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섬김의 10년, 감사의 힘이죠

헤브론병원 간호부장 임승주 선교사

글|김명동,사진|권순형 | 입력 : 2020/02/24 [15:56]
▲ 헤브론병원의 간호 인력과 병동을 책임지고 있는 간호부장 임승주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자신이 생각해도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임상(병동)은 하지 않겠다는 그였다. 30여 년 동안 한국의 대형병원에서 간호부의 모든 계단을 거치며 정신없이 일했었기에 그는 병동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훤히 알고 있다. 병동은 한마디로 북새통을 이루는 전쟁터.
 
그래서일까? 그는 “하나님, 임상은 이제 싫습니다”며 피해왔지만 어느새 헤브론병원 간호부장으로 간호 인력과 병동을 또 책임지고 있다. 그러니 인간의 앞일은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는 그 그물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요 택함을 받은 자의 막중한 은혜이다.
 
임승주 선교사(63)가 헤브론병원에 온 것은 2012년이다.
 
"처음에는 약국에서 일했어요. 약사가 한 분 계셨는데 한국에 가셨거든요. 주말이면 팀을 이뤄 지방을 찾아가 의료봉사도 했고요. 그런데 지방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이 일어나더라고요. 그럴 때 필요한 책이 있었어요. '의사가 없는 곳에서'라는 책인데 17개 국어로 번역이 됐어요. 의사가 없는 곳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쓴 책인데 영어 원본을 그렇게 구하려고 애썼지만 구할 수 없었어요.

 

▲ 회진 중 입원 환자를 보살피는 임승주 간호부장     © 크리스찬리뷰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 이곳에서 외과전문의로 레지던트 교육을 시키며 섬기셨던 아산병원 최상석 선생님이 PDF 파일을 구해 주셨어요. 너무 고마워서 '부탁할 것 있으면 한 가지 들어드릴게요.' 했더니 대뜸 헤브론병원 간호부를 맡아줬으면 좋겠다는 거에요. 임상은 안 한다고 그렇게 피하고 피했는데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겠더라고요.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어요."
 
임 선교사는 슬며시 웃었다. 그는 간호부 책임을 제안 받고 잠시 고민을 했었지만 임상이 자신이 헌신해야 할 자리였다고 고백했다. 의료 인력양성이 무엇보다도 시급했기 때문이다.

 

▲ 헤브론병원 간호사들과 함께 한 간호부장 임승주 선교사(우측)     © 크리스찬리뷰


“처음에 임상은 못한다고 하니까 그러면 병원에 들어가 간호사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옆에서 관찰만 해달라는 거에요. 보니까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의학용어도 정리가 안 돼 있고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어요. 게다가 의학용어 책이 있는데 영어로만 되어있어 제대로 활용을 할 수가 없어서 마음이 아팠어요.”

 

▲ 환한 미소로 입원 환자를 보살피는 임승주 간호부장     © 크리스찬리뷰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임 선교사는 우선 영어로 된 의학용어 책을 사전을 일일이 찾아가며 이 나라말로 번역했다.
 
“크메르어로 번역해서 아이들에게 기초부터 가르쳤어요. 크메르어가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모르는 것은 아이들에게 배우면서요. 크메르어를 일 년 가까이 배웠는데도 힘들어요. 전문용어라 더욱 힘들고 특별히 글씨 쓰기가 굉장히 힘들더라고요.”
 
임 선교사는 현지인 간호사들을  크리스찬 리더로 키우겠다는 새로운 꿈도 꾸기 시작했다.
 
“병동은 전쟁터입니다. 늘 환자의 생사가 오가는 곳이거든요. 사건은 어디에서 언제나 터집니다. 실수를 용납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실력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늘 하나님께 엎드려 인도하심을 기도해야 합니다.

 

▲ 오전 진료를 마친 후 아티탄(기도회) 모임에서 임승주 간호부장(중간)이 백학, 석금자 선교사와 찬양하고 있다. 백학, 석금자 선교사 부부는 지난 2월 15일 일 년의 임기를 마쳤다.     © 크리스찬리뷰


아이들에게 얘기했어요.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우리 매일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고 말씀 읽고 하루를 시작하자. 물론 직원예배가 있어요. 그런데 병동은 예배에 참석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부터 가르치면서 매일 큐티를 하고 있어요. 제가 인도를 하는데 사정이 있는 경우는 수간호사가 합니다.
 
사실 이대병원에서 근무했을 때도 그랬거든요. 함께 모여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말씀 읽고 울면서 기도했어요. 힘든 일도 많고 어려운 수술도 많은데 지혜를 구해야죠. ‘하나님 오늘도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지 않으면 우린 못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셔서 간호사들이 모두 교회에 나가게 됐고 사고도 없었어요. 그 하나님이 헤브론병원도 지켜주실 것을 믿습니다. 헤브론병원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임 선교사도 큐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의 삶을 통해 그는 모든 일의 중심에 말씀이 놓여져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말씀읽기와 기도를 통해 이화여자대학병원이 여기까지 왔듯이 헤브론병원의 사역도 큐티와 기도를 통해 계속적으로 전개돼 나가야함을 그는 믿고 있었다.

 

▲ 회진을 돌며 입원 환자들의 건강을 체크하고 있는 최수상 선교사(왼쪽)     © 크리스찬리뷰


임 선교사는 김우정 원장을 처음으로 만난 그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2009년 이곳으로 정탐을 왔었어요. 당시에는 허허벌판에 큰 웅덩이가 있었고 그 옆으로 진료소가 있었는데 진료소래야 조그만 창고였어요. 그런데요, 보니까 환자들이 줄을 지어 바닥에 앉아있는데 3백여 명 쯤 됐어요. 지금은 대기실이 있잖아요. 그땐 맨땅바닥이에요."
 
임 선교사는 구름처럼 몰려드는 환자들을 보고 경악과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쟁터 야전병원을 방불케 했다. 그러면서 모든 걸 감내하고 땀을 흘리며 환자들을 열심히 진료하는 김우정 원장을 보고 감탄하며 존경스러웠다고 말했다.
 
“이 힘든 일을 어떻게 하세요?”
“이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요?”
“예, 이 병원을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원장님,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꼭 승리하십시오.”
“고맙습니다. 다음에 오면 헤브론병원에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원장님, 저는 임상으로는 안 옵니다.”

 

무엇이 임승주 선교사를 열악한 땅, 불편한 환경으로 불러들였을까?
 
“선교사가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대병원에서 해마다 의료봉사를 해외로 나가는데 동참을 했기 때문에 그냥 의료봉사를 해야겠다는 소명의식은 줄곧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자궁경부암이 35살에 왔어요. 내가 살 수 있을까?”
 
임 선교사는 갑자기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자녀들이 있는데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는 무릎관절을 꺾었다.
 
“살려주세요. 아이들 스무 살 될 때까지, 10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임 선교사는 수술 후 신기하리만치 몸 상태가 호전됐고, 덤으로 얻은 인생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몸이 좋아지니까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살았어요. 그런데 참 신기하죠. 정확하게 10년이 되는 해 45살 때 IMF가 왔어요. 아이들이 대학교 2학년, 4학년이라 돈이 한창 들어가고, 남편은 사업이 안 되는 절박한 상황에서 병원 명퇴까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병원에 가니까 실제로 일이 벌어진 겁니다. 3년 치 월급을 일시불로 줄 테니 명퇴하라는 거에요. 그때 10년 전에 하나님께 약속한 것 ‘45살까지 살게 해주시면 하나님께 저를 드리겠습니다’ 그게 생각이 나는 거에요. 바로 사표를 내고 영어를 배우면서 의료봉사의 길을 준비했죠.”
 
임 선교사는 진지한 표정에다 눈빛을 빛내며 말을 이어갔다.
 
“GMS 안에 ‘의료네트워크’라는 부서가 있어요. 이 부서에서 사역을 시작했죠. 질병으로 아픈 선교사님들을 제가 인터넷이나 전화로 병원을 연결해주는 일인데 선교사님들은 잘 모르니까요. 3년 동안 섬긴 후 본격적으로 남편과 함께 선교사 훈련을 받았어요. 남편은 사업을 정리했죠.”
 
하지만 남편이 원인불명 심정지로 세상을 떠난다. 평소 아팠지만 감기 몸살 정도로 알고 병이 깊어지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임 선교사는 무릎을 꿇고 거실 바닥에 엎드렸다. 숱한 역경을 함께 극복하며 살아왔는데 이런 슬픔을 주냐며 구약성서에 나오는 욥처럼 항변했다.
 
임 선교사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멈출 순 없었다.
 
“선교지로 중국이나 네팔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남편이 캄보디아 이야기를 해줬어요. 남편이 건축사업을 했기 때문에 사업을 하면서 베트남을 자주 갔다 왔다 했거든요. 그러면서 베트남은 복음의 문이 닫혀있고 캄보디아는 열려 있더라는 말을 했어요.
 
캄보디아로 마음을 굳힌 후 혈압 약을 타러 이대병원에 갔어요. 제가 가족력으로 혈압이 높아요. 거기에서 아는 산부인과 의사를 만났는데 캄보디아로 간다니까 건강검진을 받아보라는 거에요. 이것저것 검사를 해주셨는데 자궁내막암이 또 발견된 겁니다. 암인 줄 알면서 캄보디아로 정탐훈련을 갔던 거죠. 그게 바로 2009년인데 돌아와서 바로 수술을 했습니다.”
 
임 선교사가 캄보디아에 온 것은 2010년 3월. 처음에는 언어와 문화를 배우며 선교의 접촉점을 찾았다. 
 
“이화여대에서 2009년 설립한 ‘이화스렁학교’가 있어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있는데 프놈펜에서 50km 떨어진 시골입니다. 그 학교 보건소에서 일하면서 지방으로 다니면서 사역도 했지요. 그러다가 헤브론병원으로 온 겁니다.”
 
자녀들의 반대는 없었을까?
 
“암으로 두 차례나 아팠기 때문인지 아이들은 ‘엄마하고 싶은 대로 해’ ‘결혼하고 싶으면 해’하고 편하게 대해줘요. 그런데 친정 어머니는 ‘남편도 없는데 왜 고생이냐’ ‘언제 끝나냐?’‘내가 죽기 전에 오냐?’ 지금 87세인데 전화하기가 무서워요.”
 
이처럼 섬기는 삶의 바탕에는 부모님과 종교가 있다고 했다. 특히 어머니에 대해서는 인터뷰 중 뭉클한 감정이 솟을 만큼 애틋함이 배어 있었다.

 

▲ 환한 웃음이 가득한 임승주 간호부장이 입원 환자 가족에게 수술 경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임 선교사의 가정은 4대째 신앙이 흐르고 있다. 이 신앙은 세월 속에 스며들어 믿음의 가정으로 견고히 만들어 주고 있다. 임 선교사는 어린 시절 자다가 눈을 뜨면 어머니가 꿇어 앉아 기도하고 계셨다. 그리고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임 선교사는 그 사랑의 눈물을 평생 잊지 못한다.
 
“어머니는 내 등록금은 못 주더라도 십일조는 딱 떼어놓으셨던 분이셨어요.”
 
임 선교사는 “어머니는 사범대를 가서 좋은 크리스찬 교사가 되기를 원했다”며 “넉넉지 않은 형편에 아버지 혼자 뒷바라지하기 버거웠다”고 회상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폐렴으로 약하고 무척 아프셨어요. 아버지는 공무원이셨는데 저는 아버지가 싸주시는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어요. 엄마가 너무 아프니까 속상하더라고요. 이때 간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죠. 간호사가 되어 헌신하는게 좋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화여대에 합격을 했는데 대학을 다닐 형편이 아닌 거에요. 아버지한테는 학교를 안 다니겠다 해놓고 학교에 가면 스크랜턴 선교사 동상이 있어요. 그 앞에서 펑펑 울면서 기도했어요. 그런데 장학금을 받게 됐고 아르바이트도 친구의 소개로 시작했어요.”
 
임 선교사는 작년 10월 호주를 다녀갔다.
 
“앉아만 있어도 힐링이 되는 나라에요. 이곳에서 15년째 교회 개척 사역을 하고 있는 김성길 목사님 부부와 함께 다녀왔어요. 김 목사님이 빈민촌 아이들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셨는데 이제 그 아이들이 청년이 됐어요.
 
단기선교 왔던 한 청년이 호주에서 살고 있는데 15년 동안 안식년 한 번 못 가고 사역하는 김 목사님을 섬기겠다고 초청을 한 거죠. 그런데 이번에 권 작가님(본지 발행인)이 한·호 선교 130주년 취재차 한국에 계실 때인데도 여행 스케줄을 잘 짜주시고 챙겨주셔서 최상의 대접도 받고 아주 편안하게 여행을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임승주 선교사는 1남(키스트:KIST 선임연구원) 1녀(목사 사모)를 모두 훌륭히 키우고 4명의 손자, 손녀까지 있다. 이런 가족들을 멀리하고 헤브론에서 섬김의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임 선교사는 그동안 쌓아온 간호지식과 노하우, 그리고 복음을 캄보디아 청년들에게 쏟아부을 생각이다.
 
“현지인 간호사들을 실력 있게 키우고,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나라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꿈입니다.”
 
그러니 말이 간호부장이지 현역으로 뛰다시피 해야 한다.〠 <계속>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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