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내 한인 공동체(2)

정착, 경제적 적응, 그리고 한국어와 한국 문화의 진흥

한길수/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9/04/29 [12:49]

 시드니 내 중심 상업 지역이나 산업 공장들과 가깝거나 혹은 철도역 근처라 접근성이 좋은 도심 지역으로는 Surry Hills, Redfern, Darling-hurst, Marrickville, Summer Hills 그리고 Newtown이 있었다. 이 지역에서의 임대료는 비교적 지불 가능한 수준이었다(김영성, 1998: 46-47).
 
1976년과 1980년의 사면 이후에, 사면 받은 한국인은 그들의 가족들과 재회하게 되었다. 그들은 임대할 수 있는 저렴한 주택과 상점 그리고 교통이 편리한 장소를 찾아 다녔다. 자녀들의 교육은 거주지의 선택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많은 한인들이 Campsie, Ashfield 그리고 Canterbury에 정착하기 시작하자 더 많은 한인들을 이 지역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이는 원심 주거 이동성에 관한 실례의 시초였다(김영성, 1998: 47-48).
 
1986년에 Canterbury시에는 Campsie, Belmore, Canterbury 그리고 Lakemba를 아울러 1,000명이 조금 넘는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새로이 이주해온 한인들은 이미 정착한 친척이나 새로운 지인들 근처 지역에 정착하고자 하였다. 2001년의 경우, Canterbury에 사는 한인들의 수는 3,131명에 도달했고, 이 지역은 시드니 메트로폴리탄 지역 내에서 한인 이주민들이 가장 집중되어 있는 곳이 되었다(이경숙, 2008: 176).
 
그러나 2006년에는 2,998명으로 감소하였고 이로 인해 Canterbury는 네 번째로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 되었다. 이러한 감소의 일부는 호주에 사는 한국인 중 적은 비율이 시드니 지역에 사는 것을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Canterbury에 초기에 정착했던 이들이 노령으로 인해 더 높은 사망률을 기록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점차 더 적은 한인들이 Canterbury에 거주하고자 하면서, Canterbury 지역은 신생아의 수가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났다. 덧붙여, 젊은이들이 Canterbury 지역을 떠나 Strathfield, Eastwood 그리고 Chatswood와 같은 지역으로 새로이 옮겨가면서 Canterbury는 인구가 적고 상대적으로 상업 활동이 부진하게 되었다.
 
2006년 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Hornsby(3,271명)가 한인들이 가장 많은 지역이고 그 뒤로 Parramatta, Ryde, Strathfield, Sydney, Auburn, Baulkham Hills의 순서로 뒤이었다. 지역 내 쇼핑센터 주변에 세워진 고층 아파트들 또한 한인들을 그 지역으로 끌어들이는데 한 몫을 했다(이경숙, 2008: 178). 
 
북 시드니의 한국인 인구가 눈에 띄게 증가한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Auckland에 살던 많은 한국인 이주자들이 Hornsby, Carlingford, Eastwood 그리고 Deewhy 같은 시드니 북부 지역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불할 수 있는 가격의 주택, 교통 접근성이 좋고 자녀들을 위해 평판 좋은 고등학교가 있는 장소를 찾아 다녔다(김지환, 2008c: 107).
 
Parramatta가 현재 주거 지역으로 인기가 많은 이유는 비교적 저렴한 임대료, 평판이 좋은 학교, 그리고 교통수단에 대한 쉬운 접근 때문이다. Parramatta에서 시드니 중앙역까지는 기차로 40분, 급행으로 20-25분이 소요된다.
 
Ryde는 한국인에게 인기가 많은 또 하나의 지역인데, 특히 학생들과 어린 아이를 둔 가정에게 유독 인기가 많았다. 2001년에는 2,018명의 한국인이, 2006년에는 3,028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이 지역은 기차와 버스를 통해 도시와 편리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아파트의 많은 공급으로 인해 시드니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의 수가 증가하였다.
 
더 나아가, 이 지역은 Eastwood와 가까웠는데, 여기에는 꽤 규모가 크고 이미 자리를 잡은 한인 소유의 사업체들이 있었다(이경숙, 2008). 2006년 당시에 시드니 시내의 인기와 비슷한 정도로, 2011년 Ryde에 사는 한국인들은 3,035명에 달하였다.

 

▲     © 한길수



이경숙은 이러한 인기가 다음과 같은 요인들로 인해 나타났다고 제시한다. 한국 출신 유학생들은 도시 중심이나 자신이 다니는 전문대학교 근처에 거주한다. 학업을 마치고 영주권자가 되면, 그들은 자신이 학생이었을 때 지내던 곳에서 계속 머무른다.
  

나아가, 워킹 홀리데이 비자 소유자, 관광객, 그리고 여타 단기 방문자들 또한 시드니 시내에 머무르고자 한다. 인구조사가 8월 9일에 실시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한국 여름 방학 기간 동안 영어를 공부하고자 온 학생들의 수가 상당수 포함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원심 주거 이동의 일환으로, Willoughby, Baulkham Hill, Strathfield 그리고 Canada Bay와 같이 상대적으로 풍요한 시드니 메트로폴리탄 지역에 정착하는 한국인이 증가하였다. 이는 1.5세와 2세대 한인들의 사회경제적 상향 이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Chatswood를 아우르는 Willoughby 지역은 특히나 한인 사업 대표, 어린 자녀를 둔 ‘기러기 엄마’, 그리고 최근에 이주해온 젊은 숙련 이민자들 가정에게 인기가 많았다(이경숙, 2008: 178-9).
 
시드니 메트로폴리탄 지역에 사는 305명의 한인들을 상대로 지리 조사를 수행한 김영성은 한인 이주자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부를 모을수록 더 좋은 거주 환경으로 옮겨가고자함을 발견하였다. 좀 더 비싼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과 덜 비싼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비율은 1: 0.83이었다.
 
더 좋은 생활환경으로 옮겨가는 것은 현재의 거주 지역보다 주택가격의 중간 값이 더 높은 지역에서 주택을 구매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43.3%가 더 비싼 지역으로 옮겨갔고, 27.8%가 비슷한 가격의 지역으로, 그리고 39.8%가 더 저렴한 지역으로 옮겨갔다(김영성, 2006: 509).
 
요약하자면, 1세대 이민자들, 즉 사면, 숙련/독립 그리고 비즈니스 이민자들은 원심 거주 이동성에 상대적으로 거의 기여한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1.5세대와 2세대들은 사회적 상향 이동을 성취했고 그들의 부모가 있는 곳에서 더 좋은 생활환경으로 이동하였다.
 
덧붙여, 최근에 이주해 온 한인 이민자들, 단기 학생 그리고 단기 거주민들은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지역에 정착하였는데 이는 한국에서 자본을 가져왔기 때문이거나 혹은 호주로 이민을 오기 이전에 그곳에서 학생으로서 거주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1세대가 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 한국인 공동체 내에서 한국인들 사이의 ‘사회 경제적 거리감’을 지속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사면 이주자와 같은 ‘구포(구교포)’와 숙련/독립 그리고 비즈니스 이주민 등과 같은 ‘신포(신교포)’가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집단은 서로를 향해 비우호적인 발언을 했고 이는 한인 공동체에서 광범위한 집단이 형성되는 것을 반영하고는 했다(Han, 2001: 547).

 
4.아시아 금융 위기와‘IMF 방랑자’

 
호주는 80년대와 90년대 동안 점차 경기 침체를 겪게 되었다. 그 기간 동안 호주 정부는 국제 시장의 맥락에서 자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몇 가지의 경제 개혁을 시행하였다. 그런데 호주 국내 경제는 1997년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강타했던 아시아 금융 위기로부터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자국 내 경제적 역경은 시드니 내 한인 공동체에 눈에 띄는 영향을 미쳤다(Seol, 1999). 국제통화기금은 한국 통화가치의 붕괴 이후에 한국 경제를 개혁하기 위한 여러 조치들을 도입했다.
 
한국인들은 이 같은 과정을 ‘IMF(개입) 위기’라고 부른다(Han and Han, 2010). 한국 경제의 회복을 위해 경제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시드니에 있던 한인 공동체는 심각한 사회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시드니로 오는 관광객의 유입이 멈추었고 워킹 홀리데이 비자 소유자와 ‘정상적인’ 방문자들이 1997년 이후에 상당히 줄어들었다.
 
대신에 한인 공동체는 한국에서 새로운 실직자 혹은 파산자 혹은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시민들로 이루어진 임시 이주자들의 강한 존재감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시드니의 한인 이주민들은 이러한 새로운 임시 이주민들을 ‘IMF 방랑자’라고 이름을 붙였다(Han and Han, 2010: 28).
 
호주로 이주하는 이민자의 수가 급격히 감소한 이후에 그 숫자가 회복되기까지는 10년이 걸렸다. 이 같은 감소는 한인 공동체의 사업 활동에 심각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공동체 내에서 비슷한 사업장들 사이에 극심한 경쟁을 유발하였다. 결과적으로 한인 공동체 내에는 많은 사업들의 폐업과 임금 수준의 하락이 관찰되었다.
 
기존 주민들과 임시 이주자들 사이에 갈등이 일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Han and Han, 2010: 28). 지금까지 호주로 이주한 한국인 중 가장 많은 수인 4,255명이 영주권자로 호주에 정착한 것은 2006-7년 회계 연도 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영구 정착민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2009-10년도에는 4,350명, 20100-11년에는 4,326명, 2011-12년에는 4,874명, 그리고 2012-13년에는 5,258명이었다. 반면에, 한국 사회가 점차 풍요로워지면서 최근 몇 년간 해외에 있는 한인들의 귀환 이주를 상당히 촉진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2011년에는 그 수가 4,257명에 달하였다. 2,122명은 미국으로부터 귀환했고, 693명은 캐나다, 629명은 중앙 그리고 남부 아메리카, 115명은 뉴질랜드로부터, 67명은 호주로부터 그리고 631명은 여타 다른 국가들로부터 귀환하였다.

 
5.경제적 적응

 
1) 사면 이주자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다른 이주민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인 이주민들 또한 이주 이전에 가지고 있던 자격 조건들을 활용할 수 없었는데, 이는 종종 이주민의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인해 고용주들이 자격 조건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자격 조건과 상응하는 직업에 종사하지 않았다(Castles and Miller, 1993: 109). 한국 남성들이 과거 그리고 현재에 종사했던 유형의 직업은 호주에 입국한 방식 그리고 호주에 입국한 시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호주 경제가 상대적으로 건실했던 1970년대에 도착한 후 사면된 이주 노동자들은 공장 작업, 용접, 세차, 식기 세척, 청소, 트럭 운전, 배달 및 광업과 같은 일반적으로 육체노동에 종사하였다.
 
필자의 다른 연구(Han and Chesters, 2001)에 참여했던 응답자들에 따르면 한인 사면 이주자들은 배터리 생산, 타이어 제조, 철 정제 및 플라스틱 용기 생산 공장에서 일자리를 구하는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모든 사면 이주자들은 그들의 교육 수준과 영어 실력과 무관하게 가능한 어떤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Han, 1999b: 11).
 
마취 기술, 법학 학위, 그리고 전기 공학 기술 등과 같은 전문적 훈련을 받은 한인들은 자신들의 전문적 훈련을 호주에서의 직업에 전혀 사용하지 못했다(Iredale, 1988). ‘곧 사면을 받고자 하는 이주자’들이 호주에 ‘관광객’으로 도착하자마자 호주 기업들은 이들을 ‘낚아채’듯이 고용했다.
 
사면 이주자들은 일반적으로 기술을 상대적으로 빨리 습득할 수 있고 그들이 ‘좋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직종에 집중되었다. 번영하는 경제 환경 하에서, 1970년대에 한인들은 급여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직종으로 전직하였다. 인기가 많은 직종은 장시간 동안 일할 수 있거나 두 개 이상의 상근직을 가질 수 있었던 용접, 청소 그리고 여타 공사 관련 직업이었다. 용접공들에 대한 수요가 높았을 때 기업들은 잠재적 노동자들에게 기술을 배우도록 돈을 지불했다(Han, 1999b: 12).
 
많은 한국인들은 때로 용접을 위해 함께 이동하기도 했다. Newcastle에 있는 캐나다 정제 회사는 한 때 70명의 한인 용접공들을 고용하였고, B.H.P. [Broken Hill Proprietary, Ltd.]는 180명의 한인 용접공들을 고용하였다. 나는 하루에 12시간을 일했고 매주 일요일에는 쉬었다. (심무호, Paraguay에서 온 사면 이주자)
 
1970년대 한인들이 입국하기 전에 이탈리아인과 독일인과 같은 비 영국인 이민자들은 보통 ‘더럽고, 어렵고, 굴욕적인’ 직업을 가졌다. 1970년대 이후, 그러한 일자리는 한인들에게 ‘이양’ 되었으며, 이는 에스닉 집단과 그들이 도착한 시기에 따른 노동 시장에서의 분업을 반영한다.
 
대부분의 사면 이주자들과 동두천에서 온 사람들은 호주에 도착했을 당시 40대였다. 그들은 청소나 기타 육체 노동을 통해 임금노동자로서의 일을 시작하여 작은 자본을 축적하였고 이후에는 청소사업 계약을 따내어 소 자본가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더 많은 돈을 저축하자 더 많은 청소 계약을 따내기 위해 재투자하였다. 한인 청소부들이 청소업계에서 명성을 얻게 되면서 이들은 청소 ‘권리’를 획득했다. 새롭게 획득한 권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리를 잡아가면서 새롭게 이주해온 한인들이나 청소 산업에 진출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팔 준비가 되었다.
 
전문직의 자격을 충족하지 않거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 보상받을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이 장시간 근무하여 고소득을 버는 것으로 이런 방식으로 한인들은 호주인 평균 소득의 두 배 이상을 벌기도 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용접공이나 목수 등과 같은 노동자 혹은 반숙련 노동자로 남아있었으나 또 다른 상당수는 영세 사업을 운영하는 것으로 바꾸기도 하였는데 이는 상당한 성취인 것으로 여겨졌다(이경숙, 2008: 188; Collins and Shin, 2012).
 
계층 이동 사다리를 오르기 위한 다른 특별한 방법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면 이주자들이 수년간의 노동 경험과 수년간 습득해온 기술을 지닌 채 호주에 입국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는데(Han, 2000b), 이는 숙련 이주민 그리고 비즈니스 이주민과는 구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호주에서 일하는 초기 기간 동안 그들은 전반적으로 호주 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또 어느 정도 호주에서 사업 활동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호주에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약간의 자금을 지니고 있었는데, 당시는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 비해 경제적으로 유리한 시기였다.
 
몇몇의 사면 이주자들은 한국 식료품 가게, 식당, 관광 대행사 그리고 건설 회사를 시작하였다. 건설 회사들은 종종 한인이 아닌 이들이 소유한 기업의 하청업체였다.
 
1970년대 말까지 시드니에는 한인이 소유한 사업이 20개 미만이었다. 그러나 1986년에는 등록된 한인 소유 사업이 250개로 증가했다(백시현, 1990: 25). 시드니에 있는 한인 소유 사업들은 주로 한인들을 자신들의 주요 고객으로 다루어왔다.
 
Inglis와 Wu(1992: 207)는 취업 중인 이주민들의 대다수는 고용주라기보다는 피고용인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그러나 매우 예외적으로 한인 이주민 중 상당히 높은 비율이 자영업자이다. Inglis와 Wu(1992: 207)에 따르면, ‘그들 중 몇몇은 의심할 여지없이 비즈니스 이주 프로그램의 초기에 이주해왔으나, 많은 다른 이들은 명백히 기타 진입 범주 하에 입국하였고, 그리고 이후에 자영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Inglis와 Wu(1992: 207)의 이러한 연구결과는 비즈니스 이민으로 호주에 온 한인이 전체적으로 약 40명에 불과했던 1986년 인구 총 조사에 기초한 것이다. 따라서 ‘기타 입국 범주’들은 사면 이주민에 해당할 것이다(Kim, 1995: 55).
 
작은 사업을 위한 종자돈을 마련하기 위해 빈번히 사용했던 방식은 계(契)였다. 자조집단 회원들은 계주를 중심으로 모이고 회원들은 매달 일정 액수의 금액을 납부한다. 집단의 회원 한 명이 다른 회원들로부터 모든 돈을 받고 이후에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몫을 돌려받을 때까지 이 돈을 갚는다.
 
계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뭉치’돈을 모으고자 할 때 사용되는 전통적인 방식이며 계의 성공은 구성원들 간의 완전한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사면 이주자들과 같이 삶의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은 기꺼이 서로를 신뢰하고자 하고 계에 참여하고자 했었을 것이다.
 
시드니의 한국인 공동체는 1980년대 중반부터 숙련 이주민의 이주, 가족 재회, 그리고 비즈니스 이주자들의 등장과 함께 그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호주를 방문하는 한국인 관광객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
 
1970년부터 현재까지 가장 인기가 많은 사업은 식당, 식료품, 건강 식품 가게, 관광 대행사, 기념품점, 그리고 미용실이다(Han, 1999b: 14). 이경숙(2008: 180)은 한국 경제의 성장에 따른 한국인 여행자의 증가로 인해 이러한 사업 종목이 주로 증가하였다고 밝혔다. 한국 경제가 침체할 때는 그러한 사업들이 부진했다.
 
시드니에 있는 한인 공동체 내에서는 잘 알려진 사업가들의 성공담이 존재한다. 청소부로 시작한 사면 이주자 중의 하나는 한 때 600명의 사람들이 고용된 청소 업체를 운영했다. 또 다른 사면 이주자는 용접공으로 시작하였으나 이후에 꽤 큰 철강 회사를 운영하였다.
 
또한 정병률 씨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이란에서 트레일러 운전수로 일을 하기 위해 이주하였다. 그는 1976년에 호주에 입국하였고 이민부처로부터 호주를 떠나라는 통지를 받았으나 1980년 사면 이후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용접 기술을 배워 장시간을 일하면서 7년 동안 주당 1,000달러를 벌었다.
 
그는 시드니에서 2에이커의 땅을 샀고 용접 작업을 계속하면서 다양한 한국산 야채를 심었다. 2년 만에 그는 16에이커의 땅을 매입하였고 더 다양한 한국 채소들을 기르기 위해 땅을 개발하였다.
 
그의 농장은 1992년에 32에이커에 달하였는데, NSW주에서 가장 큰 아시안 야채 생산 농장이었다. 그의 소득은 호주달러로 연간 10만 달러를 넘는 수준이었다(김정심, 1992: 435).〠 <계속>


한길수|멜번 모나쉬 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미디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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