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하게 분별하는 신앙

서을식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0/12/29 [15:30]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히브리서 1:1-2)

 

오늘 나의 글에 내가 입힌 색은 빨강이다. 논쟁거리는 피하고 싶지만,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믿음의 길에서 방황하는 한 영혼이라도 옳은 길로 돌이키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빈약하고 편향된 신앙관을 지닌 채, 자신의 체험을 믿는 믿음의 은사(?)만 유난히 돋보이는 사람이 있다. 영적 전투라는 당위성으로 보호막을 치고, ‘하나님의 음성 듣기’부터 시작한다. 크고 작은 위험을 내재한 여러 현상, 즉 웃음(기쁨), 몸 떨림, 변성, 넘어짐, 최면, 입신, 방언, 신유, 환청, 영서, 금니, 금가루, 치유, 축사(귀신 축출), 천국 체험, 은사와 영 분별 등을 비정형적으로 섭렵한다.

 

급기야 맛이 간 사적 직통 계시까지 주장한다. 이는 자기 중심성, 과시적 성향으로 영적 우월을 추구하는 편집 성향의 사람이 쉽게 빠지는 위험한 신앙의 현상들이다. 현상이 본질은 아니다. 본질이 아닌 현상을 굳이 추구할 가치는 없다. 왜 이리도 다양한 예수 폐인이 끊이지 않을까?

 

확신과 믿음은 다르다. 예상, 예측, 예언, 예단, 환상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 인도, 계시가 아니다. 생각이 쏠리고 마음이 가는 상상에서 나온 확신일 뿐, 처음부터 성경적 믿음의 내용이 될 가치가 없다.

 

어떤 사안에 대해 반복적으로 기도, 묵상, 고백하는 자기최면이 확신으로 굳어져,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을 수는 있으나,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

 

오히려 악한 영의 활동일 개연성을 열어 두고 말씀으로 점검해야 한다. 성경적 신앙과 생활의 정립된 원리를 벗어난 하나님의 뜻은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는 궁극적 신비로 남아있다. 우리가 매사에 차분하게 잘 분별하고 판단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다. 하나님의 뜻을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로 사용하지 말자.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다. 성경과 성령은 갈등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대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지나간 때가 있다. 옛 조상에게는 그렇게 하셨을지라도, 시대가 달라지며 계시의 방편도 달라졌다. 마지막 날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계시는 성경으로 완성됐다. 진리의 성령께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밝혀 진리이신 아들 예수께서 이끈다. 그 옛날에도 예언은 특정 사건에 대해 예언자라는 특별한 사람을 통해 계시로 주어졌고, 한 치의 오차나 오류도 없이 정확히 시행됐다.

 

애매모호한 말로 낚시질하지 말자. 확률에 근거하여 맞으면 좋고, 틀리면 말고 하는 무책임한 ‘예언 아닌 예언’으로 개인이나 크리스천 공동체가 치르는 값이 크다. 성경은 감정적, 주관적, 신비주의적 신앙을 권장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는 점쟁이, 마술사,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를 용납해서는 안된다(신명기 18: 10, 11).

 

나쁜 열매는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영적으로 자신이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어리고 연약한 자들에게는 다른 차원이 존재하는 착시를 일으킨다. 자신을 존경과 대접받는 자리로 끌어올리는 욕망의 유혹에 빠진다.

 

‘하나님의 뜻과 지시’를 앞세워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순종을 요구하는 독단적인 사람이 된다. 불을 보듯 뻔하게, 이 구조는 영적 학대로 발전한다.

 

차차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게 되고, 거리낌 없이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감람나무, 사도, 보혜사 성령, 재림주 등을 참칭한다. 사회의 상식과 도덕적 규범을 초월하여 사회적인 물의와 손가락질로 귀결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15-23).

 

누구든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지 말고, 겸손히 “저에게 이런 깨달음이 있었다”라고 표현하고, 이마저 과신하거나 남용하지 말자. 동일한 환상을 세 번 반복해 보면서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해 계속 의심한 베드로도 있는데, 우리가 쉽게 넘겨짚기까지 해서야 되겠는가?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혜, 의지, 감정을 사용하는 인격적인 방법으로 소통하고자 다가오실 때,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고민하여 발견하고, 분별하여 선택하고, 순종하여 행동할 때, 인격적으로 성숙한 전인 신앙이 꽃피게 된다.〠

 

서을식|시드니소명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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