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 피와 땀의 열매들(3)

현장취재/호주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를 찾아서

글/김명동,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6/28 [15:43]
종교의 역사를 보면 박해가 극심해지고 희생자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믿는 이의 숫자가 더 많아진다.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니다. 언제나 쫓기는 생활,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서로 돕고 위로하고 인내로써 그 모든 고난을 이겨냈다면 분명 그들의 사랑 실천은 신앙이나 심성 하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 장애인 전문 사회복지법인 양지동산은 호주 선교사 노승배(Rev. Barry Rowe)와 신익균 장로에 의해 설립되어 신체장애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기술을 습득시켜 자립의 터전을 마련해 주고 있다.     ©양지동산
 
그렇다면 그들로 하여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자신만을 위하기보다는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게끔 만든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들의 신앙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바는 무엇일까? 이것이야말로 기자가 곳곳에 뚜렷하게 남아 있는 선교사들에 관한 발자취를 찾아갈 때마다 고뇌했던 대목이다.


당시의 상황은 기독교가 국가 정책상 사교로 단정되었기에 기독교를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고난이요, 죽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의 생활은 매일매일이 곧 순교였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을 믿고 구원의 기쁜 소식, 즉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확고하게 믿었기에 현실에서 박해와 시련이 닥치더라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랑 실천에 최선을 다한 셈이다. 자신을 희생하며 이웃을 위해 내 몸을 바칠 수 있는 애타 정신을 실천한 것이다.


▲ 경남성경학원 신학과정 수료 기념사진(왼쪽 둘째 줄 두번 째가 예원배 목사이며 한 사람 건너 네 번째가 교장 권임함 목사(Rev. F.W. Cunningham1926년)이다.     ©크리스찬리뷰 자료사진
 
'나만 살려고 하면 나도 죽을 수밖에 없으려니와 내가 죽어서 이웃을 살리려고 하면 그것이 곧 내가 사는 길이다'라는 예수님의 교훈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결국 우리가 신앙유산을 답사하는 것은 사랑의 삶을 실천한 현장을 둘러보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부산해운대교회 - 신사참배 반대 가결한 교회

부산시 해운대구 우1동에 위치한 해운대교회(최병일 목사)는 1937년에 설립된 이 지역 최초의 교회다. 호주장로선교회 예원배(Rev. A. C. Wright)목사는 1912년 한국에 입국해 1942년 강제 출국될 때까지 한국에서 30년 동안 선교사로 활동했다. 해운대교회는 25년간 부산과 경남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주의 사명을 다했던 예 선교사의 사역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교회이다. 또한 이 예배당은 신사참배 반대를 결의한 역사적인 곳이다. 일제시대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신앙의 보루로서 역할을 다했다.


▲ 예원배 목사(Rev. Albert C. Wright)와 제인 매카그(Jane McCague) 사모가 교회설립 당시 예배당 입구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크리스찬리뷰 자료사진
 
일제 말기 일본은 신사참배를 강요해 한국 교계에 커다란 박해를 가했다. 그들은 신사참배가 종교적 행위가 아니고 국민의례일 뿐이라고 호도했지만 기독교계는 강력히 반발했다. 이로 인해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등 많은 기독교계 학교가 폐교됐다. 수많은 목회자가 감옥에 갇혔으며 순교했다. 그러나 일제 만행에 대한 대응과 접근이 조금씩 달라서 광복 후 교단 분열의 씨앗이 됐다.


1938년 6월 해운대교회에서는 제41회 경남노회(노회장 최상림 목사)가 개최됐다. 이 노회는 같은 해 9월 평양에서 열기로 한 제27회 한국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기 위한 부산·경남지방의 준비모임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일제 경찰 당국은 해운대교회에서 개최하는 노회에서 안건을 상정하지 않고 그냥 넘기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을 해둔 상태였다. 그러나 노회 도중 신사참배 문제가 거론됐다. 노회는 당연히 신사참배 반대를 가결했다. 전국의 다른 모든 노회에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동의한 사안에 대해 경남노회에서 유일하게 반대를 선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예원배 목사기념교회당으로 세워진 최초의 해운대교회(1937년)     ©크리스찬리뷰 자료사진
 
시련과 핍박이 이어졌다. 해운대교회에서는 1943년 8월 둘째 주일 오전 예배를 드리고 난 후 일본 경찰이 구재화 조사 및 교회 직원을 구속함으로써 예배가 중지됐다. 이와 함께 교회에 보관 중이던 모든 책과 서류를 형사들이 압수해 갔다. 몇 달 후 일부 서류는 반환되었지만 제41회 노회록을 비롯한 서류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그해 12월 겨울철인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피란민이 해운대 지역으로 몰려왔다. 그해 유난히 추운 겨울을 가리켜 지역 주민들은    "북쪽 지역 피란민들이 추위를 몰고 왔다"며 비난하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해운대교회 성도들은 공터에 움막을 지어 피란민들을 보살폈다.

해운대교회 뒤편에는 국립기계고등학교가 설립됐다. 한국과 독일의 60년대 경제 협력에 의한 한독실업전문학원의 후신으로 근대화 기치를 내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산업입국 비전으로 세운 학교였다. 학비 면제와 기숙사를 제공했기 때문에 영남지방의 가난한 집안의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고향을 떠나온 많은 학생들이 학교 후문에 위치한 해운대교회에 출석했다. 주일 예배 때 예배당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 현재의 해운대교회와 금년 2월에 완공한 예원배 선교사 기념관     ©크리스찬리뷰
 
1975년 2월에는 예장합동 총회장을 지낸 장차남 목사가 해운대교회 12대 담임으로 부임했다. 장 목사는 개척교회 전도사로부터 출발하여 교육전도사 강도사 부목사의 목회생활 16년을 마감하고, 단독 담임목사로 목회를 시작한 첫 교회였다.


서울 세광교회의 담임을 맡고 있던 최병일 목사(53)가 해운대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것은 2003년 3월이었다. 최 목사가 부임하기 전 해운대교회는 70여 년을 지켜온 저녁예배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다. 최 목사는 변화하는 시대의 생활환경에 맞추고 효과적인 성도 훈련을 위해 저녁예배를 오후 3시로 변경했다. 점심식사 후 오후예배까지 남는 시간을 성도들의 훈련과 교제시간으로 활용했다.

기초성경공부반,  QT반, 수지침교육으로 시작된 오후 소그룹 모임은 점차 활성화됐다. 현재는 QT반, 성경읽기반, 성경암송반, 제자훈련반, 오카리나반 등 8개 반으로 확대 운영되고 있다.


▲ 해운대교회 담임 최병일 목사, 강달원 장로, 송정우 장로(오른쪽부터)     ©크리스찬리뷰
 
2004년 장학위원회를 발족했다. 해마다 봄 가을로 전교인 특별장학헌금으로 기금을 마련하고 있다. 장학금은 일 년에 두 번 중·고등학생·대학생을 대상으로 구분해 지원하고 있다. 2006년 1월에는 교회 내 이동식 도서관이 설립됐다. 매 주일 현관 앞 간이 탁자에 화제의 책과 교역자의 추천 책들을 나열해 놓고 누구나 자유롭게 대출할 수 있도록 해서 성도들에게 영혼의 양식을 퍼주고 있다. 성탄절 전야에 '사랑의 쌀 나누기'행사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매년 동사무소와 협력해 어려운 가정에 김장김치, 쌀과 현금을 전하고 있다. 매주 목요일에는 경로대학을 열어 지역 어르신들을 섬기고 있고, 한 달에 한 번 노인과 노숙자들에게 무료급식을 하고 있다.


최병일 목사는 "선교사의 아름다운 선교정신을 이어받아서 선교하는데 주력하고 있다"면서 "1,000명 성도, 100명 선교사 후원, 100가정 구제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운대교회는 2010년 2월 예원배 선교사의 선교업적을 기리기 위한 예원배 선교사 기념관을 개관했다. 송정우 장로(59)는 "처음 교회를 설립할 때의 취지를 살려 예원배 선교사 기념관으로 명명했다"며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건립된 이 기념관이 앞으로 교육적 사명을 감당하는 일 뿐만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필요를 채우고 기독교 역사전시관으로서의 기능도 감당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예원배 선교사는 뉴질랜드 출신으로 호주 빅토리아주 장로교회 선교부에서 파송되어 1912년 한국에 도착했다. 30년간 주로 농촌을 중심으로 전도했는데 때로는 나병환자수용소교회, 부산진교회, 동래읍교회 등에서도 협동목사로 봉사했다. 신사참배강요를 반대하고 한국교회를 적극 지원했던 예 선교사는 결국 1942년 일제에 의해 추방당했다. 호주로 귀국한 후 농촌교회 목회와 아보리진족(호주 원주민) 선교지에 가서 봉사했던 그는 1971년 7월 7일 91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강달원 장로(88)는 "예원배 선교사님은 매우 겸손한 분이셨다"면서 "기도할 때 한국말이 서툴러 '거룩하신 하나님'을 말이 잘 안되니까 '껄룩 껄룩하신 하나님 감사하옵나이다'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최병일 목사는 "처음 예원배 선교사님이 우리 선진들에게 뿌린 복음의 씨앗은 겨자씨와 같았다"면서 "그러나 73년이란 세월을 지내며 그것은 커다란 나무가 되었고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다"고 말했다.

"세상에서 지치고 쓰러졌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주님을 만나 회복되었습니다. 헌신된 주의 종들이 세워졌습니다. 교회 자립은 물론 세계 선교를 감당하는 교회로 성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역사 가운데 해운대교회를 높이 들어 사용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오늘  우리는 목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도 선교사님의 흔적을 잘 보전하고 관리해서 그분의 선교정신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겠습니다."

 
장애인 전문 사회복지법인  양지동산

                                       
한국교회의 신앙유산은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먼저 기독교가 한국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이는 초기에 외국 선교단체가 교회 설립이라는 적극적인 의미의 활동보다는 조선 정부의 태도와 사회의 보수적인 분위기 때문에 학교와 병원을 통한 간접선교 방식을 취했던 데서 비롯되었다.



▲ 서두화 목사(Rev. Alan Stuart)와 문의덕(Rita Stuart) 사모     ©크리스찬리뷰
 
호주선교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호주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장애자나 소외된 사람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첫 여성 선교사들이 소녀 고아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길러 장래를 열어주었다. 학교를 세우고 백정 해방을 주도했으며 나병환자 수용소를 세우고 병원을 세워 예수 사랑을 전하는 일에 생명을 바쳤다. 1930년대에는 이혼 당한 여성들과 버림받은 소녀들을 위해 여자농업학원을 세워 자활하도록 했다. 1960년대에는 재활원을 세워 많은 장애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1965년부터 지금까지 산업선교회에서 근로자 선교를 해왔다


우리 일행은 직접 가서 보면 인생관이 변한다는 장애인전문 사회복지법인 양지동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연제구 거제2동에 위치한 양지동산은 1968년 11월 5일 호주 선교사 노승배 목사(Rev. Barry Rowe)와 현 이사장인 신익균 장로(75)에 의해 설립되어 신체장애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기술을 습득시켜 자립의 터전을 마련해 주고 있다. 양지직업훈련원, 양지직업재활원 및 부산곰두리스포츠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는데 곰두리스포츠센터는 장애인의 재활과 체력단련 등을 주목적으로 총 50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지하1층 지상 4층 규모로 지난 1999년 6월 개관했다.


▲ 양지훈련재활원 본관 건물 전경     ©크리스찬리뷰
 
양지동산은 개원 이래 2,075명의 졸업생 중 개업한 사람이 648명 취업자가 921명 기타 50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처음엔 편물과로 출범했다. 지금은 전자과, 귀금속 공예과, 시계 및 인장과, 열쇠과로 80여  명의 학생이 훈련을 받고 있는데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기능경기대회에서 금상 151명 은상 114명 동상 75명 장려상 36명 등 총 376명이 입상했다.


신익균 장로는 "그동안 수많은 장애인들이 기술을 습득하여 떳떳한 사회의 일꾼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국내외에서 후원해주신 많은 분들의 덕분이다."라고 말하고 "무엇보다도 감사하고 기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 양지동산 대표이사 신익균 장로.     ©크리스찬리뷰

신익균 장로는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산 창신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하나님을 만났고 문창교회에 다니게 되면서 호주선교사 서두화 목사(Rev. Alan Stuart)를 만났다.

"제가 성악을 잘했어요. 서두화 목사님이 문창교회를 가끔 방문하셨는데 교회에서 독창하는 제 모습을 보셨나 봐요. 그때부터 저에게 관심을 보이시면서 신앙상담도  해주시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시고 대학교 입학하면서는 장학금을 마련해 주시고요. 대학교 다닐 때는 호주 선교회에서 일할 수 있도록  주선도 해주셨어요. 그곳에서 풀도 뽑고 유리창도 닦고 화장실 청소도 하고 그 때부터 서 목사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죠. 그런 후 대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치면서 양아버지를 만났는데 ‘울산으로 가서 직업을 가지면 어떠냐?’ 그러셔요. 당시 양아버지는 울산공단에서 산업선교를 시작하셨거든요."


▲ 양지훈련원생들과 함께한 서두화 목사 내외와 신익균 원장 (왼쪽)     ©양지동산
 
신 장로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살겠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그가 그런 꿈을 꾼 것은 하나님이 자그만 겨자씨 하나를 그의 가슴 속에 심어주셨기 때문이 아닐까? 나라 전체가 먹고 사는 일에 매달리는 시절, 신 장로는 울산공단에서 소외계층의 장애인들과 만난 것이다.


"그들을 차마 모른 체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방안에 갇혀서 온종일을 보내는 장애인들, 당장 수술이 필요한 데도 돈이 없어 시름시름 죽어가는 장애인들, 사회에 나가 병신 소릴 들으며 때로는 폭행을 당하는가 하면 불구라고 일을 할 수가 없었죠. 학교도 물론 입학할 수도 없었고요. 학교에서 거부했죠.'"

신 장로는 기어코 일을 내고야 말았다.

"울산 신정동에 있는 작은 저의 집에서 호주 선교사 노승배 목사님과 함께 '양지불구자기술원'을 설립했습니다. 당시 노 목사님은 울산공단에서 산업선교를 하고 계셨고 제가 어렸을 때 마산에서 만난 선교사님이에요. 처음에는 편물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소아마비나 척추결핵으로 육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었죠."
 

▲ 신 장로와 함께 양지동산을 세운 호주 선교사 노승배 목사(Rev. Barry Rowe)     ©크리스찬리뷰 자료사진

신 장로는 장애자를 인간답게 살게 하는 길은 뭐니뭐니해도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주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노 목사님과 사모님 조앤(Joan), 그리고 제 아내(김명숙)가 합류하면서 프로그램이 늘어났습니다. 그들은 기술만 배운 게 아니었습니다. 자존심도 배우고 독립성과 신뢰성을 배웠죠.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훈련생의 대부분은 직업을 구하거나 작은 전파상을 차렸고 경제적으로 자립을 하게 됐죠."

신 장로는 장애인들을 위해 넝마주이도 했다고 했다. 경찰서에 불려간 것은 수도 없다고 말했다.

"제 집은 비가 오면 지붕이 새는 집이었어요. 겨울엔 난방장치도 제대로 안되어 혹독한 추위를 이겨야 했고요. 노승배 목사님과 사모님의 기도하는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신 장로는 초창기 양지재활원을 떠올리며 만감이 교차하는 모습이었다.

노승배 목사는 1965년 7월 아내 조앤과 두 딸 쉐린(Sherrin)과 안드레아(Andrea)와 함께 한국에 도착했다. 두 딸 헤더(Heather)와 지닌(Jeanine)은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한 후 가족을 데리고 새로운 산업단지 울산으로 가 산업선교에 힘썼다. 그들은 1977년 호주로 귀국해 말리(Mallee)의 레드 클리프에서 포도밭과 과수원에서 일하면서 지역교회를 섬기고 있다.

서두화 목사는 1957년 12월 부인 문의덕(Mrs. Rita Stuart)과 함께 한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마산에 본거지를 두고 시골교회를 순회하면서 경남 성경학원에서 가르치는 일을 했다. 1960년 말경 부산으로 이주하여 부산신학교와 고등성경학원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노회의 모든 교회를 순회하였다. 협력목사로  부산진교회를 섬기기도 했지만 주로 신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교회의 기독교교육 프로그램을 위해 시청각 기재를 개발하는데 힘쓰기도 했던 그는 1964년 부산신학교 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나환자 요양소에서 가르치고 예배를 인도하는 일에 점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1968년 말에 호주로 귀국한 그는  1973년 한국인 교민들과 함께 멜본한인교회를 설립했는데 이 교회가  호주에서 최초로 세워진 한인교회이다. 그는 1975년 말까지 이 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겼다. 서두화 목사 부부는 2001년 은퇴하여 뉴캐슬에 머물고 있다.

신 장로는 "장애인을 보는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사람은 장애인이든 아니든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입니다. 그러니까 그 인격을 하나님이 아닌 그 누구도 훼손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그들을 대하고 바라보는 사회의 편견 때문에 가슴이 아픕니다."

기자를 바라보는 신 장로의 눈빛은 너무나도 맑고 신비스러웠다. 저것이 평화라는 것일까?

- 남을 위해 산다는 것, 희생이란 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어려운 듯합니다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희생을 감당할 수 있고 거기에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 길밖에 모르는 사람이라서 한 번도 싫증을 느껴본 적이 없지만 글쎄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어요."

기자는 얼굴을 쳐들고 마주서기 어려운 부끄러움을 느꼈다.

 
지체장애인 제정복 집사

사하구 신평2동 시장에서 정복당(금·은·시계전문)을 운영하는 제정복 집사(54. 신평로교회)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그래서 지금도 양쪽다리가 불편하다.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난 그는 편모에 7남매로 어려운 가정이었다.  학교에 갈 수가 없어서 형이 배우고 난 헌책으로 글을 배웠다. 사람들의 시선에 밖에 나가지 못하고 하루 종일 혼자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야 했다. 답답했다.
 
▲ 17살에 양지재활원에 들어가 시계기술을 배워 자립한 제정복 집사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그는 양지재활원에서 예수를 영접했고, 목사님의 중매로 여전도사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크리스찬리뷰


그러나 그보다 더 답답해 한 것은 어머니였다. "니가 나가서 무슨 짓을 하던 내가 다 책임질 테니 제발 나가서 사고라도 좀 치라"고 했다. 어머니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죽지 않고 살려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알아야 했다. 조그만 라디오가 있었는데 라디오가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세상과 통하는 통로였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양지재활원 이야기를 하면서 숙식을 제공하고 기술도 가르치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집 밖을 나갈 결심을 하고 양지재활원에 전화를 했다. 시계과에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17살이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신익균 원장님과 호주에서 오신 노승배 선교사님을 만났지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열심히 기술을 배웠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교회청년회에서 위문공연을 왔어요. 양지원생들이 빙 둘러앉고 그 사이사이에 청년회 남녀들이 같이 앉아서 게임도 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함께 놀았지요.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호주 선교사님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모두 가족처럼 지냈지요."

그는 양지에서 나와 작은 시계방을 차렸다. 신용을 장사 모토로 삼았다. 병신이 아니고 인간임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장사는 번창했다. 그러나 주일날은 꼭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다.
 
 
▲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한 제정복 집사와 아내 이강옥 전도사는 결혼 후 삶의 터전을 지금의 가게 방에다 차렸다.     ©크리스찬리뷰


"다리가 불편하니까 목사님이 집까지 태워다 주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이 한 여전도사님을  배필로 소개해 주시는 겁니다.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더라고요. 난 장애인인데 실망하지나 않을까 상당히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아내가 나를 만난 후 하나님이 허락한 사람으로 알고 결혼하겠다는 겁니다.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했어요."

결혼 뒤 두 사람은 지금의 가게를 얻어 옮기고 신혼살림도 아예 가게 방에다 차렸다. 품목도 늘려 시계수리는 물론 도장도 파주고 금·은 등 귀금속도 취급했다. 가게는 날로 번창했고 두 아이까지 낳았다.
 
▲ 제정복 집사는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시계수리를 겸한 금은 보석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제정복 집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말하고 "양지동산 신익균 장로님은 참으로 귀한 분이다. 그 분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겠느냐, 이렇게 좋은 아내를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느냐"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내 이강옥 전도사(54)와의 사이에 제민(18)과 성민(17)을 두고 있는 그의  바람은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해서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장애인으로 사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가난이 더 힘들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을 해봅니다. 전 예수 믿고 주변에 좋은 분들을 만나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아직도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밖으로 나와 밝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정부에서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

제정복 집사는 헤어지면서 한 마디를 보탰다.

"잠시 쉬어가는 세상인데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자는 이 천국의 풍경에 감동되어 가슴이 미어터질 것만 같았다.

 
정관 신도시에 자리 잡은 상애교회 - 창대교회로 개명

가족에게 버림받고 마을에서 쫓겨나 돌팔매를 맞으며 구걸로 연명하던 상애원 한센인들이 용두동 시대를 마감하고 정관 신도시 품에 안겼다. 피고름진 눈물의 움막으로 시작한 상애원은 이제 아카시아 향기와 맑은 샘물이 흐른다. 성한 사회가 애써 등지려 했던 이 마을 입구까지 이제 아파트들이 스스럼없이 들어서고 있다. 이상붕 목사 가족과 함께 63세대가 함께 살고 있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면 용수리 산 언덕 낙원대 실버타운 정문으로 들어서며 기자는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구석구석까지 단장되어 있는 아스팔트와 보도 블럭, 정자 주위로  정돈된 벤치, 연못, 어느 하나 무심히 심지 않은 듯 잘 조림되어있는 나무들 하며, 정말 정갈하게 꾸몄다.
 
▲ 매견시 목사(Rev. James N. Mackenzie) 목회 20주년 기념비석 제막 기념 (1930년)     ©크리스찬리뷰 자료사진

▲ 매견시 목사     ©크리스찬리뷰 자료사진

 
"한마디로 기적이지요. 63세대 밖에 되지 않는 저희들이 어떻게 대지 3천 31평 위에  1천 800평의 건물을 지을 수가 있었겠어요?"

창대교회의 역사는 1909년 10월 영국 구라선교회가 상애원을 창설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지금의 부산광역시 감만동 지역에 자리잡은 상애원은 한센인들을 돌보기 위한 병원 내에 한센인 복음화를 위해 상애원교회를 설립했다. 오늘의 창대교회는 당시의 상애원교회가 모체로 지금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 1909년 10월 영국 구라선교회가 세운 상애원은 한센인 복음화를 위해 상애교회를 창립했으며, 1911년 호주 선교사 매견시 목사가 상애원을 인수, 선교사업에 치중했다. 용호동에 자리잡았던 상애교회는 지역개발로 인해 정관 도시로 이전, 2004년 4월에 창대교회로 교회명을 개명하고 입당예배를 드렸다.     ©크리스찬리뷰

당시 상애원의 사역과 정신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뿌리에는 당시 사회에서 소외받고 있던 한센인들의 삶과 영혼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상애원의 사역은 한센인들의 삶의 전반적인 영역을 책임졌다. 무상치료를 제공했으며 이들의 의식주 문제를 책임졌다. 시대적 상황을 감안했을 때 상애원의 사역은 사회적으로 혁명적이었다. 이러한 상애원의 정신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만연한 우리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이주하기 전 상애교회에서 바라 본 부산의 명물 오륙도와 한센인들이 살았던 용호마을 전경(맨 위 사진 2000년). 개발된 지금은 하늘을 찌르는 고층 아파트가 세워져 아파트 건물 사이로 오륙도가 조금 보일 뿐이다.                ©크리스찬리뷰

이와 함께 상애원은 육체를 치료하는 것만이 아니라 한센인들의 영혼구원에 주력했다. 특히 호주 장로교 선교사인 매견시 목사(Rev. J. Noble Mackenzie)가 1911년 상애원을 인수하며 선교사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매 목사는 상애원 인수를 시작으로 열정어린 선교활동과 복음전도로 말미암아 당시 상애원교회에는 약 650여 명의 성도들이 상애원교회에 출석했다.

특히 1992년에는 사랑의 원자탄으로 알려진 손양원 목사가 전도사로 부임, 한센인을 돌보는 사역에 동참하기도 했다.


▲ 정관 신도시로 이전한 ‘창대교회’ 전경과 예배실 및 휴게실. 창대교회는 지난 해 10월 9일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크리스찬리뷰

하지만 상애원 사역에도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 바로 전쟁이었다. 세상 가운데 사랑과 헌신의 본이 됐던 상애원도 어지러운 시대상황을 피해가지 못했다. 상애원은 1941년 미일전쟁으로 폐쇄되는 위기에 처했다. 당시 일본의 속국이었던 우리나라는 힘이 없었다. 일본은 적국인 미국, 영국, 호주 등의 사업기관을 국내에 허락할 수 없다며 상애원에 이전 명령을 내렸다. 이에 상애원은 이전할 대지를 물색했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강제 철거를 눈앞에 두게 된다. 이후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갈 곳 없는 성도들은  결국 총독부의 강제 이송명령에 따라 소록도로 이송됐으며 상애원은 강제 철거됐다.


이후 교회가 다시 재건되기까지는 4년의 시간이 걸렸다. 1945년 예장통합 경남노회의 지원으로 박애원교회로 재건되긴 했으나 상애원교회로 복명하게 된 것은 1946년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내부적인 어려움도 있었다. 교회가 나뉘었으며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온 제어할 수 없는 정치의 힘 아래 성도들이 상처를 입기도 했다. 하지만 어려운 가운데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교회는 천천히 다시금 원래의 위치를 찾아갔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교회는 1964년 아동시설 새빛기독보육원을 설립했다. 부모와 함께 살지 못하는 아이들을 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교회는 또 다시 이전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용호농장 개발계획이었다. 새롭게 닥친 교회의 어려움 앞에 성도들은 한마음으로 기도했고 결국 현재 교회가 위치한 정관 신도시에 터를 마련할 수 있었다.


▲ 창대교회 담임 이상붕 목사(왼쪽)와 이성곤 장로. 이 장로는 지난 2000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호주 선교사들이 나환자들에게 베풀었던 사랑을 회고하며 줄곧 눈물을 감추지 못했었다.  그는 2001년 8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크리스찬리뷰

이주 당시 성도들은 자신이 받은 이주 보상비의 십일조를 바쳤다. 또한 여기에 그동안 하늘로 돌아간 성도들의 유언으로 남긴 유산헌금들이 함께 더해졌다. 이렇게 성도들의 십일조와 유산, 교회건물 보상비로 정관면에 3천 31평 규모의 대지를 구입했다. 2003년 착공에 들어가 2004년 4월 입당예배를 드렸다. 특히 교회를 건축하면서 낙원대 실버타운도 함께 지었다. 부지비용 19억 2천5백만 원, 공사비 50억 9천만 원 등 총 73억 원의 비용을 들여 내부에는 원룸 45개, 찜질방, 세미나실, 식당, 친교실, 사택, 실버타운(65실)이 있으며 마치 전원교회와 같은 아름다운 교회당을 건축했다.


이상붕 목사는 "원래는 120세대가 올 것으로 예상하고 6층 건물로 허가를 냈다"면서 "교회 빚은 없다"고 말했다.

"사실 우리가 이곳에 땅을 구입하고 건물을 짓는데 일 년 동안 보안을 유지하면서 몰래몰래 지었습니다."

- 왜요?

"한센인이 온다고 하면 집단 민원이 발생할 수 있거든요. 그렇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밀리에 공사를 하고 이주한 겁니다. 시설은 노인시설 허가를 받아 지었어요. 노인시설이라는 것은 소방시설이 잘되어 있어야 하고 발전시설도 해야 하고 엘리베이터 시설도 갖춰야 됩니다. 우리 어른들은 예배당 오실 때 휠체어를 타고 오실 수 있는 시설도 만들었고요, 새벽예배부터 모든 예배 실황을 가정에서 텔레비전으로 시청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성곤 장로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2001년 89세로 돌아가셨습니다. 한센인들 중에는 제일 먼저 장로 되신 분입니다. 철저히 기도와 말씀으로 사신 분이셨지요. 새벽 3시부터 교회에 나와 기도하시고 7시 되면 집에 돌아가셔서 아침 잡수시고 내외분이 가정예배 드리고 성경 보시다가 점심 잡수시고 오후 4시만 되면 어김없이 예배당에 오셔서 기도 하셨습니다. 성경도 거의 외우십니다. 참 겸손한 분이셨습니다."

이상붕 목사는 "그야말로 출애굽하여 가나안 복지로 향한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인도해 주셨다. 이제 정관신도시에 먼저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미리 준비하고 예비하여 130만 평 10만 명의 정관신도시에 복음화의 주역이 되어 크게 부흥하는 교회가 될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또한 이 목사는 "건설되고 있는 정관신도시를 바라보면서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있다. 영혼구원과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창대교회의 미래를 위해 기도로 동참해 달라"고 말했다.

국무총리실 한센인 비애사건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으로도 위촉되어 봉사하고 있는 이 목사는 "한센인에 대한 피해보상과 복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창대교회에서 국내 17곳 선교단체를 지원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동남아, 세계의 한센인들에게도 선교를 계속 해오고 있는데 100명의 선교사를 보내는 꿈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야 우리가 받은 은혜를 갚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목회자이든, 욕심으로 가득찬 사람이든, 좌절에 빠져 생의 의미를 잃은 사람이든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은 낙원대의 신앙과 가르침에 저도 모르게 동화된다. 낙원대에서는 모두가 성직자이다.

 
부산을 떠나며

우리 일행은 한센인들이 살았던 용호농장(용호동)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어떻게 변했을까? 상애교회가 있던 터는 남아있을까? 1930년 5월 영국 구라선교회에서 상애교회 입구에 세운 '대영 나병자구라회' 기념비는 이사하면서 잘 챙겼을까? 모든 것이 궁금했다. 용호농장에는 창대교회 서정웅 전도사(47)가 동행해 주었다. 2007년 12월 창대교회에 부임했다는 서 전도사는 낙원대에 와서 사랑의 고귀함을 배웠다 한다.

용호농장하면 나환자들의 바스라진 삶이 떠올라 순간 움츠러 든다. 사회의 집단적 편견이 만든 반사신경은 이렇게 무섭다. 그들은 멸시를 견디며 사회의 바깥, 자기들만의 고립된 공동체 안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나 용호농장은 이제 사라지고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대신 그곳을 차지한 것은 하늘을 찌르는 고층 아파트의 위용, 아파트는 아카시아보다 번식력이 강하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천혜의 기암절벽을 갖춘 바다 쪽은 눈물 같은 절경이다. 부산의 상징 오륙도가 눈앞에 있고, 창연한 바다가 부신 햇살을 부비며 잔잔하게 반짝인다. 이 어울리지 않는 두 풍경의 극명한 대비 사이로 용호농장의 기억이 숨어 있다.

지난 세월의 흔적을 미세하나마 느낄 수 있을까? 아파트단지 옆 중앙으로 난 옛길을 더듬어 내려가 봤지만 용호농장은 한 시대를 살다 퇴출당할 우리들의 자화상 같았다.

용호농장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남천동 천주교부산교구를 찾았다. 호주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를 찾아 답사하는 사람이 웬 천주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잘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 천주교회사는 곧 순교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순교한 천주교 신자가 무려 1만여 명에 달한다. 그러니까 과연 천주교회에서는 신앙 유적지를 어떻게 관리하고 보존할까, 궁금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7세기 초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 문물과 서적들을 접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이로 인해 1784년에 교회가 세워졌는데 성직자는 한 사람도 없었고 이승훈, 정약전. 약종. 약용 삼형제 등이 성직자 일을 대신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성직자가 탄생한 것은 1845년이었고, 그가 김대건 신부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부산지방에 포교를 제일 먼저 담당한 신부는 1889년 입국한 조조 신부(Moyse Jozeau 한국명, 조득하)이고, 이후 1890년 부산진 본당이 설립되었다. 조조 신부는 1894년 서울로 가던 중 청일전쟁 당시 충청도에 주둔하고 있던 청병에 의해 희생되었다.

천주교 부산교구 총대리 이영묵(61) 몬시뇰을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몬시뇰'은 '나의 주인'이란 뜻의 이탈리아어로 오랜 성직생활로 교회에 공이 크고 덕망이 높은 성직자에게 교황이 부여하는 칭호다. 이영묵 몬사뇰은 1976년 사제 서품 이후 부산교구 12개 성당에서 사목을 하고 카톨릭센터 관장, 부산 평화방송 사장을 지낸데 이어 2008년 1월부터 천주교 부산교구 총대리로 활동하고 있다.
 
 
▲ 천주교 부산교구 총대리 이영묵 안드레아 신부는 교황 베네딕토 16세로부터 지난 20 08년 5월 몬시뇰로 서임받았다.     ©크리스찬리뷰


부산지역에 있는 천주교 신앙유적지를 소개해 달라고 하자, 그는 대뜸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을 소개했다.

부산 오륜대에 자리 잡은 한국순교자박물관은 천주교 박해역사를 한눈에 관람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전시실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에는 천주교 박해사 자료 및 순교자 유물을, 2층에는 교회사 자료, 조선말기 궁중유물, 교회행사 등의 자료를, 3층에는 민속품을 전시하고 특별 전시코너도 마련했다. 중앙에는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고안된 대들보 사형틀이 당시의 참혹한 광경을 연상케 해주고, 죄인을 참수할 때 사용한 칼, 태형대, 수십 종의 곤장 등이 형구 코너를 채우고 있다.

김대건 신부의 유물 중에는 무덤에 덮였던 횡대와 친필 서간 등이 있고 정약용의 십자가도 있다. 마치 맷돌같이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는 돌 형구는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인들이의 학살로 민심이 동요되자 정치적으로 불안을 느낀 홍선 대원군이 소리 없이 죽이는 기계를 만들라는 명에 의해 고안된 것이다. 수많은 교인들이 목에 밧줄이 매인 채 구멍을 통해 반대편에서 잡아당기는 우악스런 손길에 의해 목숨을 빼앗겼다.

특강하는 이영묵 몬시뇰의 표정은 밝았고 그를 만난 것은 부산 답사의 특별보너스였다. (계속)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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