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북한 땅에서도 응답됩니다

북한에서 종신 노역형 받고 극적으로 병보석 석방

글|주경식,사진|권순형 | 입력 : 2020/03/31 [12:31]
▲ 특대형 국가 전복 음모 행위로 종신노역형을 받고 31개월 만에 극적으로 풀려난 임현수 목사가 시드니성시화대회 주강사로 시드니를 방문, 본지와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2020년 시드니성시화대회 주강사로 온 임현수 목사와 강금영 사모를 지난 3월 5일 올림픽공원 노보텔(Novotel)에서 만났다.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고 있는 지금은 이미 COVID-19로 호주 전국에서 모든 스포츠, 엔터테이먼트, 종교집회, 식당과 카페(take away만 제외), 모임 등 그외 시설들이 문을 닫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조금 늦었다면 강사를 모셔 놓고 집회가 취소될 위기를 당할 뻔했다.
 
본지는 지난 3월 호에 이미 임현수 목사 인터뷰 기사가 게재하였는데 그 기사는 2018년 8월 부산에서 열린 세계선교사대회에 참석한 임현수 목사를 고직한 선교사가 인터뷰한 내용을 ‘월드뷰’ 217호(2018년 7월)에서 기사화한 것을 고직한 선교사의 허락을 받고 ‘크리스챤 리뷰>에서 다시 게재한 것이다.
 
그 인터뷰 내용을 이미 읽어 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주로 북한문제와 관련된 시사적 내용이 주였다면 이번 인터뷰는 다른 각도에서 다루었다.

 
친 할머니의 기도를 먹고 자라다

 
“저의 친 할머니가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전도부인이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저는 할머니로부터  목사가 되라는 기도만 받고 자랐어요. 그러다가 제가 17살 때 구원의 확신과 소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High CCC라고 있었는데 그 모임에 참석하면서 제가 구원의 확신과 소명을 받고 CCC 간사로 10년을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도 CCC 간사로 서로 만났습니다. 그때 이 사람은 강 씨니까 강 간사였어요 강 간사 하하~”
 
그는 친 할머니의 강력한 기도를 먹고 자랐다. 할머니의 기도 덕분에 비교적 이른 나이에 목회자의 소명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부터 CCC에서 활동하면서 사모인 강금영 간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큰 무대(?)에서 노는 달란트가 있었던 것 같다. 신앙의 연조가 깊으신 분들은 기억하겠지만 1980년 여의도에서 세계복음화대성회 집회가 열렸다. 기억으로는 백만 명 이상 모였던 세계적인 집회였다. 그때 캐치프레이즈가 ‘나는 찾았네’였다.
 
기자도 중학교 때 교회의 형 누나들과 집회 기간 내내 아현동교회에서 여의도까지 걸어서 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세계복음화대성회는 TV에서도 광고를 했었는데 그 때 20대였던 젊은 시절의 임현수 간사가 탤런트 정영숙씨와 함께 ‘나는 찾았네’ 광고 출현을 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렴풋하게 그의 젊은 시절 모습이 기억나는 것 같다.

 
우연처럼 보였지만 섭리였다

 
그는 1986년 아내와 3살짜리 아들과 함께 유학차 캐나다 토론토로 왔다. 낙스(KNOX College)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토론토에 있는 박재훈 목사가 시무하는 큰빛교회에서 사역을 했다. 박재훈 목사는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어서 돌아오오, 지금까지 지내온 것)와 동요(구슬비, 다람쥐, 어머님 은혜) 등을 작곡한 작곡가이다. 
 
박재훈 목사가 은퇴를 하면서 그는 1990년 토론토 큰빛교회의 제2대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큰빛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어떻게 북한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제가 한국에서 CCC 간사 생활을 할 때 북한을 위한 특별기도회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촛불을 꽂고 기도했던 곳이 함흥이었어요. 함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기도했는데 26년 만에 그게 캐나다에 와서 응답이 된 거에요. 그래서 함흥을 가게 된 거예요.
 
그것도 알고보니까 저는 몰랐는데 호적을 떼어 보니까 우리 할아버지 고향이 함흥이고, 또 캐나다 선교사들이 가장 많이 활동했던 곳이 함흥이고 그래서 저희 교회가 함흥에 주유소를 하나 사가지고 비즈니스 선교를 함흥에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CCC에서 북한을 위한 특별기도회를 할 때 1천여 명이 모여서 기도회를 했는데 바닥에 크게 북한 지도를 그려 놓고 북한 지도의 각 지역에 못을 박아 놓고 그곳에 촛불을 꽂고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그때 뒤에 섰다가 보니 남은 데가 없어서 함흥에 초를 꽂은 거였죠. 그게 26년 만에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우연치고는 신기하게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많은 섭리였다. 1996년 북한은 대홍수를 겪었다. 대홍수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일이 발생하자 북한은 국제사회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였다. 이때 임 목사는 전혀 계획에도 없는 북한을 방문하게 된다.
 
“1996년 북한에서 큰 물피해(대홍수)가 나서 어려우니까 도와달라고 캐나다에 공식 요청이 왔어요. 그런데 제가 아는 목사님이 저와 의논도 없이 제 이름을 넣는 바람에 캐나다 대표단으로 북한에 다섯 명이 갔는데, 그 때 제가 처음 가게 된 거죠.
 
그때 간 곳이 평안북도 구장군 탄광촌이었는데 구장군이 약 40만 명이 사는 큰 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홍수가 나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을 때였어요. 제가 굶어 죽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한 집 건너 하나씩 방문해 보면 사람들이 다 쓰러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디 아프냐? 물어보면 아프지 않고 배가 고파 힘이 없다는 거예요.

 

▲ 하나님께서 기도훈련을 시키지 않으셨다면 남편이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저는 아마 정신병에 걸렸을 겁니다.”라고 당시의 심경을 고백하는 강금영 사모.     © 크리스찬리뷰


탁아소 가면 1/3이, 초등학교 갔더니 1/3이 바짝 말라서 잘 걷지도 못하는 겁니다. 그것을 보고 안 도울 수가 없잖아요, 같은 동족인데. 그래서 제가 가다 보니까 18년 동안 150여 차례 이상 다닌 거에요. 이후에는 저희 교회 성도들하고 항상 같이 갔고요. 많이 갈 때는 저희 교회 성도들 50명 하고 같이 갔고요. 적게 갈 때는 5명 이렇게 18년을 다닌 겁니다.
 
그렇게 고아들과 노인들을 먹이고 그런 고아들을 저희 교회가 입양한 게 1만 350명입니다. 그 고아들을 저희 큰빛교회가 10년 동안 먹이고 입히는 일을 책임지고 다했습니다. 이외에도 저희가 했던 사역이 수십 가지입니다.”
 
26년 전 그것도 젊은 시절 우연히 북한을 위한 특별기도회에 참석해서 우연하게 함흥에 촛불을 꽂고 기도를 한 것이 26년 시간이 흐른 후에 그의 기도는 정말 신기할 정도로 이루어졌다.
 
기자는 18년 동안 150번 북한을 다니는 가운데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없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많지만 한 가지 진짜 꼭 전해줄 에피소드가 있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 북한에 억류됐던 토론토 큰빛교회 임현수 목사가 지난 2015년 12월 16일 평양 최고법원에 출두하고 있는 모습.   

 

소름 돋는 에피소드

기도는 북한에서도 응답받습니다

 

“제가 북한을 다니는 것이 알려지자 할머니 한 분이 토론토에서 찾아 오신 거예요, 이분은 순복음교회 다니는 권사님인데 저에게 자기 딸하고 아들이 북한에 있는데 좀 찾아 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들어 봤더니 2살짜리 5살짜리 애들을 남겨놓고 큰 아들을 데리고 남한에 내려왔다가 38선 장벽이 생겨서 북한에 못 올라간 거에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 큰 아들이 성장해서 큰 아들과 캐나다로 이민을 오셨어요. 그리고 기회가 될 때마다 중국에 가서 선교사들을 통해 자기 딸하고 아들을 찾은 거에요. 북한에 살 때 원산에 살았는데 원산에 정보가 있으면 달라고 그러다가 자기 딸이 원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리고 딸 친구가 원산에 있는 동명여관에서 일한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러면서 저한테 봉투 하나를 주는데 거기에 사진과 편지와  돈이 들어있어요. 이것을 자기 딸에게 전해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원산에 갈 일도 없고 이산가족 상봉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절했는데 이 할머니가 그러시는 거에요.
 
‘목사님 제가 자식들을 위해 50년 동안 하루도 안빠지고 새벽마다 기도를 했습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는 거절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 속으로 ‘이 봉투를 받지만 나중에 그냥 다시 갖다 드려야겠다’ 생각하고 받았습니다. 그때가 1998년쯤이었습니다.
 
제가 북한에 국수공장을 할 때인데 저는 함흥이나 어려운 시골에 세우려고 하는데 북측에서는 평양에 공장을 세워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겨우 합의를 해서 황주에 세우기로 계약을 하고 주민들하고 합의가 다 됐습니다. 그리고 하룻밤만 더 자고 이제 캐나다로 돌아오기로 되어 있는데 그때 최 국장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목사님, 합의도 잘되고 일이 잘 성사됐는데 금강산이나 보고 가시죠.’ 그러는 거예요. 갑자기 생각도 없는 금강산 얘기를 꺼내는 거예요. 그리고 금강산을 가려면 원산에 들려야 한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게 최 국장이 결정해서 될 일도 아니에요. 그러더니 여러 군데 전화를 돌리더니 잘 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 교회 장로님 다섯 분하고 북한 지도부 다섯 사람하고 10명이 출발하게 됐습니다.

 

▲ 20년 가까이 북한을 드나들며 인도주의 구호활동에 앞장선 것으로 알려진 한국계 캐나다인 임현수 목사가 2015년 12월 16일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밤 10시에 떠나서 새벽 2시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는데 가다가 자동차 바퀴가 고장나서 고치게 됐어요. 차 두 대가 갔는데 한 대를 고치는 동안 그때 같이 갔던 운전병 한 사람이 옆에 있는 운전사에게 ‘우리 이렇게 새벽에 원산에 가면 어디서 자지?’ 그러는 거예요 그러자 동료가 ‘그러게 동명여관에서 잘까?’ 그러는 거에요. 그 때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며 ‘네, 동명여관에서 잡시다!’ 그랬습니다.”
 
동명여관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기자도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그후의 이야기가 들으면서 스릴도 스릴이지만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원산에 가보니 여관이 한두 개가 아니에요. 그때 조총련을 실어나르는 만경 92호 배가 매주 6백 명씩 조총련을 실어나를 때라 원산에 여관 천지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딱 동명여관이 나온 거에요.
 
그래서 새벽에 원산에 도착해서 7층으로 올라갔는데, 그때 각층마다 지키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7층에 한 여자가 계단에 앉아 졸고 있다 우리가 오자 깨서 피곤한 듯 쳐다보는 거예요.

 

▲ 북한에 31개월 동안 억류되었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임현수 목사(위 왼쪽)는 2017년 12월 은퇴했다. 석방을 환영하는 큰빛교회 성도들은 임 목사 석방을 위해 기도회를 열었으며, 이 기도회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큰빛교회    


제가 마음이 급해 물었죠. ‘혹시 이러 이러한 여자 아냐고 물었죠’ 그런데 그러는 거예요. ‘그애 내 친군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얼마나 소름끼쳤는지 할머니가 그랬잖아요 동명여관에 자기 딸 친구가 있다고, 그런데 그 친구가 딱 7층에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딸 친구가 저를 신고를 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얼마 후에 관리들이 제방에 들이닥치며 굳어진 얼굴로 ‘목사님, 사람 찾습니까?’ 하고 몰아부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태연한 척하며 ‘아니 아는 사람 이름 그냥 물어본 것 뿐이다’ 하고 다행히 무마가 되었습니다.”
 
관리들이 들이닥쳤을 때 얼마나 놀랐을까? 이후에도 007 같은 스릴 넘치는 이야기들이 있지만 아직 그곳에 있는 분들의 안전과 지면 관계상 더 게재하지 못한다.
 
그리고 임 목사는 007작전 같은 경험을 거치고 우여곡절을 지나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딸을 찾아 할머니의 봉투를 전해 주었다. 그것도 사영리를 건네 주며 꼭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면하면서 말이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전도를 하는 그의 모습이 존경스럽다. 
 
“다행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적적으로 딸을 찾아 할머니가 전해 준 사진과 편지와 돈이 들은 봉투를 전해주며 ‘꼭 사영리를 읽어보고 예수를 믿어야 엄마를 만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겪었지만 얼마나 신기합니까? 저는 포기하고 할머니의 봉투를 그냥 돌려줘야겠다 생각했는데, 최 국장이 계획에도 없는 금강산 여행을 가자고 하고, 관리들이 원산의 그 많은 여관 중에 동명여관에서 자자하고, 그리고 딱 여관 7층에 딸의 친구가 있었고, 이건 한마디로 기적이죠.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을 통해 기도는 북한 땅에서도 응답받는다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할머니는 임 목사가 딸을 만나 봉투를 전해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동안 그녀의 가슴에 박힌 대못이 빠졌을 것이다. 어린 자식들을 남겨두고 잠깐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그게 영원한 이별이 될 줄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는가? 50년 세월을 매일 새벽마다 자식들을 위해 기도했다는 그녀의 마음은 숯처럼 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기도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리고 임 목사의 간접적인 도움으로 할머니와 딸은 전화통화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후에 더 이상 어떤 진전이 있었는지 임 목사는 모르지만 기도는 북한 땅에서도 응답받는 사실은 모두에게 큰 위안이 된다.
 
남편 억류를 위해 미리 훈련시킨 것 같아요

 

이제는 강금영 사모의 이야기를 들었다. 기자는 그녀에게 남편이 북한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았을 때 얼마나 충격스러웠냐고 물어 보았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제가 남편이 억류되기 일 년 전부터는 제가 하루에 세 번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어요.
 
실은 제가 목회를 같이 해오면서 남편에게 섭섭한게 많았었어요. 남편은 교회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성도들이 필요하다면 밤낮을 안가리고 상담하고 도와주는데 저한테는 시간을 안내주는 거예요.

 

▲ 큰빛교회 원로목사 추대식에서 축하 케익을 자르는 임현수 목사와 강금영 사모. (2017. 12.10) ©큰빛교회    


아들이 집에 있었을 때는 아들한테 얘기도 하고 그랬는데 아들이 결혼하고 나서 나가 사니 이야기할 사람이 없는 거죠. 성도들 이야기는 다 들어주면서 제 얘기는 안들어주고 ‘내일 들어줄께, 내일 들어줄께’ 하면서 미루며 안들어 주니까, 서운한 거죠.  잠도 부족하고 피곤하니까 그랬겠지만, 남편한테 미운 마음이  많았었어요.
 
그래도 제가 전에 우울증을 찬송과 기도로 치유받고 나서부터는 기도하는 것이 중요해서 남편이 억류되기 일 년 전쯤부터 제가 하루 세 번씩 교회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런데 하루는 기도하는데 그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네가 아무리 기도해봐라, 네가 남편에 대해 원망과 미워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게 응답이 되겠니?’ 그런 음성을 듣고 펑펑 울면서 회개를 했어요.
 
그동안 제가 마음으로 남편을 살인해 왔잖아요. 그리고 남편에게 용서를 구했어요. 그랬더니 ‘자기도 소홀히 해서 미안하다. 앞으로 시간을 만들자’ 이렇게 해서 서로 용서하고 마음이 해결이 되니 남편이 억류되기 몇개월 전부터는 저희가 신혼부부처럼 살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남편이 억류가 돼서 다행이지 만약 남편에게 원망과 미움이 해결되지 못한 채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저를 회개시키고 준비시키고 남편을 억류시킨게 너무 감사한 거예요. 그렇지 않고 억류되었다면 제가 어쩔 뻔 했겠어요?”  
 
강 사모와 남편은 한 살 차이이다. 둘은 CCC에서 만났고 5년을 연애하고 임현수 목사가 3년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 강 사모는 기다려 주었고 임 목사가 제대 후 결혼했다.
 
“저희는 한 살 차이에요. 5년여 연애했고 남편이 3년 군대에 가 있는 동안 기다려 주었고 그후에 결혼했습니다. 그러니 화가 나면 제가 반말도 하고 막 그랬죠. 그런데 남편한테 용서를 구하고 나서 남편이 그렇게 어려운 거예요. 반말을 못하겠더라고요. 그후로 존대말을 합니다.”
 
임현수 목사는 큰빛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강 사모의 말대로라면 오직 교회밖에 모를 정도로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그리고 우연같지만 섭리로 시작된 북한 사역은 그의 사역을 더 바쁘게 몰아 갔을 것이다. 그녀의 고백대로 하나님께서 기도훈련을 시키지 않으셨다면 남편이 억류되어 있는 동안 그녀는 아마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도훈련을 시키지 않으셨다면 남편이 억류되어 있는 동안 저는 아마 정신병에 걸렸을 겁니다.”

 

전도부인이 되다

 

강 사모는 남편 억류 소식을 듣고 그렇게 크게 놀라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미리 마음을 준비시킨 덕분일 것이다. 크게 놀라거나 두렵지는 않았는데 남편 억류 소식을 듣고 한 달 반쯤 지났을 때였다. 남편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기도하기 위해 교회로 갔다.

“제가 남편 억류 소식을 들었을 때 크게 놀라거나 두렵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한 달 반쯤 지났는데 남편이 너무 보고 싶은 거에요. 그래서 제가 교회에 가서 기도하며 하나님께 따졌어요.
 
‘하나님, 제 남편은 북한을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이렇게 충성하는데 왜 남편을 북한에 가두셨어요?’ 그렇게 기도하며 울음이 나오는데 앞쪽에 어떤 할머니가 기도하고 계서서 울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기도했어요.  그런데 순간적으로 제 마음에 그러시는 거예요.
 
‘내가 네 남편을 북한에 보냈어. 걱정하지마. 내가 네 남편을 지키고 있어!’ 아 이 음성을 듣고 나니 제가 앞쪽에 계신 할머니가 듣든말든 막 펑펑 울면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때 그냥 막 제 머리 위에서 바스켓이 제게 쏟아지는 거에요. 감사가 부어지는데 하나님께서 염려가 아니라 감사의 마음을 제게 마구 부어주시는 거예요.”
 
강 사모는 이 은혜를 경험하고 나서 남편의 안전 문제에 대해 확신을 얻게 된다. 지면 관계상 다 게재하지 못하지만 남편이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남편을 풀어주겠다며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접근해도 남편은 돈으로 풀려나올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 억류소식으로 자신에게 여러 가지 취재나 접근하는 사람들을 피해서 한국으로 왔다. 그리고 한국에서 머물면서 전도하는 일에 매달렸다.
 
“제가 캐나다에 있으면 취재차 사람들이 많이 올 것 같아서 LA에 있는 아들네에 잠시 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애들도 신혼이니까 거기에도 오래 있으면 안되니까 다시 한국으로 갔습니다.
 
맨 처음 한국에 가서는 시어머님댁에 있었습니다. 어머님이 아들 때문에 걱정이 많으실 테니까 곁에 있었던 거죠. 그리고 10개월쯤 되었을 때 남편이 TV에 방송되는 거예요. 북한에서 재판받는 소식들이 나오는 거예요. 맨 처음에는 사형선고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펑펑 울면서 기도했어요. ‘하나님, 제 남편이 너무 억울합니다.’ 그랬는데 2개월 후에 사형에서 다시 종신형으로 감면이 된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제 마음에 하나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내가 네 남편을 살려주었으니, 이제 너는 전도해라’ 그래서 일 년 후에 시어머님댁에서 나와서 그후부터는 한국의 지인을 통해 아는 교회 선교관에서 머물면서 전도하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나오면 같이 북한에 가서 선교를 하려고 제가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침술도 배우고, 빵 만드는 것도 배우고, 미용도 배우고요. 남편이 북한에서 나오면 같이 북한에 선교하러 가려고 정말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본인도 이 시기를 어떻게 지내왔는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지나오기 어려웠을 거라며 그간 겪은 일들을 술술 꺼내 놓는 강 사모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도의 힘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임현수 목사는 2015년 1월에 나선에서 평양으로 이동하던 중 국가 전복 음모혐의로 체포되어  억류되었다가 그해 10월에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12월에 무기노동 교화형으로 감명되어 복역하다가 31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 2020 시드니성시화 행진을 마친 후 마틴 플레이스 광장에서 열린 찬양페스티벌에서 말씀을 전하는 임현수 목사.     © 크리스찬리뷰


젊은 시절 함흥에 촛불을 꽂고 기도했던 것이 하나님의 섭리로 26년 만에 현실적인 북한선교로 이루어졌고 18년 동안 150차례 북한을 넘나들며 북한을 위해 헌신했다. 임 목사와 강 사모가 북한을 위해 바친 기도와 흘린 눈물이 결코 헛되지는 않으리라. 머지않아 평화통일이 이루어져 그들이 흘린 희생과 땀과 눈물을 기쁨으로 거둘 날을 기대해 본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글/주경식|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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