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Voice)

이태형/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0/06/29 [15:25]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목숨을 잃은 흑인 조지 플로이드는 8분 46초 동안 목이 눌리면서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e)고 호소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보이스(voice·소리)였다.

 

그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백인 경찰관 데릭 쇼빈은 플로이드의 소리를 들었음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무릎으로 목을 계속 눌렀다. 플로이드의 보이스를 무시하며 사일런스(silence·침묵)로 일관했다. 8분 46초 동안 한 장소에서 ‘보이스’와 ‘사일런스’가 공존했다.

 

플로이드의 죽음 이후 미국에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s)를 외치는 목소리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 갔다.

 

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고, 그 소리를 외면하며 침묵으로 일관하는 사람도 있다. 그 소리가 나오기까지 형성된 구조적 문제보다 소리로 인해 파생되는 현상적 문제를 비판하는 소리도 나온다. 우리는 어떤 소리를 듣고, 어떤 소리에 반응하며 우리의 소리를 내고 있는가.

 

미국의 인종차별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전반적으로 백인 목사들은 애써 인종차별 문제에 침묵하는 경향이 짙었다. 물론 목소리를 내는 백인 목사들도 있다. 그러나 인종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용기 있는 목소리를 내는 백인 목사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뜻 있는 목회자들은 “이 땅의 교회는 소리를 낼 수 없는 자들의 소리가 돼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미국의 해묵은 인종차별 문제는 해소되지 않고 있는지 모른다.

 

소리는 미국의 흑백갈등 현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도처에서 소리를 낼 수 없는 자들의 신음이 들린다. 여행용 가방에 7시간 넘게 갇혀 있다가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끝내 숨진 천안의 9세 아이도 그 가방 안에서 절규의 소리를 외쳤을 것이다.

 

여의도 국회에서는 여야 정치인의 수많은 소리가 들린다. 이용수 할머니의 소리와 윤미향 의원의 엇갈린 소리도 들었다. 산업 현장에서 허무하게 스러진 사람들의 소리, 광화문에서 울려 퍼진 촛불과 태극기로 상징되는 상반된 소리도 들었다. 살아 있는 한 앞으로도 매일 수많은 소리를 들을 것이다.

 

어떠한 생각이 보이스가 돼 세상에 나올 때는 모두 이유가 있다. 하나의 소리에는 그 소리를 형성한 세계관과 환경, 믿음이 담겨 있다.

 

이 땅의 교회에서도 수많은 소리가 나오고 있다. 교회의 보이스는 소리를 낼 수 없는 자들의 소리가 돼 주고 있는가. 소리를 내어야 할 때, 침묵하지는 않았는가.

 

교회에 세상의 소리는 모두 ‘회중의 소리’들이다. 목회자들은 회중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다. 다양한 환경 속 회중의 소리 가운데 담겨 있는 ‘하나님의 보이스’에 민감해야 한다.

 

유진 피터슨은 “영혼에 이하동문은 없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일률적인 잣대로 적용할 수 있는 회중, 가치 없는 회중은 없다. 그래서 이 땅의 회중이 내는 모든 소리는 결코 무시될 수 없다.

 

지금 한국교회에선 코로나 사태 이후 새로운 교회의 모습에 대한 논의들이 한창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한국교회는 이전보다 훨씬 더 회중의 보이스를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지금 회중은 소리 낼 수 없는 사람들의 소리가 돼 주는 교회를 원한다. 보이스가 나와야 하는 상황에서 사일런스로 일관하거나 회중의 간절한 소리에 비해 ‘한가한’ 소리만 내는 교회를 견디지 못한다.

 

우리 주위에 “숨 쉴 수 없다”고 호소하는 이 시대의 플로이드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회는 그런 사람들의 신음에서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보이스’를 듣고 그들의 소리가 돼야 할 사명을 지닌 공동체다.

 

 

이태형|현 기록문화연구소 소장, 고려대 사학과 및 미국 풀러신학대학원(MDiv) 졸업, 국민일보 도쿄특파원,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 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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