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ID-19로 배운 ‘우리’와 ‘함께’의 가치
 
정지홍/ 크리스찬리뷰

 

▲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안내하는 홍보판이 데이비드 존스 백화점 입구에 설치되어 있다.     © 크리스찬리뷰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렇게 정의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Homo est animal sociale).

 

르네상스 시대의 네덜란드 철학자 바뤼후 스피노자, 우리에게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겠다’라는 명언으로 더 유명한 스피노자 역시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정의했다.

Man is a social animal.

 

사회적 동물인 인간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정의는 인간이 함께 모이고 군집 생활을 하고 서로 돕고 조직을 구성하여 하나의 사회(society)를 이루고 산다는 것을 뜻한다. 한줌의 흙이 모여 태산을 이루고 한 방울의 물이 함께 어울어져 큰 바다를 이루듯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우리’가 되고 ‘사회’를 형성해 간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결코 홀로 살 수 없다. 끊임없이 타인과 관계 속에서 즉, 사회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고 해도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야만, 그것이 부부이든 가족이든 친구이든 그 어떤 조직과 공동체이든 간에 다른 사람과 함께 살 때에만 참다운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고 또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사회 속에서만 자신의 삶의 이유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아담이 혼자 있을 때에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창 2:18)고 하시며 그의 갈빗대를 취해 하와를 만들어 함께 살도록 하셨다. 인류는 태초부터 ‘가정’이라는 사회를 이루고 ‘사회적 삶’ (social life)을 살게 된 것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

 

사회적 존재로서 함께 어울어져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야할 사람들이 요사이 COVID-19로 인해 그 존재감을 잃었다. 이른바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e)로 만나던 사람들, 친구들, 교인들을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한 집에 사는 가족이 아니라면 길을 갈 때에도, 줄을 설 때에도, 필수적인 일 때문에 한 공간에 있을 때에도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해야만 한다.

 

그나마 제한 조치가 다소 완화되어 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유지해야만 한다. 어길 시에는 엄청난 벌금이 부과되고 심할 경우 감옥에도 갈 수 있다.

 

사회적 동물,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한다는 것은 사실 그 자체로 모순이며, 인간의 ‘존재’와 ‘정체성’이 흔들리는 문제다. 그야말로 인간성이 상실되는 것이다.

 

가족이 있는 경우는 그래도 좀 낫다. 유학을 오거나, 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 그리고 혼자 계신 분들에게는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더 큰 고독과 상실감을 안겨줄 수 있다.

 

이럴 때 소중하게 다가오는 단어가 있다. '우리'와 '함께'다. 그동안 우리 각자는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우리'가 되었고 또 '함께' 했다. 정말 너무 쉽게 '우리'와 '함께'를 소유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와 '함께'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르고 살았다. 코로나 사태가 오기 전까지는.

 

'우리'와 '함께'가 인간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동안 우리는 너무 가볍게 '우리'를 대했고, 기분이 나쁘다고 '함께'의 자리를 쉽게 내팽개쳤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해야만 하는 요즘, 그 '우리'와 '함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지금은 분명 ‘우리’와 ‘함께’를 깊이 묵상해야 할 때다.

 

의사 누가가 만든 ‘우리’

 

바울이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된 배를 타게 되었다(행 27:1). 바울이 그토록 가기 원했던 로마로 향하는 배에 승선하게 된 것이다.

 

그 배에는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도 같이 탔다. 그 죄수들은 십중팔구 사형수들이었을 것이다. 사형수들을 현지에서 죽이지 않고 그 먼 로마로 호송하는 이유는 로마 시민의 오락을 위해서였다.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피흘리고 죽음으로써 로마 시민들을 즐겁게 해 줄 희생자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무죄한 바울이 그 사형수들과 무리를 지어 배에 올랐다. 당시에 죄수들을 배에 태울 때에는 손과 발에 사슬을 채웠다. 배에서 난동을 부리거나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죄수들과 한데 섞여 있던 바울도 사슬에 묶였을 것이 뻔하다.

 

그렇지만 바울은 감격했을 것이다. 어느 때보다 흥분되고 신이 났을 것이다. 그 배가 그토록 가길 원했던 로마, 이달리야로 향하는 배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기가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았다. 사슬에 묶이고 죄수가 되어도 로마로 갈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여겼다. 게다가 바울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 배에 누가가 함께 탄 것이다! “우리가 배를 타고”(27:1).

 

아무리 바울이 이달리야로 향하는 배를 탔다고 해도, 그 멀고 거친 항해길이 얼마나 외롭겠는가? 또 1세기 당시의 배가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바울이 탄 배는 여객선이 아니라 화물선이었다. 편안한 객실도 없고, 요즘처럼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이나 TV가 있는 것도 아니다.

 

또 바울이 배를 탄 가이사랴에서 로마까지는 무려 2,240km 나 된다. 당시의 선박은 하루에 보통 100km를 항해했다니까 아무리 빨리 로마로 가도 최소 23일 이상 배를 타야 한다.

 

그 시간도 지루하기만 한데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직행하는 배가 없었다. 중간에 갈아타야 하고 또 화물선이었으니 물건을 내리고 올리는 시간도 필요했다. 심지어 유라굴로 광풍에 휩싸여 14일 동안이나 바다에 표류하게 되고, 멜리데 섬에 수개월 동안 갇히게 된다.

 

결국 해를 넘겨서야 로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길고도 먼 항해 동안 바울은 화물 사이에서 쪼그려 잠을 청해야 하고, 망망대해에서 찜통 같은 더위도 견뎌야 한다.

 

 

아무리 로마로 간다는 사실에 설레고 가슴이 벅찬다고 해도, 그 먼 길을 홀로 간다면 천하의 사도 바울도 무척이나 외롭고 고단했을 것이다. 때로는 육신의 고난보다 외로움이 주는 고독의 고통이 더욱 컸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배에 누가도 ‘함께’ 탔다. 그렇지 않아도 병약한 몸을 지닌 바울인데, 지금 바울은 인생 말년으로 노쇠할 때로 노쇠한 몸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의사가 필요할 때였다.

 

하지만 죄수의 신분인 그에게 어떤 의사가 주치의가 되어주겠는가? 아니, 그가 아프다고 제대로 진찰이나 해줄까? 그런데 의사 누가가 바울 곁을 지킨다. 그때 바울이 얼마나 위로를 받고 힘이 되었을까? 과연 “우리”가 주는 힘이고 능력이다.

 

바울과 같이 다니는 사람

 

그런데 누가만 바울과 함께 했던 것이 아니다. 아리스다고도 ‘함께’ 했다.

 

아리스다고의 별명이 ‘바울과 같이 다니는 사람’이다.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어디를 가든 바울과 같이 다녔다. 바울이 3차 선교여행 중에 에베소 교회를 개척했을 때에도 바울과 같이 다녔고, 바울이 에베소 회당에서 3개월 두란노서원에서 2년 동안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도, 아리스다고는 날마다 바울과 같이 다녔다.

 

그러다 에베소의 은장색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 아리스다고는 바울과 같이 다녔다는 이유로, 연극장으로 개처럼 끌려가 죽도록 맞고 가까스로 풀려났다.

 

 

바울과 같이 다니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후로는 아리스다고가 바울을 떠나거나 바울과 같이 다니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바울과 함께 다니면 또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그런데도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구제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으로 갈 때에도 함께 갔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갈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말렸다. 성령께서 환상 중에 바울이 결박과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바울도 알고 아리스다고도 알았다. 그런데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갔고 아리스다고 역시 바울 곁을 떠나지 않고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다. 아리스다고는 결박과 환난을 무릅쓰고 바울과 함께 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울이 죄수가 되어 올라탄 이달리아로 가는 배에도 아리스다고는 함께 올라탔다. 지금의 바울은 인생 말년으로 노쇠할 때로 노쇠한 몸이라고 했다. 아리스다고는 그런 바울의 손과 발이 되어주기 위해 바울과 함께 했다.

 

아리스다고가 무슨 권한이 있어서 죄수들이 타는 그 배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바울의 친구? 아니다. 바울의 동역자? 아니다. 바울의 종이다. 누가가 바울의 주치의 자격으로 승선을 할 수 있었다면 아리스다고는 노쇠한 바울의 손과 발이 되는 종의 자격으로 승선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리스다고 역시 로마로 가는 바울 곁을 지켰다. 바울이 아리스다고로 인해 다시 한번 큰 위로와 힘을 얻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와 ‘함께’가 이룬 로마의 비전

 

함께 배에 오른 바울, 누가, 아리스다고의 모습을 머릿 속에 그려보라. 두 배로 가슴이 벅차고, 세 배로 힘이 난다. 그것이 ‘우리’와 ‘함께’가 주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요 능력이다.

 

사도행전의 마지막인 28장은 바울이 마침내 로마로 가서, 로마 감옥에 갇혀 복음을 전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28장의 주어는 내내 ‘우리’다. ‘우리’라는 단어가 무려 10번이나 나온다.

 

무엇을 의미는가?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함께’ 로마에도 갔고, 바울과 ‘함께’ 로마 감옥에도 갇혔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함께’ 로마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바울, 누가, 아리스다고는 그렇게 항상 ‘우리’가 되었고, 언제나 ‘함께’ 했다. 그들은 그 소중한 ‘우리’를 지켜내기 위해 어디를 가도, 무슨 일을 당해도, 심지어 감옥에서도 ‘함께’ 했다.

 

즉, 바울이 품었던 로마에 대한 비전은 바울 홀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함께’ 하는 ‘우리’가 될 때, 비로소 그 위대한 로마의 비전이 성취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비전을 주셨다. 그 비전은 목사 혼자 이룰 수 없고, 성도 한두 사람이 이룰 수도 없다. 우리가 서로에게 바울이 되고, 누가가 되고, 아리스다고가 될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게 우리가 참다운 ‘우리’가 되고 무슨 일에든, 어디에서든 ‘함께’ 할 때, 주님의 위대한 비전은 성취될 것이다.

 

정지홍ㅣ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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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5/27 [15:53]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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