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론 II

하나님은 선하시고,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세상에는 악이 존재한다?

주경식/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9/06/26 [11:54]

신정론의 논리적 도식


신정론을 간단히 설명하면 “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지난호에서 우리는 신정론에 대해 모순된 명제들을 가지고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먼저는 성경에서 주장하고 있는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하시다”라는 명제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데도 “이 세상에는 악과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세 가지 명제는 함께 존재하는 것이 모순이라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면 우리 인간에게 악과 고통을 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면 우리에게 오는 악과 고통을 충분히 제거하실 수 있으실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전능하신데 왜 이 세상에는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것일까? 
 
고대로부터 인간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을 보며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져왔다.
 
이것을 쉽게 표현하면,
신은 악을 극복하고 싶어 하는데 신에게 그럴 능력이 없다고 하면 / 신이 약하다는 뜻이 되는데 이것은 신에게 맞지 않는 일이다. / 신이 능력은 있는데 악을 극복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 신이 악의적이라는 뜻인데 이것도 신과는 거리가 멀다. / 신이 악을 극복하길 원하지도 않고 할 능력도 없다고 하면 / 그렇다면 신은 약할 뿐더러 악의적이기까지 하다. 따라서 신이 아니다./ 신의 성품에 맞게 그가 악을 극복하고 싶어하며(선하며), 실제 할 수도 있다고 하면(전능하다면)/                                 

그렇다면 도대체 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왜 신은 그것을 없애지 않는 것일까?
 
이것이 신정론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전능하심, 이것은 성경의 증거이고 믿는 바이다.  그런데 실제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이 존재하기 때문에 딜레마가 발생하는 것이다.
 

악과 고통의 실제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계는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악을 목도했고, 2004년 동남아시아를 강타한 쓰나미를 통해 무려 23만 명이 죽었다. 이러한 거대한 자연재해와 악을 제쳐 놓고도 우리는 매일 질병, 사고, 지진, 화재, 홍수 등 주위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악과 고통을 마주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적 돌봄과 선하심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게 된다.
 
심지어 지난 2014년에 벌어진 세월호 사건은 우리 국민을 분노하게 했다. 멀쩡히 눈을 뜬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라앉는 세월호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리며 오열하는 부모들의 심정을 무엇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식을 먼저 보낸 그들에게 어떤 말이 위로가 될까? 그래서 한 신학자는 대한민국은 2014년 세월호를 분기점으로 세월호 이전의 신학과 세월호 이후의 신학을 나누어야 한다고까지 하고 있다. 칼 바르트가 고백했듯이, 신앙으로도 우리가 처한 상황을 희미하게 밖에 볼 수 없다면 모든 신학은 하나의 파편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다.
 
이처럼 설명되지 않은 악과 고통이 우리 주위에 실제로 존재한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선하시다”라는 명제와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라는 명제이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악을 제거하기를 원하셔도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는 하지만 전능하신 분은 아니다.
 
또는 하나님은 악을 제거할 능력(즉 전능)은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악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선하시지는 않는다.
 

이처럼 악과 고통이 세상에 분명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은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는 명제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헤아려 본 슬픔

 
인간이 물리적인 악을 마주하게 되거나 원치 않는 극도의 슬픔과 고통에 처하게 될 때 한없는 무기력과 절망에 휩싸인다.
 
20세기 세계 최고의 지성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C. S. 루이스도 사랑하는 여인을 먼저 보낸 후 한없는 절망가운데 절규했다. 『헤아려 본 슬픔』 은 그의 마음을 절절히 묘사하고 있다.
 
루이스는 중년을 넘긴 나이였지만 1957년에 미국에서 온 여류시인이자 이혼녀였던 조이 데이비드먼과 결혼을 한다. 결혼할 당시 조이 데이비드먼이 암에 걸린 사실을 알았지만 그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결혼한 것이다. 그리고 꿈만 같은 결혼생활이 이어졌지만 4년 후 조이 데이비드먼이 죽게 된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토록 사랑하던 조이가 막상 떠나자 루이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이렇게 절규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 다른 모든 도움이 헛되고 절박해 하나님께 다가가면 무엇을 얻는가? 면전에서 쾅하고 닫히는 문, 안에서 빗장을 지르고 또 지르는 소리, 그러고 나서 또 침묵, 돌아서는게 더 낫다. 오래 기다릴수록 침묵만 뼈저리게 느낄 뿐, 창문에는 불빛 한 점 없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가 “지난 40년 동안 세계 복음주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저술가”로 평가하는 루이스도 깊은 상실감 뒤에 오는 고통의 문제에 당면하자 마치 하나님을 떠난 듯한 절규들을 내놓는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에게 완벽한 행복을 주고 싶어 할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그분 소원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피조물들은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절망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시지 않은 존재이거나 능력이 없으신 존재이거나 선하시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존재일 것이다.”
 
기독교 최고의 변증가요 20세기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루이스도 인간이 당하는 처절한 고통의 문제에 다다르자 회의에 빠졌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루이스는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났는가? <헤아려본 슬픔>을 끝까지 읽어보면 루이스는 이런 고통의 심연(abyss)과 신앙의 회의를 통해 나름대로 신정론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 이른다. 루이스는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성숙한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네 인생에 등장하는 원치 않는 고통과 물리적인 악을 경험하게 되면 모두 루이스처럼 행동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신정론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들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신정론에 대한 다양한 답변들을 들어보자.〠 (계속)


주경식|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호주비전국제 대학 Director, 전 시드니신학대학, 웨슬리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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