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북한을 탈출한 태권도 사범
 
글/조슈아 보스카니 번역/정지수

 

ABC뉴스는 한국 전쟁 70주년을 맞아 아들레이드에서 태권도장(Lee’s Taekwon-do)을 운영하고 있는 6.25 피난민인 이춘봉 장로(아들레이드장로교회)를 인터뷰했다. 이에 ABC 뉴스 기사를 본지 영문편집위원인 정지수 목사가 번역하여 게재한다.<편집자>

 

▲ 이춘봉 사범. 태권도 9단인 그를 호주인들은 ‘마스터 리’라고 부른다.     © 크리스찬리뷰


거의 70년 전 한국 전쟁이 끝날 무렵, 당시 7세였던 이춘봉과 그의 가족은 북한 공산주의의 심장부였던 평양을 탈출하기 위해 목숨을 건 결정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아니 한국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는 그의 가족 일부를 이미 잃어버렸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아버지께서 사라지셨습니다. 가족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감옥으로 끌고 갔다"고 말했습니다.

 

이 씨의 가족은 북한의 수도인 평양에서 교회 관리를 돕는 장로교회 성도들이었다. 그들은 종교인으로 각인되어 현지 경찰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그들은 목사님이셨던 아버지와 다른 목사님들을 끌고 가기 시작했으며, 아버지와 다른 목사님들을 감옥에 투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죽였습니다."

 

"그들(북한 정부)은 '교회에 가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교회는 북한 정부의 말을 들어야 만 했습니다. 만약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는 곧 곤경에 처했을 것이고 감옥으로 끌려 갔을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1950년 10월에 유엔군이 북한으로 진격하여 평양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승리는 짧았다.

 

"그들은 모두 떠났다. 우리는 유엔 군인들을 보지 못했다. 다음 날 그들은 모두 사라졌다"고 말했다.

 

50만 명이 넘는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넘어왔고 유엔군은 38선 이남으로 후퇴를 하게 되었고, 결국 북한과 남한은 분리되었다.

 

이 씨의 어머니는 남은 가족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다른 북한 사람들도 함께 도망을 쳤다.

 

"너무 많은 물건을 포장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약간의 쌀과 약간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을 가로 질러 전쟁을 피해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 어머니 홍병숙 권사는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왼쪽 학생이 이춘봉 사범)    ©이춘봉   

 

유엔군은 평양을 대동강 남쪽과 연결된 교량을 파괴하여 남쪽으로 이동하는 중국군의 진격을 늦추었지만, 동시에 한국의 춥고 추운 겨울에 북한을 탈출하려는 수천 명의 절박한 탈북자의 발걸음을 늦추었다.

 

"(대동강)은 너무 깊고 얼음이 떠다녀서 강을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집사님들 중 한 분이 돈을 내고 보트를 타고 가족들과 함께 강을 건넜습니다.

 

이 씨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북한 남서 해안의 해주 지역으로 가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기다라는 동안 민주주의가 승리한 평양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했었다.

 

"우리는 그곳에 3-4 주 정도 머물렀습니다. 전쟁이 끝날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아침에 북한 군인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탈출했던 그곳에서 피 튀기는 전투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날 밤 큰 전쟁이 있었습니다. 도처에 제트기가 날아 다녔고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거리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이 씨와 그의 가족들은 남쪽으로 더 내려가야만 했는데 이미 피곤하고 많이 지쳐 있었다. 그들은 북한군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종종 밤에 들판과 산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만약 잡히면, 죽게 된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 씨와 그의 가족들은 결국 남한의 공주지역까지 무사히 내려왔다. 그의 어머니는 공주에서 교회를 세우고 피난민의 삶을 꾸려나갔다.

 

▲ 70대 중반을 넘겼지만 젊은이 못지 않은 체력을 과시하며 하루도 쉬지 않고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이춘봉 사범.     © 크리스찬리뷰

 

호주 전쟁 기념관에 따르면, 340명의 호주 군인들이 한국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고, 약 1천20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30명이 전쟁 포로가 되었다고 전했다.

 

이 전쟁은 약 2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이 씨 가족과 같은 많은 한국인들이 노숙자가 되거나 피난민이 되었다.

 

호주의 SA지부 참전용사회 존 자렛 (Jan Jarrett) 회장은 한국 전쟁에 참전한 1만 7천 명의 호주 군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53년부터 1954년까지 서울에서 일했다. 자렛은 자신이 전쟁의 최전선에 있지는 않았지만, 서울에 있는 동안 한국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거리에서 음식을 얻기 위해 자매를 파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불쌍했습니다."

 

아들레이드에 있는 그의 집에서 존 자렛 회장은 한국인들이 호주인들에게 "관대하며" 전쟁에 대한 그들의 희생에 대해 고마워한다고 말했다.

 

전쟁이 발생한지 70년이 지났지만, 호주 한국 전쟁 참전 용사들과 아들레이드 한국인 공동체는 일 년에 여러 번 만나 친밀한 우정을 나누고 있다.

 

아들레이드 한국인 공동체는 호주 한국 전쟁 참전 용사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과 연락을 주고 받고 있다.

 

자렛 회장은 호주 참전 용사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 사람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인들은 너무 친절히 우리를 대해 주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들을 위해 네 번의 여행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참전 용사들을 위해, 그들의 가족들을 위해, 실종된 사람들을 위해, 장애를 가지게 된 사람들을 위해 여행을 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모든 여행 경비를 지불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을 마치 신처럼 대해 주었고, 때로는 우리가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다른 국가들 중에 이렇게 참전 용사들 잘 대접해주는 국가는 없을 것입니다.”

 

남한과 북한은 1953년 7월 휴전 협정에 서명했지만, 아직도 평화 협정에 서명을 하지 않고 있다. 실질적으로 전투는 하고 있지 않지만 남한과 북한은 아직도 전쟁 중인 것이다.

 

▲ 호주 SA지부 참전용사회 존 자렛 회장.  ©Joshua Boscaini     

 

이 씨는 남한 군대에 입대해 병역의 의무를 마쳤고, 이후에 한양대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그는 태권도에 몰두했고, 1973년에 한국인 태권도 강사를 찾는 호주 대사관에 연이 닿아 호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같은 해, 그는 아들레이드 시내에 있는 하이드 스트리트 위치한 체육관에서 태권도 교육을 시작했고, 수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그를 찾아왔다.

 

현재 76세인 이 씨는 그의 모든 성공은 그의 어머니가 보여준 노력과 인내와 동정심에서 온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돈을 버시는데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다른 사람들을 돌보셨습니다. 우리는 어머니에게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그는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조슈아 보스카니(Joshua Boscaini) ABC 방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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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7/28 [15:45]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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