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들의 삶과 인권 조명

130년 한·호주 민간교류 결실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0/05/27 [16:52]
▲ 부산나병원 기념비가 국가등록문화제 제781호로 지정됐다. 사진은 2000년 3월, 부산 용호동 상애원 입구에 있는 기념비를 취재할 당시 본지 편집인 김명동 목사(왼쪽)와 고신대 이상규 교수.     © 크리스찬리뷰

 

▲ 부산나병원 기념비 기념비 뒷면.     © 크리스찬리뷰


한국내 최초 한센인 치료 병원인 부산나병원 기념비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부산 일신기독병원은 부산나병원 기념비가 최근 국가등록문화제 제781호로 지정됐다고 지난 5월 4일 밝혔다. 1930년 건립된 기념비는 오벨리스크 형식으로 병원 명칭, 건립 및 운영자, 건립 시기 등 정보를 담고 있다.

 

높이 113㎝, 하단 폭 12㎝, 상단 폭 9㎝ 크기로 화강암 재질이다.

 

관련 조사를 한 경기대학교 소성박물관 배대호 팀장은 “한센병 환자들이 성금을 모아 직접 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부산나병원은 1909년 부산 남구 감만동에 건립된 국내 최초의 한센병 전문 치료 기관이다. 이 병원은 1941년 일제가 군사시설을 만들기 위해 병원 문을 닫을 때까지 호주 선교사 제임스 노블 맥켄지(Rev. James Noble Mackenzie, 한국명 매견시)가 29년간 운영했다.

 

폐원 당시 나병원에는 한센병 환자 680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중 상당수는 소록도 갱생원으로 강제 이송됐다.

 

해방 뒤 소록도에서 돌아온 일부 한센병 환자들이 다시 모여 거주하게 된 곳이 부산 남구 용호동 상애원이다. 상애원도 1990년대 말 해체되면서 지금은 주거지로 변모했다.

 

부산나병원 기념비는 한국과 호주를 잇는 첫 국가문화재라는 의미를 지닌다. 1889년 호주인의 조선 방문 이후 130년 넘게 이어진 한국과 호주 간 민간교류의 결실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제임스 최 주한 호주대사는 “호주와 한국 간 굳건한 인적교류를 기념하는 이 비석의 문화재 등록을 계기로 양국 관계와 문화교류 연구가 더욱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비석을 보관하고 있는 인명진 한호기독교선교회 일신기독병원 이사장은 “일반인들과 격리된 생활을 한 한센인 삶과 인권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라며 “잘 보존해 일반에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일신기독병원은 코로나19 사태가 안정되면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등록문화재 지정 기념식을 개최할 예정이다.

 

한편 본 비석은 부산 나병원 환자들의 주도로 1930년 5월에 맥켄지 선교사의 내한 기념 20주년을 맞아 감만동 나병원 교회 앞에 세워졌으나 이후 용호동, 기장군 등으로 이전, 2016년에 현재 위치인 동구 일신기독병원 옆 맥켄지 공원 내로 이전된 바 있다.

 

한국 한센인들의 친구, 맥켄지 선교사

 

▲ 맥켄지(한국명 매견시)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한 제임스 노블 맥켄지(James Noble Mzckenzie, 1865. 1.8~1956. 7. 2) 선교사는 1894년 2월, 뉴 헤브리즈(New Hebrides) 선교에 참여할 것을 신청하였고 이것이 호주장로교회의 이름으로 바로 수락되어 몇 개월 후에 마가렛 켈리(Margaret Kelly) 양과 결혼하고 그해 9월 21일 런던에서 호주로 향했다.

 

그해 12월 멜번에서 목사를 받은 맥켄지는 뉴 헤브리제도(현 바누아트, Vanuatu) 의 북서 방향에 있는 산토(Santo) 섬을 임지로 받았다. 산토 섬은 26년 전에 제임스 고든(James Gordon) 목사가 순교한 곳이며, 고든 목사는 그 섬에서 겨우 5개월 동안 사역을 했다.

 

1839년 런던선교회에서 파견한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 목사와 해리스(Harris) 씨는 그 섬에 상륙한 날 바로 그곳의 야만 식인종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비참하게 타살되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다음 캐나다의 조지 고든(George Gordon) 목사와 그의 부인이 그곳에 정착하였다. 몇 명의 신자가 생기기는 하였으나 얼마 안가서 이들 부부도 역시 야만인들에게 살해되었다.

 

이 시기에 순교한 고든 목사의 동생인 제임스 고든이 캐나다에서 목사가 되기 위하여 공부를 하고 있다가 자기 형과 형수가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에게 형의 빈자리를 자기가 채워야 한다고 그곳 에로만가에 보내 줄 것을 간청하였다.

 

형의 살인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고 어머니를 설득하여 승락을 받았다.

 

산토섬에서 돌아온 고든 씨는 어느 날 자기 형이 미완성으로 남겨둔 ‘스테벤’(Stephen)의 순교 이야기에 관한 번역을 한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 재정리하고 있을 때 다른 원주민 한 사람이 전쟁 때 사용하는 도끼를 들고 고든 선교사의 머리를 내려쳤다. 도끼에 찍힌 고든 씨는 형에 이어 그 자리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맥켄지 선교사는 고든 씨의 후계자로 그곳에 도착했을 때 원주민들은 두 팔을 들고 환영해 주었다. 원주민 중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소수였으며 세례를 받은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다.

 

맥켄지 선교사가 사역한 10년간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약 600~700명의 주민들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330명이 성찬식에 참례할 수 있게 되었다.

 

맥켄지는 산토 섬에서 15년간 선교사업을 하는 동안 아내를 열병으로 잃었다. 그리고 자신도 건강이 좋지 않아 그곳 기후에 더 견딜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그곳을 떠나야했고, 다음 선교지를 한국을 선택하여 자원하였다.

 

▲ 맥켄지 선교사가 한국 선교를 떠나기 전 15년 동안 사역했던 산토마을 원주민들.     © 크리스찬리뷰

 

맥켄지 선교사가 15년 전 산토 섬에 왔을 때는 벌거벗은 야만인으로 보이던 사람들이 맥켄지 선교사가 이곳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200파운드나 되는 큰 돈을 새로운 선교지에서 선교를 하도록 선교비를 전달했다.

 

맥켄지는 산토 섬을 떠나 한국에서 8년 사역 후 안식년을 받아 한국에서 호주로 가게 되었는데 산토 섬에 있는 옛날 친구들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그들은 선교사 없이도 교회를 잘 섬기고 있었다.

 

▲ 맥켄지 선교사 한국 선교 20주년을 맞아 1930년 5월, 부산 나병원 환자들의 주도로 감만동 나병원 교회 앞에 기념비 세우고 제막식을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맥켄지 선교사가 그들을 방문한 3개월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옛날에 못다한 성경번역에 시간을 보냈다. 휴가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맥켄지가 하고 있던 최근의 일에 대해서 산토 신문에 소개한 글에 이제 산토 섬의 4분의 3 이상이 신약성경을 영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는데 필요한 성경의 출판비는 그들 스스로의 부담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 한센인들의 친구’(Friend of Korean Lepers)로 알려진 맥켄지 선교사는 1910년에 내한하였으며, 29년 동안 부산에서 한센인들의 치료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다.

 

권순형|본지 발행인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