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난‘위대한 복음의 씨앗’

‘기념대회’ 등 다채로운 행사 풍성

글|김명동,사진|권순형 | 입력 : 2019/09/26 [16:37]
▲ 호주장로교회의 첫 한국 선교사로 한국 선교의 문을 연 조셉 헨리 데이비스 목사와 누이 메리 데이비스 선교사(왼쪽).     © 크리스찬리뷰


금년은 한·호 선교 13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130년 전인 1889년 10월 호주장로교회의 조셉 헨리 데이비스 목사(Rev. Joseph Henry Davies)가 누이 메리 데이비스(Miss Mary Davies)와 함께 한국에 선교사로 입국함으로써 호주장로교회의 첫 한국 선교사가 되었고 한국 선교의 문을 연 것이다.
 
데이비스는 한때 인도 선교사로 일한 경험이 있고 유망한 사립학교의 교장이었다. 복음에 대한 열정과 예리한 지성을 겸한 특출한 선교사였으나 그가 한국으로 향할 당시 여권의 직업란에는 ‘학자’(man of letters)로 기록할 만큼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한국에 간지 겨우 6개월 후인 1890년 4월 5일, 부활절을 하루 앞둔 토요일 부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로 하여금 한국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 주었고, 그의 이루지 못한 꿈을 계승하려는 의지들이 모여 한국선교운동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그의 희생적인 헌신과 죽음의 결과로 호주의 한국선교가 유지, 계승, 발전되어 126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 옛날 한국 땅에 가서 한 알의 밀알로 썩어져 간 초창기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을 통해 한국 땅에 전해졌던 복음의 순수한 열정과 생명력을 다시금 되새겨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선교사의 길에 후회란 없다

 

▲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는 바울의 선교 원리에 따라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으로 20일간의 답사 여행을 떠났었다. 그의 일기에 한글로 적힌 지도가 인상적이다.(1890년 2월 10일)     © 크리스찬리뷰

 

“선교사는 그가 택한 사역의 길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 법이다. 선교사의 길이야말로 내가 어릴 적부터 꿈꾸어 왔던 희망이며, 나의 청년기의 목표이며,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 가운데서 주를 위해 일하는 것은 나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일기에 적힌 내용이다.
 
데이비스는 1856년 8월 22일 뉴질랜드의 왕가라이에서 9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고, 그가 4살 때인 1860년 부모를 따라 호주 멜본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부모는 영국 쉬레스버그 출신으로 흔히 형제교회라 불리는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에 속한 매우 경건하고도 열심 있는 신앙인이었다.

 

▲ 데이비스 선교사와 그의 모친     © 크리스찬리뷰


특히 그의 부모는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이 철저했다. 그의 12남매 중(장남은 어린 나이에 죽었음) 다섯 사람, 곧 조셉 자신과 누나 메리가 한국 선교사로, 동생 타보(Tabor)와 사라(Sarah)가 인도 선교사로 자원한 것이라든지 남동생 존(John)이 장로교회 목사가 된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의 아버지는 학식과 교양을 겸비한 변호사였으나 불행하게도 데이비스가 12살 때 세상을 떠났고, 그의 어머니 또한 병약한 상태였으므로 그는 이때부터 대가족을 이끌어가야만 했다. 그는 아버지 친구들의 도움으로 법률서기로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하였으나 선교사의 꿈을 꾸게 되면서 법률서기직을 그만두었다.
 
이후 당시 멜본의 대표적인 남자학교였던 투락 칼리지(Toorak College)의 교사로 일하면서 멜본대학교 문과에 등록하였다. 그러던 중 1876년 곧 그의 나이 20세 때 호주 CBS(Church Missionary Society) 소속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이것은 선교사로서의 그의 생애의 시작이었다.
 
그의 이와 같은 결단에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도 있었지만, 직접적으로는 그의 누이동생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그의 여동생 사라는 아직 10대 소녀에 지나지 않았으나 1875년 남부 인도에 CMS 선교사로 파송됨으로써 인도에 파송된 호주 역사상 최초의 여선교사가 되었다.
 
데이비스는 그의 여동생으로부터 인도에 선교사가 매우 부족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인도로 향했다. 인도에서의 그의 사역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복음에 대한 그의 가슴은 뜨거웠으나 선교사로 일할 만큼의 충분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 첫째 이유였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는 그의 건강이었다.
 
건강의 악화로 더 이상 선교지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자 1878년 5월 21일 멜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인도에서 보낸 21개월의 사역은 앞으로의 그의 생애를 위한 중요한 교훈을 남겨주었다.

 
한국 선교사로

 

▲ 1881년 3월 멜번대학을 졸업할 때 최우수상(고전어 부분)을 받고 졸업 당시 찍은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멜본으로 돌아온 데이비스는 다시 멜본대학에 복학하였다. 특히 그는 고전어에 매우 조예가 깊어 헬라어와 라틴어를 공부하였고, 2학년 과정을 마칠 때는 고전어 부분 특별상을 받았다. 1881년 3월 멜본대학을 졸업할 때는 고전어 부분 최우수상과 자연과학부분 특별상을 받았다.
 
그의 학적 능력을 인정하여 멜본대학교에서 그를 강사로 초빙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고, 선교지로 갈 수 있는 적절한 때가 오기까지 교육 사업을 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1881년 4월 코필드 그래머스쿨(Caulfield Grammar School. 한국의 중등학교)을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이때로부터 1888년까지 그가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코필드학교는 명문 사립학교로 발전하였고 자신의 개인적인 명성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단 쟁기를 잡은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교육 사업은 선교를 위한 일종의 준비사역이었지 그의 생애 목표는 아니었다. 그의 일기 속에는 이 점이 선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 코필드 그래머 스쿨의 초대 교사들과 데이비스 교장(앞줄 가운데)     © 크리스찬리뷰


어느덧 어린 동생들이 장성하여 자립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1886년에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더 이상 가정의 일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는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지난 7년간 키워 온 학교를 성공회 목사였던 바넷(Rev. E. J. Barnett)에게 인계하고 1888년 4월 다시 인도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그때 중국 푸쵸(福丹)에서 선교하던 CMS 소속 선교사였던 울프(Archdeacon John R. Wolfe)가 한국의 부산을 방문한 이후 한국 선교의 필요성과 긴박성을 호소했는데 그의 편지가 성메리교회의 메카트니(H. B. Nacartney) 목사가 발행하는 ‘국내. 국외 선교’에 발표되었고 이 호소는 데이비스로 하여금 한국으로 향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국 선교에 대한 울프의 호소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데이비스는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안수 받은 목사가 아니며 아직 한국에는 CMS 선교부가 설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이 일은 데이비스의 생애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즉, 그는 한국 선교사가 되기 위하여 성공회와 관계를 단절하고 빅토리아 장로교회로 이적하게 된 것이다. 데이비스가 장로교 목사로 한국으로 가게 된 배경에는 멜본의 투락장로교회의 젊은 목사 이윙(Rev. John F. Ewing)의 역할이 컸다.
 
스코틀랜드에서 얼마 전 투락교회로 부름 받은 그는 17명의 지도자급 총대원들의 서명을 받아 데이비스를 한국 선교사로 갈 수 있도록 인준해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던 것이다. 이 청원서는 신중히 검토되었고 멜본 남노회는 데이비스가 6개월간의 신학교육을 마치고 시험에 합격하면 목사로 안수하기로 가결했다.
 
당시 에딘버러대학교 내의 뉴칼리지(New College)는 스코틀랜드 자유(장로)교회(Free Church of Scotland)의 신학교육 기관으로 우수한 학교였으며 오직 신학공부에만 전념하였다. 데이비스 자신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때야말로 오직 공부 한 가지 일에만 전념했던 유일한 날들이었고 가장 복된 날들이었다고 했다.
 
그는 1889년 5월 13일 멜본으로 돌아왔고 멜본 남노회가 실시한 목사고시에 합격하였다. 데이비스는 1889년 8월 5일 빅토리아주 장로교단 설립 50주년 기념 총회인 스카츠교회(Scots Church)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당시 명문 사립학교의 설립자로서 교장직을 버리고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선교사로 가는 일은 일종의 이변에 속하는 일이었으므로 멜본의 대표적인 일간신문이었던 ‘데일리 그라프’(Daily Telegraph)는 그의 목사 안수식을 이례적으로 보도하였다.
 
빅토리아 장로교단의 목사가 된 데이비스는 1년 전 창립된 청년연합회인 YMFU(Young Men's Sabbath Morning Fellowship Union)의 재정 지원 하에 파송 받았고,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는 멜본교회 기독교연합회(Suburban Christian Union)의 지원 하에 함께 한국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130년 전 한국은 극동의 고집스런 나라였다. 외국과의 모든 활동이 단절된 은둔국이었다.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래 쇄국정책이 파기되기는 했으나 아직도 오랜 전통의 굴레 속에서 반외세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선교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한국 생활 6개월

 

한국 선교사로 부름받은 데이비스는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1889년 8월 16일 금요일 저녁 멜본 시내 YMCA 홀에서 거행된 환송회를 끝으로 8월 21일 데이비스 남매는 멜본을 떠났다. 이것은 한국으로 향한 첫 여행이자 그의 생애에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여행이 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시드니에서 며칠을 보낸 후 8월 28일 증기선 ‘치난’(S. S. Tsinan)호로 시드니를 떠났고 이로부터 40여 일간에 걸친 길고도 지루한 항해를 끝내고 10월 2일 이른 아침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여기에서 일시 본국에 귀국했다가 다시 임지인 서울로 돌아가는 당시 육영공원 교사였던 벙커(D.A. Buncker)씨 내외를 만나 한국의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벙커 씨의 안내로 부산을 둘러본 후 다시 출항하여 4일 오전 11시 제물포(인천)에 도착했다.

 

▲ 데이비스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하여 한글과 한문을 공부하던 공책     © 크리스찬리뷰


데이비스 남매는 다음 날 아침 8시경 말을 타고 서울로 향했다. 도착한 첫 날 의사 헤론(Dr. J. W. Heron), 스크랜튼 부인(Mrs. Scranton), 그리고 데이비스보다 5주 앞서 입국한 맥길(Dr. Mcgill)의사 등의 선교사들을 만날 수 있어서 평안한 마음으로 서울에서 첫 밤을 지낼 수 있었다. 이때부터 서울에서 보낸 5개월간 데이비스는 한국어 공부에 최선을 다했다.
 
그에게 있어서 언어의 습득은 가장 중요한 과제이자 가장 긴박한 요구였다. 12월 26일자로 쓴 그의 편지를 보면 조선말 공부에 바빠 심지어는 가족들에게 편지 쓸 시간조차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는 원래 언어에 재질이 있었으므로 그의 한국어 실력은 급속도로 진전되었고 5개월이 지난 때에는 일상의 대화는 물론 가벼운 설교까지 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 데이비스는 언더우드 등과 함께 지내며 사역했는데 언더우드는 데이비스에게 서울에서 일해 주기를 여러 번 간청했다. 데이비스는 고전어에 상당한 실력이 있었으므로 아펜젤러 등과 함께 성경 번역하는 일에 전념해 주기를 간청했으나 바울의 선교원리를 따라 선교사가 없는 지역으로 가서 일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그는 한때 군산지방으로 가서 일할 것을 신중히 고려하기도 했다. 만일 그가 군산으로 갔었다면 한국 교회사의 판도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교지역을 결정하기 전에 답사여행을 하기로 하고 일단 부산으로 가기로 작정했다. 그것은 부산이 한국의 관문일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항구도시이며 일본과 인접해 있어 보다 더 효과적인 선교가 가능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 도착한 그 다음 해인 1890년 3월 14일, 누이를 서울에 남겨둔 채 어학 선생과 하인, 그리고 매서할 문서와 약간의 약품 등을 준비하여 서울을 떠났다.

 

▲ 교통수단이 없었던 189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에 호주 선교사들은 조랑말을 타고 전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 크리스찬리뷰


이제 겨울도 거의 지났다고 보았던 그의 판단은 안타까운 죽음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3월이라고 하지만 추위는 계속되었고 그해 따라 잦은 비가 겹쳐 먼 길을 도보로 여행하는 일은 안심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서울을 떠난 그는 수원 등 경기도 지방과 공주 등 충청도 지방을 거쳐 경상도에 이르는 약 20일간의 답사여행을 마치고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매우 절망적인 상태였다. 이 기간 동안 매서 전도활동은 기대 이상으로 성공적이었으나 무리한 도보여행으로 인해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곧 폐렴까지 마지막 5일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 호주 여선교사들이 처음 구입해 살던 초가집(부산, 1891-1893)     © 크리스찬리뷰
▲ 초량마을(부산 영주동) 뒷산에 있던 데이비스 선교사 무덤(1895년 촬영)     © 크리스찬리뷰

 

▲ 데이비스가 죽은지 20년 만인 1910년 호주에서 제수(J. Davies 왼쪽)와 조카 마가렛이 그가 잠들고 있는 부산을 찾아왔다.     © 크리스찬리뷰


데이비스의 죽음이 남긴 것

 
데이비스가 부산에 도착한 날은 4월 4일 금요일이었다. 이날도 억수같이 비가 내렸다. 당시 부산에 있던 유일한 서구인이었던 캐나다 출신 선교사 게일(Dr. J. S. Gale)은 데이비스가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달려가 자기 집으로 옮겼다.
 
데이비스는 곧 회복될 것이라고 게일을 위로했으나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다. 게일과 데이비스 이 두 사람은 함께 기도했다. 
 
“건강하든지 병들든지 살든지 죽든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소서”라고.
 
일본인 의사가 와서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불안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인 4월 5일 오후 1시경 데이비스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한국에 온 지 6개월이었다. 우리 인간적으로 볼 때는 너무도 짧은 생애였으나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는 가장 적절한 때였던 것이다.
 
게일은 데이비스 시신을 부산항이 굽어보이는 부산진 뒷산에 안장하였으니 후일 그의 장지는 호주장로교의 한국 선교부를 위한 약속의 땅이 된 셈이다.
 
데이비스 죽음과 함께 그의 누이 메리도 폐렴으로 얼마간 고생하였으나 헤론 의사의 치료로 회복한 다음 한국을 떠나 그해 7월 18일 멜본으로 돌아옴으로써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데이비스의 죽음은 호주교회로 하여금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를 파송한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에서는 데이비스가 시작한 ‘조선 선교’의 사역을 이어나가겠다는 젊은이들로 줄을 이었다. 1891년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는 제임스 맥케이(Rev. J. H. Mackay) 목사 부부와 여선교사인 멘지스 양(Miss B. Menzies), 페리 양(Miss J. Perry) 그리고 퍼셋 양(Miss Fawcett) 등 제2진 선교사 5명을 한국으로 파송했다.
 
이때 여성 선교사가 많았던 이유는 데이비스 선교사의 순교 이후 호주교회 내에서 여전도회 연합회가 결성돼 선교에 적극 나섰고, 당시 한국은 유교문화 때문에 남성이 여성에게 직접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상황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때로부터 호주교회는 일제가 선교사를 강제 추방한 1941년 전까지 선교사 78명(해방 전후 126명)을 파송하였다.

 
미리 가보는 기념행사

 

▲ 창작 뮤지컬 ‘The Light' 포스터     © 크리스찬리뷰


경남성시화운동본부(본부장 오승균 목사)는 한·호선교 130주년을 맞아 다양하고 의미있는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크리스찬리뷰사는 경남성시화와 함께 호주 선교사와 가족들을 한국으로 초청하여 한·호 선교 130주년 기념대회를 가질 예정이다. 10월 1일부터 9일까지 진행되는 이 행사에는 호주에서 26명이 참석한다.
 
이번 행사는 ‘선교의 날 감사예배’와 함께 호주선교사들이 사역했던 부산·경남지방의 학교, 병원, 기관, 교회 등 여러 선교 사역지를 방문한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되돌아보며, 숫자적인 의미를 넘어 한국교회의 미래를 내다보고 소명과 비전을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
 
△창작 뮤지컬 공연 : 10월 4일 오후 7시 30분, 창신대학교 콘서트홀에서 공연한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삶을 다룬 창작 뮤지컬 ‘The Light'는 현대음악과 국악이 결합된 아주 신명나는 우리의 가락이 교차되는 퓨전음악으로 공연 속에서 음악, 의상, 무대, 영상을 통해 우리 고유의 해학과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창신고등학교가 2009년 9월 9일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 크리스찬리뷰


이번 공연이 진행될 창신대학교는 호주 선교사들이 세운 창신학교에서 유래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1908년 순종 황제의 인가로 개교한 창신학교는 당시 호주 선교사였던 아담슨 목사와 마산 최초의 교회 지도자들이 기독교선교와 신교육, 구국운동을 위해 설립했다. 90년에는 창신고등학교, 91년에 창신대학이 세워지면서 그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창신학교는 호주 선교사가 세운 6개 학교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학교다.
 
△선교의 날 감사예배 : 10월 6일 오후 3시에 경남선교 120주년기념관 광장에서 ‘선교의 날 감사예배’를 개최한다. 이어 매혜란, 매혜영 선교사 묘비 제막식이 거행된다.

 

▲ 경남성시화운동본부는 창원공원묘원에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을 건립하고 개관에 앞서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2010년 10월 2일)     © 크리스찬리뷰


10월 5일부터 8일에는 호주 선교사들이 사역했던 부산·경남지역 여러 사역지들을 방문한다.
 
△진주교회 : 호주 선교부는 1905년 휴 커를(Hugh Currel 한국명 거열휴) 선교사를 진주에 파견했다. 커를 선교사는 1902년 한국으로 파송된 호주 최초의 의료선교사로 부산에서 진료하다가 당시 서양식 병원이 전혀 없던 진주근무를 자원했다.

 

▲ 1930년대 진주 시내 모습.(진주시 봉수동 ‘역사 유적 안내표지판’촬영)     © 크리스찬리뷰
▲ 호주 최초의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된 거열휴 선교사는 진주교회와 배돈병원을 세우고 선교 지평을 넓혀갔다.     © 크리스찬리뷰


진주에 온 커를은 진주교회와 배돈병원을 시작했는데 진주교회는 진주 및 경남 서부의 첫 교회였다. 그의 부인은 남녀학교를 시작했는데 후일 이 학교들은 시원여학교와 광림학교로 발전했다.
 
1928년 발행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 따르면 ‘선교사 거열휴와 조사 박성애가 전도하야 본군 북문 내에, 초가삼간을 예배처소로 정하고 회집 예배하였다’라고 기록됐다.
 
커를은 1906년 11월 첫 예배당을 준공했고 1908년 하동읍교회. 1909년 동금리교회(현 삼천포교회)와 북변교회(현 남해읍교회) 등으로 선교 지평을 넓혔다. 사회 신분에 대한 계급의식이 강하고, 경남 지방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곳이기도 했던 진주 지방에 복음은 조심스럽게 퍼졌다.
 
지금 진주교회가 있는 진주시 봉래동 37번지 부근은 커를 선교사의 주도로 호주선교부가 조성한 진주스테이션이 자리하고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인근에 배돈병원과 광림학교, 시원학교가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옛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문창교회 : 1901년 백도명의 전도로 김마리아, 김인모 등 여자 성도 7명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 경남 마산지역의 기독교 뿌리가 됐다. 문창교회는 여성들이 창립을 주도한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문창교회는 교육과 문화, 계몽운동에 선봉이 됐으며 애국운동의 거점이 됐다. 교회는 유치원을 설립해 어린이 조기 교육에 힘썼고, 야학교를 만들어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 배돈병원 한호 의료진과 진료 장면.     © 크리스찬리뷰
▲ 제비산 정상에서 바라본 문창교회와 마산 시내 전경 (2000. 3 촬영)     © 크리스찬리뷰


신식교육기관인 독서숙은 창신중·고와 창신대학으로 발전했다. 여자 교육기관인 의신여학교를 설립해 여성 교육에도 앞장섰다. 초대 목사는 호주 선교사인 손안로(아담슨)였다.

 

▲ 충무교회 마당에는 ‘충무교회 설립 및 호주 선교 기념탑’이 2008년에 세워져 있으며, 지난 2010년 10월, 호주 선교사와 가족들이 방문했다.     © 크리스찬리뷰


△충무교회 : 통영은 호주 선교사 아담슨의 선교 구역이었다. 그에 의해 1905년 충무교회가 설립됐다. 1910년 파송된 왓슨(Robert D. Waston) 선교사는 통영 지방을 순회하던 중 이 지역에 교육기관이 전혀 없음을 알고 스테이션 구내에서 교육 사업을 전개했다.
 
특히 왓슨 부인은 이 지방 여성교육 기관인 진명야학교, 진명강습소 설립에 크게 기여했다.
 
충무교회 마당에는 2008년 건립된 ‘충무교회 설립 및 호주 선교 100주년 기념탑’이 있어 교회의 내력을 짐작할 수 있다.
 
통영 스테이션 터는 교회 북쪽으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얼마 전까지 산비탈 빈 땅 곳곳에 선교사 사택의 주춧돌과 계단 등의 건물 잔해가 있었으나 최근 기념사업회가 호주 선교사의 집을 복원키로 결정하고 추진 중에 있다.

 

▲ 호주장로교회 통영 선교지부와 진명학교가 있던 집터를 찾은 호주 선교사와 가족들 (2010년 10월).     ©크리스찬리뷰


△일신여학교 : 호주 여선교사 멘지스는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1893년 부산 최초의 고아원 ‘미오라’를 지었다. 한국 이남 최초 여학교인 일신여학교의 전신이다. 멘지스는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부인과 어머니들이 반드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1895년 소학교를 설립하고 고아 3명을 가르쳤다. 
 
학생 수가 점점 늘어 1909년 좌천동에 서양식 교사를 신축했다. 현존하는 부산 최고의 근대 건축물이다.

 

▲ 2003년 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된 일신여학교 건물이 원형을 복구, 2010년 4월 5일 개관식을 갖고 기념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일신여학교는 부산지역 3.1운동의 출발점이 됐던 곳이다. 1919년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부산지역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2010년 4월 5일 원형복원한 뒤 부산광역시 역사기념관으로 다시 새롭게 태어났다. 여기에는 125여 년 전 신교육을 받던 여학생들의 모습과 항일운동 및 당시 기독교자료 등이 전시되고 있다.
 
△창대교회 : 1909년 영국 구라선교회가 세운 상애원이 한센인 복음화를 위해 상애교회를 창립했고, 1911년 호주 선교사 맥켄지 목사가 상애원을 인수했다.
 
부산 용호동에 자리 잡았던 상애교회는 지역개발로 인해 정관 신도시로 이전, 2004년 4월 창대교회로 교회명을 개명하고 입당예배를 드렸다.

 

▲ 지역개발 전의 용호농장    
▲ 용호동에 있던 상애교회 입구(오른쪽, 2000. 3)    

 

▲ 정관 신도시로 이전한 창대교회 전경. 2004 4월 입당예배를 드렸다.     © 크리스찬리뷰


특히 1925년에는 사랑의 원자탄으로 알려진 손양원 목사가 전도사로 부임, 한센인을 돌보는 사역에 동참하기도 했다. 상애원 사역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바로 전쟁이었다. 상애원은 1941년 미일전쟁으로 폐쇄되는 위기에 처했다.
 
당시 일본의 속국이었던 우리나라는 힘이 없었다. 일본은 상애원에 이전 명령을 내렸고, 상애원은 결국 강제철거를 당하게 된다.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갈 곳 없는 성도들은 총독부의 강제 이송명령에 따라 소록도로 이송됐다. 이후 교회가 다시 재건되기까지는 4년의 시간이 흘렀다. 1945년 예장통합 경남노회의 지원으로 부산 용호동에 박애원교회로 재건되었다가 상애원교회로 복명하게 된 것은 1946년이었다.
 
교회는 또다시 이전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용호농장 개발이었다. 새롭게 닥친 교회의 어려움 앞에 성도들은 한마음으로 기도했고, 결국 현재 교회가 위치한 정관 신도시에 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창대교회는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낙원대 실버타운도 함께 지었다.

 

▲ 부산진교회 최초 교인 가족. 심인택 부부(앞줄), 아들 심상현 부부, 아들 심취명. 심취명은 부산진교회 초대장로, 제2대 담임목사를 지냈다.(1894, 부산)     © 크리스찬리뷰


△부산진교회 : 부산진교회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소속 베어드(W M Baird 한국명 배위량)가 세웠다. 그는 1890년 부산진에 한옥 한 채를 짓고, 그해 11월 부인과 함께 당시 공관에서 일하던 미국인 가족들과 자기 집에서 일하던 한국인 몇 사람과 예배드린 것이 부산진교회의 시작이다.
 
이듬해 정식으로 교회를 창립하고, 1900년 10월 호주 선교사 엥겔(Rev. Dr Gelson Angel 한국명 왕길지) 목사가 초대 당회장으로 부임하면서 교회의 모습을 갖췄다.
 
1904년 5월 27일 부산 최초의 세례자였던 심상현의 동생 심취명이 장로로 장립됐다. 부산진교회의 당회가 조직된 날이다. 2007년에는 당회가 구성된 이래 1천 회 당회를 맞아 감사예배를 드렸다.
 
교회 마당에는 호주 선교사 멘지스와 무어 선교사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 부산진교회 주일예배 장면     © 크리스찬리뷰


△일신기독병원 : 일신부인병원(일신기독병원 전신)이 설립된 것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9월이다. 당시 한국으로 파송된 두 자매, 헬렌 맥켄지(Helen Mackenzie)와 동생 케더린(Catherine) 맥켄지에 의해서였다. 매혜란으로 불린 언니는 산부인과 의사였고 매혜영으로 불린 동생은 간호사였다.
 
‘한국 나환자의 아버지’로 불렸던 제임스 노블 맥켄지(Rev. J. N. Mackenzie)의 장녀, 차녀인 두 남매가 가난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여성을 위해 시작한 의료시설이 지금의 일산기독병원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 노블 맥켄지 선교사는 한국에서 사는 동안 네 아이를 얻었는데, 첫 아이가 진주에서 출생한 헬렌, 곧 매혜란이었다. 1915년에는 둘째 아이 케더린, 곧 매혜영이 태어났다. 막내 짐은 두 살 때 디프테리아로 사망했고, 현재 부산진교회 묘지에 묻혀있다.
 
이 병원은 67년이 지난 지금 부산에서 유수한 종합병원으로 발전하였는데, 설립자인 매혜란, 매혜영을 비롯한 제2대 의료진으로 한국에 파송되어 일신병원에서 30년(1964-1995)이 넘는 기간 동안 일한 바바라 마틴(Babara Martin) 등 많은 선교사들의 수고와 봉사가 어우러져 오늘의 병원이 된 것이다.

 

▲ 6.25전쟁 중 매혜란, 매혜영 자매에 의해 1952년 9월 개원한 일신부인병원. 일신부인병원 개원 당시의 모습과 호주 선교사 의료진들. 그리고 부산에 위치한 일신기독병원의 현재 모습들.     © 크리스찬리뷰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창원시 진동면 창원공원묘원 중앙공원에 나란히 위치해 있다.
 
2010년 10월 2일 개관한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에는 부산과 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호주선교사 126명의 사진과 유품들이 보관돼 있다. 기념관 바로 옆에는 호주 선교사 8명의 순직기념비와 묘원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경남이 배출한 4명의 순교자 기념비도 순직 호주 선교사들과 나란히 함께 자리하고 있다.

 

▲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전경.     © 크리스찬리뷰
▲ 호주 선교사 묘원에 세워져 있는 호주 선교사 순직 기념비문.     © 크리스찬리뷰
▲ 호주 선교사 묘원을 찾아 헌화한 호주 선교사와 가족들.(2010. 10.2)     © 크리스찬리뷰


호주 선교사 묘원 조성은 당시 창신대학 강병도 총장의 관심과 열정으로 시작됐다. 그는 부산 경남지역을 위해 헌신하다 순직한 선교사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데 대한 미안함이 많았다.
 
묘원이 조성되기 10년 전부터 호주를 수차례 방문하면서 자료를 수집했고 호주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추적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2005년 10월 창신대학 내에 ‘호주선교사 순직 기념비’를 세우고 제막예배를 드려 이름까지 묻혀버린 선교사들의 존재를 다시 세상에 알렸다. 기념동산 부지는 창신대에서 희사했고 기념비 9개를 제작했다.
 
여기엔 호주 한인교회도 도왔다. 크리스찬리뷰사가 한인교회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했고, 9개 교회에서 각각 1천500달러씩 보내왔다.

 
‘경남 근대 사진전’성료

 

▲ 본지는 한호 선교 130주년을 맞아 ‘경남근대사진전’을 시드니새순장로교회 로비에서 개최하고 수익금은 한호 선교 130주년 기념대회 참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호주 선교사와 가족들의 여행 경비로 사용할 것이다. 이번 행사에는 한인 교계 인사 포함, 26명이 참석한다.     © 크리스찬리뷰


크리스찬리뷰사는 한·호 선교 130주년을 맞아 시드니새순장로교회(담임목사 송선강) 로비에서 ‘경남근대 사진전’을 성황리에 개최했다. 
 

9월 15일부터 22일까지 전시된 경남 근대 사진전은 1890년대 후반부터 1950년 후반까지 호주 선교사들이 촬영한 사진들을 발굴, 복원한 것이다.
 
2013년 9월에는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경남 근대 민속’사진전을 가진바 있으며, 2014년에는 시드니한국문화원에서 ‘KOREA: THEN AND NOW'라는 제목으로 사진전을 4개월 동안 개최했다.
 
선교 역사란 하나님께서 택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성령께서 어떻게 일하셨는가를 보여 주는 기록이라고 할 때, 호주 선교사들을 통해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한·호 선교 130주년을 맞으며 우리들에게 유익한 출발이 될 것으로 보인다.


글/김명동 |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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