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카뮈의 '페스트'에서 '코로나19'를 읽다

코로나19의 치료제와 백신은 '아름다운 연대'

김명동/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0/05/27 [15:35]

 

 


 
이른 새벽에 잠이 깨어 책을 읽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La Peste. 1947)를 다시 꺼내 들쳐본 것은 오늘의 코로나사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갇힌’ 사람들이 그 엄청난 비극에 대해 다양하게 대응하지만, 결국에는 역병 퇴치를 위해 힘을 모은다는 이야기다.

 

쥐들의 떼죽음, 공포의 시작

 

14세기 유럽에서 창궐해 전 유럽인구의 1/3을 죽음에 몰아넣었던 흑사병을 모티브로 하는 이 소설은 전염병의 창궐과정과 사람들의 대응, 공포 속에서의 인간심리의 사실적 묘사가 오늘의 재난상황과 무섭도록 일치하여 놀라움을 준다.

 

소설의 무대는 인구 20만의 알제리의 평범하고 조용한 해안도시 오랑시(市). 194x년 4월 16일 죽은 쥐들이 발견된다. 이후 계속해서 더 많은 숫자의 쥐들이 떼를 지어 거리로 나와 사람들의 눈앞에서 죽는다. 이 기이한 현상에 사람들이 불안해지기 시작할 때, 하루 동안 통계된 죽은 쥐들의 숫자가 8천 마리에 달한 후 그 숫자가 급격히 감소한다.

 

비로소 사람들이 안심하던 바로 그날부터 사람들이 의문의 병에 걸려 죽기 시작한다. 종기가 나는 사람이 있었고, 열이 40도까지 오르는 사람도 있었다. 작은 도시 오랑은 서서히 공포에 짓눌렸다.

 

페스트라는 말이 떠돌았지만, 열병이 페스트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사망자가 무서운 속도로 늘어나면서 중앙정부는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오랑은 교통이 차단되고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된다. 오가는 길이 막혔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를 돌아다니고, 카페, 테라스에 자라잡고 앉아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들에게 페스트는 예기치 않게 찾아온 것처럼 언젠가는 떠날 불쾌한 방문객에 불과했다.

 

재난은 처음 누구에게나 낯설다. 재난이 ‘나에게 벌어진 일’이라고 인식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린다. ‘우리’에게 벌어진 일이라고 알기까지는 더욱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사태가 확실하다면, 분명한 것은 망설일 시간이 없다는 사실이다.

 

오랑시 당국은 초반에 사람들에게 발생한 기이한 질병이 전염병이라는 것을 부정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숨질 때까지 감추기에 급급했다. 도시의 평화와 질서가 깨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위기의 의식도 당국과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 병에 걸려 죽지만, 사망자가 ‘나’는 아닌 것이다. 재앙의 존재를 믿지 않는 그들은 대비책을 세우지 않는다.

 

카뮈가 말하는 재난 속 ‘인간다움’

 

코로나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 것은 개인의 안전만 생각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속한 공동체와 이웃의 안전에 책임지는 태도를 의미한다. 내 몸이 건강할 때 이웃이 건강할 수 있고, 이웃이 건강할 때 내 안전도 보장되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페스트는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장치다. 페스트에는 이 봉쇄된 도시에서 재난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몇 가지 유형을 보여준다.

 

오랑시의 시민은 페스트의 극한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생필품이 동나기 시작한 기회를 타서 한 몫 잡으려고 하는 속물이 있다. 소설 속 인물 ‘코타아르’다. 석방된 죄수인 ‘코타아르’는 그 혼란한 틈을 타서 돈을 벌려고 혈안이 된다.

 

그는 “나는 훨씬 지내기가 좋아졌다. 페스트 안에 있는 게 편하다”라고 지껄인다. 그는 재앙을 즐기는 유일한 인물이다. 반면 함께 힘을 합쳐 난관을 타개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인도 있다.

 

여행객 ‘타우르’와 의사 ‘류’다. 그들은 오랑시 보건위생과의 인력과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페스트 퇴치대’를 결성했다. 그들은 재난은 언젠가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페스트와 맞선다.

 

그렇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된다. 류와 타우르는 “어떤 방법으로든 싸워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죽는다든가, 결정적인 이별을 겪는 아픔을 막아주자”고 굳게 다짐한다. 그런 생각은 그저 당연한 것이어서 별로 칭찬을 받을 만한 것도 못 된다.

 

그런 일에는 어떠한 영웅도 필요 없다. 그저 소박한 시민이 서로 힘을 합친다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카뮈는 이런 행위에 과장되게 칭찬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인간다움’의 도리를 더 강조한다. 타우르가 하는 말을 보라.

 

“아마 나는 영웅주의라든가 성자 같은 것에는 취미가 없는 것 같아요.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저 인간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타우르에게 류는 속마음을 터놓고 싶은 마음마저 인다. 류는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이 페스트에 감염될 수 있음에도 밤늦게까지 최선을 다해 소임을 완수하는 성실한 의사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험을 처음으로 알리고 경고했지만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이유로 중국 공안, 즉 경찰에 불려가 곤욕을 치러야 했던 젊은 의사 ‘리원량’도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세계는 우한이 바이러스의 진원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해 아무런 대비도 못하고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에 처했을지 모른다.

 

애석하게도 그는 환자를 치료하다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었다. 그는 한 아이의 아버지였고 동료의사인 아내는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는 의사였다는 점에서 그는 ‘페스트’에 나오는 류를 닮았다. 그는 영웅주의에서 행동한 게 아니었다. 그저 성실했을 따름이었다.

 

한편 신문기자 ‘랑베에르’가 있다. 취재차 이곳에 와있던 그는 이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는 도시가 자기와는 무관하다는 판단 아래 애인이 기다리고 있는 파리로 가기 위해 온갖 탈출방법을 찾아 헤맨다. 그는 류를 찾아와 무감염증서 발급을 요구한다. 류가 거부하자, 랑베에르는 “나는 이고장 사람이 아니다”라고 항변한다.

 

그러던 중 그는 늦게나마 “혼자만 행복하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자책하게 된다. 그는 탈출을 단념하고 여기에 합류한다.

 

다음으로 ‘판느루’ 신부가 있다. 그는 전염병을 신의 분노와 징벌이라고 여긴다. 인간이 사악해지고 타락했으니 이런 불행을 겪어 마땅하다. 신부는 설교시간에 회개하라고 외친다. 신부는 어린아이의 죽음 앞에서도 인간의 죄를 언급한다. 의사 ‘류’는 격리환자 수용소 벤치에 앉아 더위와 울분과 피곤으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다가 다가오는 신부를 보자 냉소적으로 힐난한다.

 

“기도만 하면 다입니까.”

 

류 의사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함께 일하기를 거부하고 ‘기도만 하면 된다’라는 사탕발림이다. 판느루 신부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안타깝게도 페스트에 걸려 치료를 거부하다가 죽게 된다. 또한 판사 오통은 아들을 잃고 격리된다.

 

하지만 격리가 해제되고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봉사활동을 한다. 그는 소설에 등장하는 최고위직 인물이지만, 재난 앞에서 헌신적인 면모를 보인다.

 

마침내 페스트를 퇴치하고 닫혔던 성문이 열리자 코타아르가 양심의 가책을 못이겨 자살한다. 때는 이미 늦었으나 사회의식의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는 나 하나만의 나가 아니고, 사회의 나, 민족의 나, 국가의 구성원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구성원은 사회적 연대관계에 묶여있다. 이웃의 불행은 그 사람만의 불행일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불행이다. 그 구성원으로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다하는 것이 현대의 위기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삶의 도리임을 류 의사는 보여준다.

 

페스트는 이와 같이 개인 의식을 뛰어 넘어 진정 ‘이웃을 위하는 마음’으로 확장된다.

 

김명동|본지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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