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 실천 추진위원회 염종영 대표

글|주경식 사진|권순형 | 입력 : 2020/07/28 [15:29]

 

▲ 염종영 대표는 실버워터에서 냉동수산물 수입업체 잼스 트레이딩을 운영하며 시소추 대표를 맡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염종영 대표는 실버워터에서 냉동수산물 수입업체(잼스 트레이딩)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 실천 추진위원회(약칭 시소추) 대표도 맡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 냉동수산물을 수입하여 시드니에 있는 여러 한인식당에 납품하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비지니스라고 하지만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한국에서 냉동수산물을 수입하는 일부터 영업하는 일 그리고 심지어 배달하는 일까지 혼자서 운영하는 일인회사의 대표이자 배달부이다.

 

혼자서 영업과 배달하는 일까지 모두 하다 보니 교회의 바자회가 열리는 곳이면 직접 배달을 하고 있다. 그 덕분에 그가 납품하였던 한인 식당 사장님들은 물론 그의 냉동수산물을 납품 받아 바자회를 하였던 교회의 권사님들까지 모두 좋은 친분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한다.

 

호주에 첫발을 디디다

 

염 대표는 1985년 시드니에 왔다. 한국에서 행정학을 공부하다가 집시법(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에 걸려 한국에서는 더 이상 학교를 다니기 어려운 형편이 되어 누나가 먼저 정착해서 살고 있던 시드니로 온 것이다. 그 시대를 지나온 사람들은 누구나 알 것이다.

 

1980년대의 한국 대학가는 시끄러웠다. 광주학살과 체육관 선거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반대 시위가 연일 대학가를 휩쓸 때였다. 살벌한 군부독재정권하였지만 많은 대학생들의 희생으로1987년 6.29 민주화 선언을 이끌어 내었다.

 

염종영 대표도 그때 “독재타도, 호헌철폐”(대통령 선거를 체육관에서 선거인단이 간접선거 방식으로 선출하는 헌법을 국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방식으로 바꾸라는 요청)를 열심히 외치며 데모의 앞장에 섰다가 제적을 당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중단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누나가 먼저와 살고 있는 호주 시드니에 오게 된 것이다.

 

“제가 1985년 11월에 호주로 왔습니다. 유학생으로 왔는데 제가 뉴 사우스 웨일즈 대학에서 행정학을 공부할 목적으로 왔는데 강의를 못 따라 가겠더라고요. 그래서 영어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때 랭귀지 스쿨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 몇 명이 시드니에 아직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어 공부가 끝나고 대학에 진학하려고 했는데 비싼 학비를 지불할 정도로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거나 누나에게도 신세지기도 미안해서 제 힘으로 공부하고자 상대적으로 학비가 저렴한 TAFE에 가서 컴퓨터 사이언스를 공부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과천 문원초등학교 교장선생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할아버지도 교장선생을 지낸 대대로 교육자 집안이라 할 수 있다. 그런 피를 이어받아서 그는 일종의 선비기질이 있다.

 

“저의 조부는 파주 청석 국민학교 교장이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아버지도 교하 국민학교 선생이셨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6.25 때 납북되었다는 소문 때문에 한동안 연좌제에 묶여 저희 가족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저희 할아버지를 납북하려고 데리고 가다가 총살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가족은 대체적으로 반공사상이 투철한 집안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막내라, 상황을 잘 모르고 형들과 함께 메뚜기도 잡고 개구리도 잡으며 교회에서 뛰놀며 밝게 자랐습니다.

 

그리고 대대로 교육자 집안답게 저희 집 가훈이 ‘正思義行’(정사의행)입니다. 바르게 사고하고 옳게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이 가훈과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신앙 덕분에 저는 바른 생각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자라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제가 어릴 때 다녔던 교회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구제, 구난, 구급의 역할을 잘했던 교회였습니다.”

 

모든 인간은 진공상태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늘의 염종영 대표는 어릴 때부터 다녔던 교회의 좋은 모범과 교육자 집안에서 다져진 바른 생각으로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가 형성된 것이다.

 

그는 뉴 사우스 웨일즈 TAFE에서 컴퓨터 사이언스 과정을 마치고 울릉공대학을 비롯, 몇 대학에서 입학허가를 받았는데 학비가 여의치 않아 공부를 더 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TAFE에서 공부하는 동안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청소, 택시운전 등 다양한 일들을 경험했는데, 많은 고민 끝에 1989년 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다시 한국으로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삼주실업이라는 종합무역회사에 입사했다. 이 회사는 무역을 주 업무로 하는 종합 무역회사였다. 그는 입사한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호주에서 택시를 운전했던 경험을 기초로 프로젝트 하나를 회사에 건의했다.

 

“제가 호주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택시 운전을 해보지 않았습니까? 그때 보니까 모든 택시들은 한 달마다 브레이크 패드를 갈았습니다. 매달 20일쯤 되면 모든 택시들이 안전 때문에 브레이크 패드를 갈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억하고 제가 호주에 한국 브레이크 패드를 수출해 보자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 프로젝트를 맡아서 일 년 만에 다시 호주로 파견되어 왔습니다. 그때 많은 호주 택시회사들을 다니며 브레이크 패드 수요를 확보해서 한국에서 직접 브레이크 패드를 만들어 호주 택시회사에 납품을 했습니다.

 

▲ 염종영 대표 가족은 온 식구가 시소추 회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그런데 그 당시 브레이크 패드에는 석면 대신 세미메탈을 사용했는데 한국공장에서 공장장이 원료를 덜 넣고 그 차익을 챙기기 위해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전량을 회수해서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만드는 등 여러 해프닝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저희 회사가 밀링머신을 미국에서 수입해 사용하는데 그 수입하는 문제 때문에 상공부 산하 기계공업진흥회에 갔다가 거기서 아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회사는 다시 만든 브레이크 패드를 가지고 빨리 호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아내를 놓치기 싫어 과감히 회사를 사직하고 아내의 퇴직금을 빌려 호주에서 있었던 경험을 갖고 ‘팀코’라고 하는 유학원을 시작했다.

 

“유학원이라는 것이 그렇잖아요. 유학생들에게 호주에 있는 학교를 소개하고 커미션 받고 이러는 곳인데, 저는 뭔가 발전적이고 기여를 할 수 있는 것을 개발해서 학생들에게 선진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뱅스타운 옆에 패드스토(Padstow) 칼리지라는 곳에 항공정비학교가 있었어요. 그때 그곳이 앤셋(Ansett), 콴타스(Qantas) 등의 항공회사의 초급 정비사들을 훈련시키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곳에 한국 유학생들을 보내 항공정비교육을 받게 해서 실질적으로 취직을 도와주자. 그래서 뉴사우스 웨일즈 TAFE 본부를 찾아가서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항공정비교육을 받은 분들은 모두 취직해서 지금 잘들 살고 계십니다. 아시아나 대한항공뿐만 아니라 외국회사에 취직하신 분들도 많이 계세요.”

 

그는 이곳 패드스토 칼리지에 한국 학생들을 3기까지 보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러 상황이 생기는 바람에 이 과정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된다.

 

▲ 1996년에 열린 서울 에어쇼에서 호주 홍보위원으로 참가한 염종영 대표는 대형 태극기를 들고 일만 피트 상공에서 뛰어 내리는 한국 최초의 공중     ©크리스찬리뷰

 

서울 에어쇼

 

그가 20대 중반에 보냈던 짧은 호주에서의 경험은 그의 인생의 많은 부분과 얽혀 있다. 그의 인생 가운데 중요한 에피소드중 한 가지는 한국에서 처음 시작된 1996년에 열린 ‘서울 에어쇼’(ADEX: Seoul International Aerospace & Defense Exbition)에 호주 홍보위원으로 참여한 것이다.

 

당시 ‘서울 에어쇼’는 한국항공우주산업 진흥협회와 공군 본부가 주최가 되어 진행되었다. 그때 그가 호주에서 초청한 스카이 다이버 데이비드 벤슨과 아들 로드니 벤슨이 테니스장 크기만 한 태극기를 들고 한국 최초로 공중낙하의 시범을 보였다.

 

“정말 장관이었어요. 연막탄을 터뜨리면서 비행기가 공중에서 빙빙 돌다가 일만 피트 상공에서 태극기를 들고 뛰어내리는데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진행을 맡은 아나운서가 커다란 태극기를 들고 공중낙하하는 다이버들을 보라고 방송하고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던 그 때 생각하면 지금도 흥분됩니다.

 

그때 한국 특공대에서 낙하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이분들이 미사리에서 한국 특공대원들에게 낙하기술을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 염동영은 어릴 때부터 다니던 강남교회(사당동)에서 대학생 시절 학생부 성가대를 맡아 지휘자로 헌신했다     ©크리스찬리뷰

 

그는 한국에서 처음 시작된 ‘서울 에어쇼’에 호주 국가 홍보위원으로 참여해 호주 스카이 다이버들을 초청해 태극기를 들고 낙하하는 이벤트를 소개하기도 하고 호주의 곡예 비행팀을 초청해서 공중 곡예를 선보였다. 이 모든 것이 그가 20대 때 호주에 와서 공부하고 또 유학원을 하며 호주 항공정비학교 코스를 개발하면서 인맥을 쌓은 결과였다.

 

다시 호주로

 

그는 딸, 아들 남매를 두고 있다. 그는 자녀들에게 더 좋은 교육의 기회를 주고자 무엇보다 첫 째인 딸이 장래에 훌륭한 아나운서와 기자가 되고 싶다는 계획을 이룰 수 있도록 2008년 다시 호주로 들어왔다. 호주로 돌아온 그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지금하고 있는 냉동 수산물 수입 비지니스일을 배웠다.

 

딱히 호주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던 그로서는 자녀들을 키우고 생계를 유지하는데 지금 하고 있는 비즈니스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딸은 UNSW에서 미디어 언론 공부를 마친 후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가 그가 꿈꾸었던 언론인의 길을 걷고 있다. 딸은 호주에 있을 때도 한호일보, SBS에서 나름 기자생활을 했었고 지금은 한국에서 미디어관련 국가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다.

 

염 대표의 딸은 시드니에 거주할 때 학업과 파트타임 일들을 감당하면서도 교민사회의 의미있는 일들에 많이 참여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 실천 추진위원회(시소추) 회원으로 활동한 것이다. 딸이 먼저 시소추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염 대표도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다.

 

▲ 2016년 애쉬필드연합교회 뒷마당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빌 크루즈 목사가 소녀상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크리스찬리뷰

 

“실은 제 딸이 시소추 회원으로 먼저 활동을 했습니다. 물론 시소추에서 그동안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박은덕, 권기범, 강병조 씨는 제가 35년 전에 워터루에 있었던 갈릴리교회부터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기도회에서 만나 지금까지 알고 지내던 지인들이고요. 그래도 부모된 입장에서 좋은 일을 하고 있는 딸을 후원도 해주고 저 역시 의미있는 일이기 때문에 딸을 도와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그러다가 2016년 8월에 드디어 호주 시드니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알다시피 ‘소녀상’을 어느 곳에서도 선뜻 받아 주지 않았는데 감사하게도 애쉬필드연합교회의 빌 쿠르즈 목사님께서 자기 교회 마당에 세우자고 받아 주시는 바람에 지금까지 애쉬필드연합교회에 있게 된 것입니다.”

 

애쉬필드연합교회

 

호주로 다시 돌아온 염 대표의 가족은 시드니의 몇 교회들을 출석했지만 딱히 마음 둘 곳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6년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이 애쉬필연합교회(Ashfield Uniting Church)에 세워지자 그때부터 온가족이 애쉬필연합교회를 출석하며 봉사하고 있다.

 

▲ 시드니 한인회관에서 열린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 할머니와 이재명 성남시장 등이 참석, 시소     ©크리스찬리뷰

 

“제가 애쉬필드연합교회를 출석하게 된 것은 처음에는 ‘소녀상’이 걱정되어 관리차원에서 그리고 소녀상을 받아 주신 감사함에 부채의식에서 출석했지만 참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저희 가족 모두 좋아하고요.

 

제가 호주에 처음 왔던 1985년부터 따져보면 시드니의 제법 많은 교회들을 다녔습니다. 시드니순복음교회, 호주한인그리스도교회, 시드니한인연합교회, 시드니 새순교회 등 여러 교회에서 주일을 성수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심지어 성가대 지휘자로도 봉사를 했었습니다.

 

애쉬필드연합교회는 ‘평화의 소녀상’ 때문에 다니게 되었지만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배애우고 있습니다. 교회에 와 보시면 아시겠지만 애쉬필드연합교회는 늘 노숙자를 비롯해 몸이 불편하한 장애인들,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들과 함께 예배 드리는 이곳이 바로 마가의 다락방이고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일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노숙자들을 위해 식사를 제공하고 이런 사역을 하고 계신 빌 쿠르즈 목사님을 옆에서 돕고 봉사하며 교회의 참 사명을 배우고 있습니다.”

 

▲ 시소추는 매년 8월 세계 일본군‘위안부’기림일을 맞아 기념예배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행사들을 개최한다.     ©크리스찬리뷰

 

현재 애쉬필연합교회에는 염종영 대표 가족외에도 박은덕 씨 부부가 출석하고 있다. 이들은 매주 출석하며 ‘평화의 소녀상’을 관리하고 돌보고 있다. 그렇게 해야 할 것이 때때로 일본 단체에서 찾아와 ‘평화의 소녀상’을 혹시라도 훼손하거나 욕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 여러 차례 일본단체에서 빌 쿠르즈 목사에게 찾아와 심한 항의를 하거나 일종의 협박 비슷한 것을 늘어 놓는 경우도 많았다. 그 때마다 빌 쿠르즈 목사는 봉변을 당하면서도 소녀상을 지켜 주고 있다.

 

그리고 ‘소녀상’에는 새들 때문에 오물들이 쌓이거나 먼지로 더러워지는 경우도 많고 그럴 때마다 시소추 회원들과 돌아가면서 정기적으로 청소를 해주고 관리하고 있다.

 

시소추 가족

 

염종영 대표는 2017년부터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 실천 추진위원회 대표를 맡고 있다. 2017년에는 박은덕 씨와 공동대표로 시소추를 함께 섬겼다. 그리고 2018년부터 현재까지는 염종영 대표가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 실천 추진위원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작년 8월에는 ‘위안부 기림일’ 행사로 시드니 한국문화원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할머니들의 삶을 다룬 영화들을 상영하는 영화제가 열렸다. 두개의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하나는 한국, 중국, 필리핀의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할머니들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The Apology’였고 다른 하나는 네덜란드 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얀 루프 오헌(Jan Ruff-O’Herne)의 피해를 다룬 ‘Daily Bread’였다.

 

‘Daily Bread’는 실제 피해자인 얀 루프 오헌 할머니의 손녀딸이 감독한 영화였다. 이 영화제 행사에 염대표가족 모두가 참석해 돕고 있다. 특히 아들은 이 영화제 행사를 기획하고 사회까지 보는 등 시소추 일이라면 전 가족이 팔을 걷어 부치고 참여하는 열심을 보였다.

 

▲ 지난해 8월 기림의 날을 맞아 애쉬필드연합교회 소녀상 앞에서열린 문화행사에서 참가자들이 대동놀이를 즐기며 기림예배와 문화행사를 가졌다.     ©크리스찬리뷰

 

“제가 시소추 대표를 맡은 것은 처음부터 공헌도가 커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시소추 활동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어서도 아니고 저는 그냥 순수하게 저의 신앙생활을 이 교회에서 하게 되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소녀상 지킴이로서 이일에 열정을 쏟다 보니 나이도 있고 해서 주어진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는 4년째 시소추 대표를 맡아 활동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 모두 시소추의 적극적인 후원자이자 활동가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가족은 시소추 가족이다. 딸, 아들, 아내 할 것 없이 일본군 성노예 할머니들과 함께 아파하며 함께 슬픔을 나눌 줄 아는 할머니들의 진정한 가족인 것이다.

 

“제가 한 가지 안타까웠던 것은 많은 교민들의 관심속에 제막된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 행사장에 한인교회 목회자들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국가가 지켜주지 못해 유린당했던 소녀들의 인권을 성직자들이 앞장서서 추모하고 함께 울고 위로해 주어야 하는데 시드니 한인교회 성도들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소녀상’은 평화를 의미하는 상징물입니다. 사랑은 미움을 이기고 평화는 전쟁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다시는 전쟁으로 인해 인권이 유린당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소녀상’은 비종교적이고 비정치적이며 우리 민족이 겪었던 아픈 역사를 극복하려는 순수한 시민운동이자 평화운동입니다.

 

그리고 이 ‘소녀상’ 운동을 통하여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를 회복할 뿐 아니라 피해자들에게는 일본이 진정한 사과를 해야 합니다.”

 

격앙된 어조로 이야기하는 염대표의 얼굴이 약간은 상기되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말씀이 더욱 와 닿는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을 기리고 그들의 아픔에 함께 동참하며 다시는 전쟁의 비극이 이 땅에 있어서 안되는 평화의 상징물인 ‘소녀상’이 이 시드니에 세워져 있는 줄 모르는 성도들도 아마는 많을 것이다. 타지에서 여행 오는 많은 관광객 중 ‘시드니 소녀상’을 돌아보는 여행객도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자도 매년 위안부 할머니 기림절 행사 때마다 애쉬필드 유나이팅교회를 방문하곤 했다. 8월 첫째 주일에는 시드니 소녀상이 세워져 있는 애쉬필드연합교회를 방문해야 할 것 같다.

 

 

글/주경식|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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