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백종규/크리스찬리뷰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건 마음속 바이러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사람 사이의 접촉은 줄어들고, 대신에 디지털 온라인상의 만남이 늘어난 것입니다.

 

즉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온라인으로 업무도 보며, 온라인으로 대부분의 필요한 물건도 구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온라인으로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하면서 놀랬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간 당연시했던 아날로그적 인간관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하루 빨리 코로나 백신이 보급되어서, 이전처럼 사람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던 일상으로 빠르게 회복되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이 나온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호주 정부는 3월부터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될 것으로 거의 확신하는 분위기입니다.

 

빠르면 2월부터 노약자와 의료계 종사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접종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하지만 백신이 모두에게 보급된다고 할지라도, 과연 코로나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치유할 수 있을까요? 앞서 사람들이 아날로그적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갈망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 소중한 인간관계를 깨뜨리는 사람 또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코로나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사망자와 그 유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유족들은 제대로 준비할 겨를도 없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장례식을 비롯한 애도 절차가 생략된 경우가 많았기에 이들은 더욱 오랫동안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자신의 아픔을 견뎌야 하는 동시에 코로나 사망자의 가족이라는 낙인도 감당해야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들의 슬픔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정작 유족과 거리를 두려고 하고, 그로 인해 유족들은 마치 자신이 사회에서 죄인이 된 것 같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도움이 그 무엇보다 필요한 시기에 오히려 비난과 무시를 받으면서 상처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즉 코로나 백신이 보급된다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언젠가 해결될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 마음속의 두려움과 염려, 비난, 정죄, 배려 없는 이기심과 같은 마음속 바이러스 등은 결코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역할

 

그렇다면 이처럼 사람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바라보며 교회와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들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며, 그들의 슬픔을 위로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자기를 보며 우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상처받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눈물입니다. 단지 내가 슬프거나 괴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와 다른 이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오히려 가장 아름답고 힘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사랑과 배려, 섬김을 잃어버린 시대에,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한 눈물 한 방울이야말로 이 어두운 시대의 백신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과연 오늘날 교회가 이러한 눈물의 의미를 잘 담아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최근 한국사회에서 교회에 대한 평가는 그 어느 때보다 비판적이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독교는 어느 시대건 어디에서건 편안했던 적이 없습니다.

 

사랑을 받고 만세를 부르면서 환영받는 기독교인이란 없었습니다. 항상 외롭고 핍박받고 오해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막 13:13)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심각하게 여겨지는 것은,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마땅히 드러내야 하는 사랑과 섬김, 눈물의 의미에 대해서 의심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교회와 성도가 이 시대를 위한 백신이 될 수 있다는 소망과 기대를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촉발하게 된 것은, 코로나 펜데믹 상황 속에서, 교회들은 왜 대면예배를 드리는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한국사회의 날선 비판에 대해서, 우리는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고민이 필요합니다.

 

단순하게 “대면예배를 드려야 한다.” 혹은 “비대면예배를 드려야 한다.”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어느 누구가 예배가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이를 결정함에 있어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안식일 논쟁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은 것이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에 대해 분노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이, 단순히 어떤 규칙과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써 거룩해지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안식일 규정에 집착하기보다는,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법과 명분을 지키기 위해 죽는 것을 의롭게 생각합니다. “악법도 법”이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처럼, 법을 위해 죽는 것을 옳게 여기며 놀란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법을 세운 이가 대신 죽는 것입니다.

 

즉, 법을 세운 이의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법에 접촉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법을 만드신 이가 대신 죽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놀라움이 있습니다.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법과 명분 그 이상의 것입니다.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지만, 내가 온 것은 너희를 위함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굶주림과 아픔, 필요에 대해서, 인생의 급박한 위기에 대해서 나는 늘 귀를 기울이고 있으며, 너희를 위하여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법칙 안에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고, 법을 어기면 벌을 주는 하나님 정도로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주일예배를 드리면 복을 주시고, 주일예배를 드리지 못하면 벌 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셨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법칙과 규정에만 매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눅 6:2)라는 교만에 찬 질문을 우리가 되풀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의 상처난 마음들, 그들의 두려움과 아픔, 눈물을 닦아주기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

 

교회를 향한 세상의 날선 비난들, 그러나 그 비난 때문에 우리의 예배 방식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항상 외롭고 오해받고 비난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예배 방식을 결정함에 있어서, 세상을 향한 사랑과 섬김, 눈물의 의미는 꼭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이 법과 명분에 갇혀 있지 않고 우리를 살리셨던 것처럼, 기독교의 정신이란 생명을 살리는 것을 통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 속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위로하는 것으로써 우리의 예배적 삶을 나타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백종규|히스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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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1/27 [10:31]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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