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있는 사랑의 무게

서을식/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0/05/27 [16:00]

 

“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5:12)

 

사랑은 적도처럼 뜨거운 가슴 정중앙, 극지방같이 시린 손발 끝, 그 느낌으로 외지에서 찾아온 낯익은 손님인 듯 내 주변 맴돌던 친숙한 이웃 같은 낯선 이방인이라고나 할까? 받아 훈훈하고 못 받아 시린 사랑, 각자 걸어온 삶의 자취 묻어나는 거칠게 오려 붙인 콜라주 작품처럼 성나고 상처 난 듯 어울려 멋지나 아직 미완성품으로 다독이는 손길을 기다리는 그 무엇.

 

“그냥 사랑해 책임지지 않아도 좋아”라고 외치는 외국 팝 가수의 노랫말이 리듬을 타고 집의 안방과 나의 뇌로 흐른다. 몸을 흔들며 되뇌다가 ‘참 가볍고 무책임하다’는 생각에 멈춰 선다. 이와 다른 사랑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오히려 무겁고 책임 있게 말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구절에서 세 가지 무게를 느낀다. 첫째,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의 무게는 가히 압도적이다. 하지만, 오직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 본인만이 알 뿐, 실상 아무도 둘 사이에 오고 간 사랑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다.

 

“저 장미꽃 위에 내린 이슬”로 시작되는 찬송이 “서로 주고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라는 후렴으로 끝나듯 그 동산에서 서로 간에 받은 기쁨은 여전히 하늘의 신비로 남아 있으니…참 아름답다.

 

둘째,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무게 역시 절대 가볍지 않다. 책임의 부담이라면 끝없이 무겁고, 권리의 특권이라면 한없이 가볍다. 자신이 그 사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는 오직 예수님과 사랑을 주고받은 사람 본인만이 알 뿐이다. 받은 사랑의 무게가 안 알려졌으니, 줄 수 있는 사랑도 짐작할 수 없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사랑으로 아련히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셋째는, “…한 것 같이…도…하라”. 이 문맥에서 예수님께 받은 사랑과 사람에게 줄 사랑, 그 양쪽에 실린 무게는 정확히 일치한다. 균등하여 치우침이 없다. 덧셈과 뺄셈으로 보자면, Input과 output이 동일하여 들어오고 나가는 양이 같아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이 공식을 사용해 정답을 알 수 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약한 연결고리가 있다.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받아 ‘in my pocket’하고 사랑이 흐르지 못하도록 흔적조차 없애는 경우가 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몰랐을까? 아니다. 명료하게 아셨다.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는 예수님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성경에 자주 언급된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라는 말씀은 연약한 인생 이해의 최고봉이다. 디베랴 바닷가 숯불 앞에서 떡과 생선구이로 조반을 드시고 베드로와 사랑의 문답을 하실 때, 예수님은 두 번이나 계속해 아가페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고 난 후, 세 번째 물음에서 비로소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반면에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답했다.

 

물론 예수님 당시 히브리어에 사랑이라는 말은 하나였다고 그 차이를 경시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아가페 사랑을 요구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연약함을 충분히 받아들인 증거도 된다.

 

사람을 알아도 너무 잘 아는 예수님, 그런데도 예수님은 높은 수준의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실적이 필요해 시류를 타는 현대 설교자가 믿음의 여행을 아무리 쉽게 감성적으로 제시하는 능력을 갖췄다 하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예수님은 결코 이 여행을 쉽다고 말한 적이 없다.

 

‘율법의 요약이 십계명이고, 십계명의 요약이 사랑이다.’ 맞다. 범위를 확장해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좋다. ‘사랑은 구약과 신약 성경 말씀 전체 그리고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이다.’ 사랑은 자유인의 선택인 동시에 종의 미션, 즉 계명이다. 예수님은 사랑을 새 계명이라고 하셨다.

 

자유인의 자발적 의지로 사랑이 불가능할 때라도, 사랑은 지금 여기서 내가 이행해야 할 그리스도의 새 계명이라는 사실에 집착해보면 어떨까? 너무 율법적일까? 그래서 복음이 방해받을까? 오히려 사랑을 실천하지 않아 복음의 참 성격이 드러나지 않고, 기쁨과 자유의 복음이 드러나지 않아 율법적 기독교로 화석화되어 간다. 알듯 말듯 알 수 없으나 알 수 있는 사랑의 무게를 따라 행하자.

 

서을식|버우드소명교회 담임목사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