알리고 한국을 빛낸 인물이다.

 
타스마니아를 넘어 세계로 한국으로


그는 타스마니아대학 컴퓨터 공대 학장으로 20년간 열심히 일했다. 응용 컴퓨터학과를 신설하고 처음 시작할 때는 직원 6명으로 시작했는데 학교가 커지는 바람에 직원도 무려 50여 명으로 늘어날 정도로 학교가 커진 것이다. 론세스톤 캠퍼스가 커지자 나중에 호바트 캠퍼스의 전산학부까지 흡수해서 그가 관리하게 된다.
 
최영주 학장이 재직하고 있을 당시에 타스마니아 대학 컴퓨터 공대는 호주 전체 대학 컴퓨터 공대 가운데 2-3위를 다툴 정도로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2000년에 들어서면서 최 학장은 중국에 진출하게 된다. 중국에 있는 대학들과 교류하면서 타스마니아대학 중국 분교를 중국 상해, 저장성(항주), 복건성(복주)에 세운 것이다.
 
중국 학생들이 각각 분교에서 공부를 한 후 타스마니아대학 컴퓨터학부로 와서 공부를 할 때 많게는 200명이 와 있을 정도로 타스마니아 대학이 성장했다.

 

▲ HIT Lab에서 교육받는 학생들. ©UTAS    


또한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의 많은 대학들과도 MOU를 맺고 연계하여 한국 학생들을 호주로 불러와서 교육시키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그의 제자 가운데는 지금 타스마니아대학 컴퓨터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교수들(염순자, 강병오)도 있고 시드니 UTS 공대 교수(강경순)도 있다. 한국에는 더 많은 제자들이 활약하고 있다. 그들 모두 최 학장에게 배우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대학과 연구소에서 기업에서 각기 활약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은 한국에서도 유행이 되고 있는 IT신기술인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의 선구적 연구를 타스마니아대학에서 일찍부터 시작했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연구는 미국과 뉴질랜드가 세계적으로 앞서 있었다. 그런데 호주에서 미국과 뉴질랜드 다음으로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최영주 학장의 선각적 지식과 노력 때문이었다.

 

▲ 호주 휴먼 인터페이스 기술연구소는 론세스톤 타스마니아대학 뉴햄 캠퍼스에 자리 잡고 있다. ©UTAS    


HIT Lab(Human Interface Technology Laboratory)이라 불리우는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시현할 수 있는 연구소를 미국과 뉴질랜드에 이어 호주의 타스마니아 대학에 세 번째로 세운 것이다.
 
지금도 호주 구글에서 HIT Lab을 검색하면 타스마니아 대학이 맨 위에 뜬다. 그는 분명 호주 컴퓨터 학계의 선구자이다.

 
그의 신앙 이력과 미담

 
최영주 학장은 모태신앙인이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기는 했으나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한 것은 결혼 후 부인의 영향이 컸다. 그의 장인은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있는 연동교회 이종진 장로다. 이종진 장로는 스칸디나비아 3국의 원조를 받아 국립중앙의료원를 설립하고 그 후 원장과 이사장을 지낸 독실한 기독교이었다.
 
최 학장이 타스마니아대학에 처음 올 때는 타스마니아에 한인교회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타스마니아에 온 후 많지 않은 한인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래서 한인 성도들끼리 모임을 갖기 시작하며 교회가 시작될 수 있었다. 지금은 론세스톤사랑교회(담임목사 박승민)를 묵묵히 섬기고 있다.

 

▲ 론세스톤사랑교회 최근 전교인 단체사진(2019.2)     © 크리스찬리뷰
▲ 창립 3주년 기념예배 단체 사진( 2012.4). 7년 전에 비해 젊은이들의 숫자가 눈에 뜨게 줄었다. ©최영주    


호바트에 비해 론세스톤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많지 않다. 그래서 유학생들과 워킹홀리데이 청년들의 상황에 따라 교회가 부침이 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 27년 동안 그는 안수집사로 작은 교회를 심지 깊게 섬기고 있는 것이다.

 

▲ 론세스톤에 작은 모텔을 구입해 제자 가정과 함께 운영하고 있는 최영주 교수. 최 교수가 모텔을 찾아 온 관광객과 담소하며 지역 명소들을 안내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 황성근, 최영신 집사 부부는 최영주 교수 부부와 함께 뮤즈 모텔을 관리하며 운영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기자도 론세스톤사랑교회 예배에 참석해서 설교를 했다. 많지 않은 성도들이지만 화기애애하고 따뜻한 인상을 받았다. 성도들이 주로 젊은층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최 학장은 그중 가장 어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젊은이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있었다.
  
박승민 목사는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제가 보는 최영주 집사님은 청빈한 학자이십니다. 돈과 재물을 따라가지 않는 분이세요. 그리고 제가 시무하고 있는 9년 동안 한 번도 제 목회에 No를 하신 적이 없으세요. 얼마나 겸손하게 목회를 도와주시는지 모릅니다.”
 


이번 인터뷰도 사실 박승민 목사가 메시지를 보내와서 시작할 수 있었다. 타스마니아는 시드니, 멜번, 브리즈번에 비해 한인들이 적고, 자칫 잊어버릴 수 있는 곳이지만 이곳 타스마니아에도 꾸준히 ‘크리스찬리뷰’가 배포되고 있다. 그래서 박승민 목사는 론세스톤사랑교회를 꾸준히 그리고 묵묵히 섬겨 온 최영주 집사가 칠순을 맞은 지난 1월, 본지에 인터뷰를 요청해 온 것이다.
 
작은 교회를 오랫동안 섬기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도 자주 바뀌는 유학생들이 중심인 교회는 더더욱 어렵다. 그러나 최 학장은 타스마니아를 지키는 등대처럼 이곳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다. 
 
그가 타스마니아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증명하는 사건이 하나 있다. 그는 퇴직 후 타스마니아를 떠나 다른 곳에 가서 은퇴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재 론세스톤에 작은 모텔을 구입하여 제자(황성근, 최영신 부부)들과 함께 모텔을 운영하며 타스마니아 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다.
 
본지 취재진 일행이 묵었던 곳도 바로 최 학장이 운영하는 뮤즈 모텔(Mews Motel)이었다. 최 학장은 이곳에 방문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하며 타스마니아를 소개하는 일을 천직으로 삼고 있다.

▲ 최영주 교수가 지난 1월 칠순을 맞았다. 최영주 안수집사와 이희순 권사는 지난 1973년 결혼한 이후 46년 동안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왔다. ©최영주    

 

▲ 뮤즈 모텔(MEWS Motle)사무실에서 예약 현황을 점검하고 있는 최영주 학장     © 크리스찬리뷰


기자는 이번에 처음으로 타스마니아를 방문했다. 인간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 호주에서 가장 많은 역사적인 명소들을 가지고 있는 도시, 상업화가 덜 이루어졌고 태고의 비밀을 간직한 듯한 숨은 곳곳은 묘한 매력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인지 근래에 들어 시드니나 멜번 등에서 이주해 오는 한인들도 꽤있다고 한다.
 
최영주 학장을 인터뷰하면서 그의 삶의 여정이 타스마니아 곳곳에 그대로 녹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고백대로 그가 타스마니아에 온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타스마니아 곳곳을 설명하는 그의 열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갑자기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이때를 위함이 아니겠느냐?’(에 4:14) 하는 말씀이 떠오른다. 하나님께서 혹시 타스마니아 한인들을 위해 최영주 학장을 이곳에 심어 놓으셨던 것은 아닐까?〠


글/주경식|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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