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은혜의 증인들

한·호 선교 130주년 기념 특집

글|주경식,사진|권순형 | 입력 : 2019/08/27 [14:11]

 

▲ 1960년 1월 구의두 목사와 결혼하고 22세의 새색씨로 남편 따라 한국 선교사로 헌신한 엘리슨 크로프트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잊혀진 선교사

 

엘리슨 크로프트(81. 1938. 11.1~ Mrs. Alison Croft, 한국명 이애선) 선교사는 시드니 웨스트 페난트힐(West Pennant Hill)에 있는 리타이어먼트 빌리지에 살고 있었다.
 
본지 발행인과 기자는 지난 8월 8일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가 살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들 가운데 생존해 있는 분들의 웬만한 이름은 알고 있는데 엘리슨 크로프트 선교사의 이름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엘리슨 선교사는 크리스찬리뷰사가 접수받아 경남성시화운동본부에서 초청한 금년 10월 한국(경남)에서 개최되는 한·호 선교 130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신청을 하게 되어서 알게 된 것이다.
 
1889년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를 필두로 그동안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한 호주장로교(1977년 이후 호주연합교단) 선교사들은 126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많은 분들은 이미 하나님 품으로 먼저 떠났고, 현재 생존하고 있는 호주 선교사들은 30여 명으로 파악된다.
 
이번 한·호 선교 130 주년 기념대회에는 선교사와 가족(후손)과 한인교계 인사 등 26명이 참석할 예정인데엘리슨 선교사도 이번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신청을 한 것이다. 그녀는 무려 55년 만에 다시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은혜의 증인들

 

▲ 엘리슨 선교사의 자택에서 본지 주경식 편집국장과 인터뷰가 진행됐다.     ©크리스찬리뷰


세월이 무색하리만큼 그녀는 곱게 늙었다. 단정한 옷차림에 약간은 수줍음을 타는 몸동작이었지만 조용 조용한 목소리는 위엄이 있어 보였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 그에 대해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 2009년에 존 브라운(변조은)목사가 펴낸 호주장로교 선교사 열전 책을 뒤져 보았다. 그 책 이름은 ‘은혜의 증인들’이다.
 
‘은혜의 증인들’은 존 브라운 목사가 한·호 선교 120주년을 기념하여 지난 2009년에 한국에서 사역한 호주장로교와 호주연합교단 선교사들의 간단한 프로필과 그들의 한국 선교 역사를 기록한 책 제목이다.
 
이 책에서 존 브라운 목사는 “여기서 그들의 삶과 섬김이 스케치 되는 126명의 선교사들은 한국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공헌하였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엘리슨 선교사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오히려 엘리슨 선교사는 호주에 있는 한인공동체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내온 분이라 할 수 있다. 한인 공동체에서는 잊고 지내던 분인데 어떻게 한·호 선교 130주년 기념대회 소식을 듣게 되었을까?
 
궁금했던 기자가 이번에 한국(경남)에서 개최되는 한호 선교 130주년 기념대회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물었다.  
 
“한국에서 선교사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연락을 주고 받아요. 우리가 정기적으로 모이지는 않지만 서로 연락들을 하고 지내죠. 그런데 이번에 바바라 마틴(Dr. Barbara Martin, 민보은)선교사와 베리 콜빈(Mr. Barry Colvin)선교사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바바라 마틴선교사는 직접 이메일을 보내주셨어요.
 
이번에 한국(경남)에서 한·호 선교 130주년 기념대회를 하는데 참석하지 않겠느냐고요? 그래서 이번에 한번 가보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한국이 많이 바뀌었겠죠?”

 

▲ 구의두, 엘리슨 선교사가 거주했던 대나무 담장으로 둘러싸인 마산에있는 사택 뒷마당 모습. ©Alison Croft   


엘리슨은 한국 마산에 1960년에 도착했다. 기자가 태어나기도 전이다. 그녀의 말로는 6.25전쟁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을 때여서 한국에 전쟁 피난민들이 무척이나 많았다고 한다. 그가 사역했던 마산 지역에도 북에서 피난온 많은 피난민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동네가 많았다.
 
엘리슨이 한국에 대한 기억은 한국에 도착했던 1960년대의 한국의 풍경이다. 그것도 마산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마산 지역 외에 다른 곳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한국에 왔던 초기 선교사들은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따랐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한국에 왔던 미국, 캐나다, 호주의 초기 선교사들이 국가별, 교파별로 한국의 지역을 나누어서 집중적으로 선교했던 정책이다.

 

▲ 엘리슨 선교사의 소녀 같은 해맑은 웃음이 81세 나이를 무색케 한다.     © 크리스찬리뷰


그래서 선교정책에 의해 초기의 호주 선교사들은 주로 부산을 중심으로 경남지역에서 선교사역을 하게 되었다. 엘리슨 선교사 역시 그의 남편과 함께 마산지역에서 사역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제임스 앤드류 크로프트 (1933. 7.3-2019. 4.30, Rev. James Andrew Croft, 한국명 구의두) 목사이다. 제임스 크로프트 선교사(이하 구의두)는 그녀보다 2년 앞선 1958년 3월에 한국(부산)에 도착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총각 선교사로 그의 나이 25세 때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것이다.

 
남편 구의두 선교사

 
그 당시에는 호주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가 없을 때였다. 그래서 호주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오기 위해선 한 달 정도 걸리는 배를 타고 왔다. 무엇이 25세의 청년을 한국 땅으로 오게 한 것일까?
 
구의두는 총명한 청년이었다. 뉴질랜드(오클랜드)에서 태어난 그는 대사관 직원(국제무역투자대표)인 아버지를 따라 일본과 캐나다에 가서 살다가 고등학교 때 시드니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드니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했다.
 
구의두는 대학생활 내내 SCM(Student Christian Movement) 활동을 열심히 했다. 그는 시드니대학 SCM 모임의 회장도 하고 선교에 열정이 많았다. 그를 눈여겨 보던 호주장로교선교회(Australian Presbyterian Board of Mission) 상임총무 빅터 쿰스(Victor Coombes) 목사는 제임스가 목사가 되기를 기대했다.

 

▲ 구의두 목사가 마산에서 사역할 당시 어린이들의 손을 잡고 산책하고 있다.                       ©Alison Croft    


그래서 선교에 헌신적이었던 제임스에게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라고 권면했고 구의두는 그의 권면을 받아들였다.
 
지금은 뉴 사우스 웨일즈주의 장로교 신학대학이 1983년부터 따로 버우드에 독립해 있지만(현재Christ College로 바뀜) 그 당시에는 시드니 대학 안에 있는 세인트 앤드류 신학대학(St Andrew College)에서 장로교 신학교육을 담당했었다.
 
구의두는 1957년 세인트 앤드류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호주 장로교 선교회(Australian Presbyterian Board of Mission)의 파송을 받아 1958년 3월에 한국 선교사로 가게 된 것이다. 
 
한국에 도착한 제임스는 언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한국어로 설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젊은이들을 좋아한 그는 부산에 있는 동안 한국 기독학생총연맹(KSCF, Korean Student Christian Federation)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지원했다. 뿐만 아니라, 1959년 7월 한국 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Korean Student Christian Committee)가 조직될 때 많은 공헌을 했다.
 
이 조직은 그 당시 한국 대학들 안에 있는 YMCA 대학부, YWCA 대학부, KSCM 등이 함께 연계한 조직이었다. 젊은이들을 좋아하여 특히 젊은이 사역을 열심히 감당했던 구의두는 2년 동안 한국에서의 사역을 뒤로 하고 1959년 12월 10일에 시드니로 돌아갔다. 그것은 호주를 떠나기 전에 약혼했던 엘리슨과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한국으로 허니문을

 

▲ 구의두, 엘리슨 선교사가 결혼식에서 케익을 커팅하고 있다.(1960. 1.9)                        ©Alison Croft    


엘리슨은 그녀가 새내기 대학시절에 상급생인 구의두를 시드니대학 학생기독운동(SCM)활동에서 만나게 된다. 둘 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들은 기독학생운동을 하면서 가까워졌고 미래를 약속한 것이다.
 
구의두가 한국 선교사로 떠나기 전 그들은 약혼을 했다. 엘리슨이 시드니대학 2학년 때이다. 엘리슨은 구의두가 한국 선교사로 헌신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의 돈독한 신앙과 구의두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결혼을 위해 시드니로 돌아온 제임스는 4주 후인 1960년 1월 9일, 엘리슨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결혼하자마자 선교사로 헌신하여 3주 후에 신혼 부부 선교사는 시드니를 떠나 1960년 2월에 한국에 도착했다.

 

▲ 결혼식에서 ‘도령모’를 쓴 구의두 선교사와 머리 장신구를 쓴 엘리스 선교사 부부. ©Alison Croft    

 

▲ 구의두 목사가 결혼식 당시 썼던 ‘도령모’이며, 엘리슨 선교사는 이를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엘리슨은 1938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녀가 1960년에 한국에 도착했으니 그녀의 나이가 고작 22세 밖에 안되었을 때였다. 갓 결혼한 22살의 새색시가 겁도 없이 한국 선교사로 헌신하여 한국 땅을 밟은 것이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오래 되지 않은 때라 한국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힘든 때였다. 전쟁의 폐허가 곳곳에 남아 있었고 판자집들이 즐비할 때였다.
 
그들이 활동했던 마산지역의 교회는 특히 북에서 피난 나온 피난민들로 구성된 교회가 많았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떤 곳에는 화장실이 없는 거예요. 그때에는 화장실이 없는 곳이 많았어요. 먹을 것도 부족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거리에 즐비했었죠”
 
행복한 신혼생활을 즐겨야 할 신혼부부가 선택한 곳은 바로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 있고 가난과 기아로 허덕이는 한국 땅이었던 것이다. 구의두와 결혼할 때 결혼 후 다시 한국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도 결혼을 한 것인지, 그리고 결혼 후 같이 한국으로 가는 것이 무섭지 않았냐고 기자가 물었다. 
 
“물론 알았죠, 약혼할 때에도 구의두가 한국 선교사로 가는 것을 알고 약혼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졸업하게 되니까 결혼해서 한국으로 같이 가려고 시드니로 잠시 온 것이죠. 당연히 저는 선교사로 한국으로 가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한국어 교사 홍 씨에게 한국말을 배우고 있는 구의두 목사.(1959) ©Alison Croft    


얼마나 기대되고 흥분되었는지 몰라요.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떤 곳일까? 하나님이 어떤 사역을 감당하게 하실까? 한국에서 어떤 일이 펼쳐질까? 오히려 기대감이 많았습니다.”
 
염려해서 물어보는 기자가 무색해질 정도로 그녀는 격앙된 소리로 “I was excited!” 를 연발했다. 한국으로 가는 것이 두렵기보다는 흥분되고 기대되었다는 그녀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신앙과 개척정신에 고개가 숙여졌다.
 
결혼 후 물론 그들은 울릉공 근처인 노우라(Nowra)로 잠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하지만 그들의 진정한 허니문 여행지는 한국이었다.

 
마산에 정착하다

 
구의두, 엘리슨 부부는 결혼 후 바로 한국으로 가기 위해 분주했다. 여느 다른 신혼부부처럼 집을 얻고 살림살이 장만하는데 보낼 시간이 없었다. 오히려 한국으로 떠날 채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 구의두 목사는 1960년, 20세 중반에 마산지역 순회 선교사로 사역을 시작했으며, 그의 주된 관심은 한국의 젊은이들을 키우는 일이었다. 사진은 구의두 선교사의 선교 현장들이다. ©Alison Croft    


결혼 3주 후 그렇게 한국으로 떠날 채비를 마친 그들은 1960년 1월 말에 시드니에서 배를 타고 홍콩을 거쳐 1960년 2월 부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부산 선교사 숙소에서 몇 주 기거한 후 그들이 본격적으로 사역할 마산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마산에 도착한 구의두는 바로 마산지역 순회 선교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목회자가 부족했던 한국교회에 20대 중반의 선교사인 구의두는 마산지역의 여러 교회들을 순방하며 상처받은 자들을 위로하고 목회했다.
 
심지어 1962년에는 마산노회가 그에게 4개의 교회를 돌보도록 4교회의 당회장을 맡도록 임명하기도 했다. 그는 마산지역의 선교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노회 안에 정기 성경학교 과정을 개설하고 그곳에서 가르치며 사람들을 키워나갔다.
 
그는 또한 한국전쟁 기간 중에 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로 구성된 마산 남산교회를 돌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구의두는 그들을 돕기 위해 호주에서 성금을 모아 그 돈을 가지고 남산교회의 가난한 노인들을 위한 숙소를 건축하는데 지원했다.
 
그리고 후에는 마산대학에서 세계 종교역사를 강의할 기회도 있었다. 남편 제임스가 바쁘게 사역을 하는 동안 엘리슨은 한편으론 그를 도우면서 다른 한편으론 교회 안의 여자들을 만나 위로했다. 그러나 곧 바로 임신을 하게 되어 그녀의 사역의 폭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첫째 아들 피터가 1960년 10월, 일신기독병원에서 태어났다. 어린 아기를 돌보느라 주된 사역을 할 수는 없었지만 엘리슨은 마산의 교회들을 남편과 함께 방문할 때마다 교회에서 만나는 여성들을 돕고 신앙으로 세워갔다.
 
그리고 1962년 1월에 둘째 아들 데이비드 역시 일신기독병원에서 태어났다. 두 아이의 엄마로 아이들을 돌보느라 엘리슨은 일손이 많이 부족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남편을 돕고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 주된 사역이 되었다.

 

▲ 구의두 목사가 애견을, 엘리슨 선교사가 증손자를 안고 있다. ©Alison Croft    


한편 마산에서 사역을 하면서 구의두 선교사는 그를 도와 사역했던 강재구를 호주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구의두의 도움으로 강재구는 1964년 3월 뉴사우스웨일즈주 장로교 교육국 직원으로 입국해 호주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처럼 구의두의 주된 관심은 한국의 젊은이들이었다. 순회 선교사의 사역보다도 젊은이 중심의 학생 사역을 하기를 원했다. 그때 마침 미국 선교부에서 제임스에게 대전신학교에서 강의해줄 것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호주 선교부와 미국 선교부 간의 선교사 지원금 문제로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선교부 간의 의견이 맞지 않는 바람에 그가 원했던 사역의 방향은 열리지 않았다. 아쉽게도 1964년 4월 구의두, 엘리슨 선교사 부부는 시드니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짧은 사역을 뒤로하고

 
1964년 구의두, 엘리슨 선교사 부부는 한국 선교지에서 얻은 아들 피터와 데이비드를 품에 안고 시드니로 돌아왔다. 6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의 한국 선교였지만 그들 부부에게는 의미있고 인생의 모멘텀(Momentum)같은 시간이었다.
 
엘리슨은 한국에서 돌아온 후 그녀의 전공을 바꾸었다.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그녀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그 이유를 물었다. 
 
“한국 전쟁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여서 그런지 그때 한국은 너무 어려웠던 시기였어요. 마을마다 전쟁의 상흔이 많이 남아 있었어요. 가난한 사람들도 많고 아픈 사람들도 많고 정신지체자들도 그렇게 많았어요.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기억은 정신지체 딸을 둔 엄마들을 여럿 보았어요. 그들이 함께 수용시설에 있는데 누구도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그들을 실제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아서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제가 그들을 바라보면서 진정한 선교는 사람을 돕는거구나 하고 많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실제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으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의 가난과 빈곤에 대한 인상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그녀는 시드니로 돌아온 후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 의사 아버지를 둔 덕택에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녀는 가난과 빈곤이 무엇인지 몰랐다.

 

▲ 엘리슨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그러나 처절했던 시절의 한국 상황을 경험하고 난 후 그녀는 복음 못지않게 사람들의 안정된 삶을 위해 사회가 시스템적으로 약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사회복지 공부를 마친 후 그는 싱글 홈레스(Single Homeless), 앵글리 케어(Anglicare Australia)등 사회 복지 기관에서 25년 넘게 극빈자와 난민(refugee)들을 돕는 사역들을 해왔다.
 
남편 구의두 선교사는 한국에서 돌아온 후 화학자와 교육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가 졸업한 기숙사 학교인 세인트 앤드류 신학대학에서 학생지도와 교목을 담당했다. 그러다가 그의 대학 전공인 화학을 계속 공부한 후 화학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그가 은퇴할 때까지 그의 모교인 스카츠 칼리지(Scots College)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엘리슨에 의하면, 1964년 시드니로 돌아온 후 몇 년 후 남편 구의두는 다시 한국으로 가고 싶어 선교사 비자를 신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 정권이 바뀐 이후(이승만 정권에서 박정희 정권) 비자가 거절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한국에 가는 마음을 접었다고 했다.
 
“그때 비자가 거절되지 않았으면 저희는 아마도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했을 겁니다. 남편은 한국을 참 사랑했어요. 한국말도 얼마나 유창하게 잘 했는지 모릅니다.”
 
구의두 목사는 안타깝게 금년 4월 30일, 86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오랫동안 알츠 하이머를 앓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한국말은 잊지 않고 있었다는 엘리슨의 말에 마음이 짠해졌다.

 

▲ 지난 날의 한국 선교를 회고하는 엘리슨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에필로그

 
구의두 목사 부부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은퇴해서 블루마운틴에 살고 있었다. 교회도 블루마운틴에 있는 호주연합교회에 출석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고 구의두 목사의 알츠하이머가 증세가 심해져서 2년 전에 아들들이 살고 있는 웨스트 페넌트 힐스로 이사를 왔다.
 
이사 후 이들 부부는 근처의 교회를 찾았다. 그런데 쏜리(Thornleigh) 연합교회의 목회자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그 교회로 정했다는 것이다.

 

“남편은 참 한국을 사랑했어요. 이곳에서 어쩌다가 한국 사람을 만나면 한국말로 대화하고 한국 소식을 묻고 자신이 예전에 한국에서 사역했던 이야기들을 해주곤 했어요. 그래서 이곳으로 이사와서 교회를 정할 때도 한국 목회자가 목회하는 교회로 정한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박웅걸 목사(Rev. Hugh Park)에게 오늘 인터뷰한다고 얘기했습니다.”
 
권 발행인과 기자는 엘리슨이 박웅걸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으면서 깜짝 놀랐다.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What a small world!”
 
기자는 반가운 마음에 참 세상이 좁다고 연발 내뱉으며, 박 목사는 지난 2010년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개관식 때 호주 선교사와 가족(후손)들과 동반하여 통역자로 수고했을 뿐 아니라 기자와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했다.
 
흥분한 기자의 말에 함박 웃음으로 화답하는 엘리슨의 모습을 보며 그녀와 뭔가 통한다는 느낌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남편의 장례식을 박웅걸 목사가 다 치뤄주었습니다. 그이의 가는 길을 한국인 목사가 해줘서 저희에게는 얼마나 뜻 깊은지 모릅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곳 호주에 호주인을 대상으로 목회하는 한국인 목사가 있는 것도 어쩌면 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 때문이리라.
 
60여 년전 황량한 한국 땅에 사랑과 복음을 들고 찾아온 그들의 손길이 없었다면 한국교회의 부흥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과 사랑을 받아 자란 것이다. 이곳 시드니만 하더라도 3백 개가 넘는 한인교회들이있다.
 
이 모두 ‘은혜의 증인들’이 뿌린 씨앗들이 열매로 나타난 결실인 것이다. 이제 다음 달이면 한·호 선교 130주년이다. 한국교회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우리 모두 가슴 깊이 곱씹어 보았으면 좋겠다.〠


글/주경식|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호주비전국제 대학 Director
사진/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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