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人間論), 인간이란 무엇인가? II
 
주경식/크리스찬리뷰

인간을 정의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

 

지난 호에 우리는 인간을 정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인간만큼 신묘막측하며, 미스터리한 존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극찬한 그리스 철학자이자 극작가인 소포클래스는 “세상에는 이상한 것이 참으로 많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이상한 것은 인간이다”라고 했다. 
 
그의 고전 작품 ‘오이디푸스왕’과 ‘안티고네’를 한번 읽어보기를 권장한다. 인간만큼 정의하기가 어려운 존재는 없을 것이다. 사실 신학은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신’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이관데

 
시편 8:4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사람이 무엇이관데’라는 고백을 통해 인간론을 규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인은 우주의 넓은 궁창 가운데 찬연하게 펼쳐진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에 압도당해 “오 하나님! 우주의 놀라움에 비해 우리의 이 누추함과 보잘것없음을 볼 때, 우리가 누구길래 당신은 우리를 이렇게 보살펴 주시나이까?”라고 고백한다.
 
시인은 이 고백을 통해 창조주와 관련한 인간의 왜소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규명하고 있다. 시인은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과의 연관 속에서 발견한 인간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다른 시편 기자가 고백하듯이, 인간은 “신묘막측”(fearfully and wonderfully)하게 창조되었다(시 139:13-16). 사실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Institute) 제1권 1장 1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말은 인간에 대한 지식은 인간만을 연구해서 발견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칼빈의 지적대로 우리는 충격 가운데 우리의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는 인간의 참 인간성을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가만히 살펴보아 자신이 얼마나 참혹한 죄인인가를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성전에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스랍들만 보고서도 자신의 죄성을 발견하고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로다.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거하며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 (사6:1-7)” 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베드로 또한 그물이 찢어지는 만선의 기쁨을 뒤로한 채 예수가 하나님이신 것을 발견하고는 ‘주여! 나를 떠 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1-10)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충격 속에 발견하는 순간 인간 존재의 실존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인간론의 출발은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의 참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
 
칼빈은 이처럼 두 가지 지식, 인간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실타래처럼 내적으로 얽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서 지식은 ‘계시’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기독교 강요 1장 2절에서 “인간이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우러러보고 난 다음 낮추어 자기 자신을 살펴보고 묵상해 보기 전까지는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해 명쾌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칼빈의 깨달음대로라면 인간에 대한 지식은 결코 신적인 지식과 따로 떨어져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해, 신학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성경에 나타난 창조의 구조 안에서 인간의 진정한 자기지식은 결코 자율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말은 인간에 대한 지식은 타율적이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인간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또 역으로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진지하고 심각한 자기성찰과 자기발견이 신적인 지식(성경과 성령의 비췸)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없는 인간 이해나 인간과 관계없는 하나님 이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온전한 인간 이해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기 위해서는

 
역사 이래 많은 학자들이 인간에 대한 바른 정의를 내리기 위해 다방면에 걸친 노력들이 있었지만 시원한 해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27세의 칼빈이 발견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그의 선언은 놀랍기만 하다.
 
그는 계속해서 이 둘은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가? 질문하며 성경을 통해 논증한다. 먼저 그는 “모든 지혜는 하나님에 관한 부분과 우리 자신에 관한 부분으로 되어 있고 사람은 하나님을 힘입어 기동하며 산다”(행17:28)고 설명한다.

이어서 그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의식하도록 자극을 받아 적어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소나마 얻게 되지만, 긍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무지, 공허, 빈곤, 허약, 이보다 더한 것인 타락과 부패를 자각함으로 지혜의 참된 광채와 건전한 덕, 차고 넘치는 선, 의의 순결함이 오직 주 안에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논증한다. 그러므로 칼빈의 지적대로 인간 자신에 대한 진정한 지식은 결코 자율적이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의 기독교 강요 제 1권 1장 2절에서는 이것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인간이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우러러보고 다시 낮추어 스스로를 살펴보고 묵상해 보기 전까지는 결코 자신에 대해 명쾌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기독교강요 1장 2절)
 
이처럼 인간에 대한 자기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인 서구신학은 인간에 대한 바른 정의를 내리기 위해 성경과 기독교 신학이 제공하는 분명한 명제를 전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바로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래라는 전제이고 둘째는 인간은 자기 위치를 부인하고 타락한 죄인이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 존재라는 접근이다.〠<계속>


주경식|본지 편집국장, 호주비전국제 대학 Director. 전 시드니신학대학, 웨슬리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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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2/23 [12:58]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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