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무엇인가?
 
양지연/크리스찬리뷰

“최초의 사기꾼이 최초의 멍청이를 만났을 때 종교가 탄생했다” -볼테르-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가 예수의 신성 그리고 관용과 사랑이라는 복음을 믿는다.

 

16~17세기 유럽에서는, 매우 격렬해진 신학 논쟁으로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는 서로 수십만 명을 살해했다. 개신교도들은 “인간을 자극히 사랑하는 하나님이 성육신 (成肉身)하여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기꺼이 십자가형을 받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을 원죄로부터 구원하고 천국의 문을 열어주었다고 믿지만, 가톨릭교도들은 신앙만으로는 부족하며, 천국에 가려면 신자들이 교회의 의례에 참석하고 선행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개신교도들은 “선행을 통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천국행은 전능한 존재인 하나님의 위대함과 사랑을 경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가톨릭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1572년 8월 24일, 선행을 강조하는 프랑스 가톨릭교도들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로 불리는 공격에서 단 하루 만에 5천~1만 명의 개신교도를 살해했다. 로마에 있는 교황은 프랑스에서 전해진 소식을 몹시 기뻐하며,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축하 기도회를 열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16~17세기 유럽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본위 절대주의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지루하고 소모적인 신학 논쟁을 지긋지긋하게 느꼈던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 (1694~1778)는 반 봉건, 반 가톨릭 교회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관용 정신 없이는 인류의 발전도, 문명의 진보도 있을 수 없다. 개신교도일지라도 종교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는 대단히 진보적인 주장을 했다. 그 당시 신생 종교였던 개신교는 이단으로 규정되어 가혹하게 탄압받던 시절이었다.

 

오늘날 종교는 흔히 차별과 의견 충돌과 분열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노아 하라리 (Yuval Noah Harari)는 “종교는 화폐와 국가와 함께 인류를 통일시키는 매개체다. 모든 사회 질서와 위계는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에 취약하기 마련이다.

 

종교가 역사에서 맡은 핵심적 역할은 늘 우리의 법은 인간의 변덕의 결과가 아니라 절대적인 최고 권위자가 정해놓은 것이다. 따라서 취약한 구조에 초월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사회의 안정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할까? 왜 고통이 존재할까?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신학자들은 이런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 지적인 곡예를 부려야만 했다. 전지전능하며, 완벽하게 선한 하나님이 그토록 많은 고통을 세상에 허락하시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널리 알려진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는 신의 방식이라고 했다. 악이 없다면 인간은 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으므로 자유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직관에 반하는 답으로써, 즉각 수많은 새로운 의문을 낳는다.

 

자유 의지는 인간에게 악을 선택하도록 허락한다. 많은 사람이 실제로 악을 선택하며, 정통적 설명에 따르면 이런 선택은 반드시 신의 벌을 부른다.

 

그러나 만일 그 인물이 자유 의지로써 악을 선택하고 그 결과로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신이 미리 알았다면, 신은 왜 그를 창조했을까? 신학자들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수 없이 많은 책을 썼고, 싸웠고 그 결과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풀려고 하고, 대답할 수 없는 물음에 답하려고 집착하는 인간에게 신이 묻는다. 도대체 네가 원하는것이 무엇이냐. (Che vuoi?)

 

헤겔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성의 전제 조건에서 신이 더 이상 불필요한 존재일 수도 있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있지만 그들이 정말로 신을 믿는다고는 말할 수 없는 '세속화 시대'에 살고 있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 이야기가 아니라 1832년 상황이다.

 

결국,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이성을 믿게되었다는 것은 인간을 뛰어넘는 절대자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서 “인간의 숱한 욕망과 어두운 내면, 은폐된 치욕과 추함을 남김없이 보고 말았으니, 그 신은 죽어 마땅했다! 사람들은 그 같은 목격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참고 견딜 수가 없으니 그래서 모든 것의 선악과 진실과 허위를 판단하는 진리의 근원이 사라져버렸다”라고.

 

지난 3백 년은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가 점차 중요성을 잃어가며 세속화가 진행된 시기로 묘사된다. 근대는 종교적 열정의 시대였으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의 시대였다.

 

동시에 근대에는 수많은 종교가 새로운 페르소나(Persona, 가면)를 뒤집어쓰고 등장했다. 만일 종교를 초자연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한 인간의 규범과 가치 시스템이라고 정의 한다면, 자유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 국가 사회주의가 그리고 과학주의는 종교의 범주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실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만들어지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 무엇이며,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과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는 인간의 원초적이고 보편적이며 억제할 수 없는 자연 발생적 욕구라는 점에서 종교와 같기 때문이다.

 

과학적 ‘믿음’은 ‘종교적 ‘믿음’을 대체할 수 있는가?

 

논리학이나 수학 등의 이론 체계에서 가장 기초적인 근거가 되는 명제(命題)를 공리(公理, axiom)라고 한다. 지식이 ‘참’이 되기 위해서는 근거가 필요하나 근거를 계속 소급해 보면 더 이상 증명하기가 곤란한 명제에 다다른다.

 

이것이 바로 공리이며 과학적 믿음 체계의 기초가 된다. 공리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과학 기술의 진보는 단 한 발자국도 이룰 수 없다.

 

나는 중학생일 때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라는 에디슨의 명언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는 열심히 노력하라는 말로만 여겼는데, 되새겨 보니 여기서 말하는 1%의 영감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영적 체험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인간의 마음은 어쩌면 뇌라는 생물학적 기관만으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혼이라는 가설은 긍정하는 것만큼이나 부정하는 것도 힘들다.

 

인간의 인식체계는 ‘안다’ 또는 ‘모른다’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 것을 좀더 세분화하면,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known knowns),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 (known unknowns),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 (unknown unknowns),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 (unknown knowns)이 있다.

 

바로 이것이 정확히 말하자면,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 말하듯이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지식’, 즉, 프로이트적 의미의 무의식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감각기관 (눈, 코, 입 ,귀 피부)을 통해 세상을 느끼고 뇌가 그 신호를 해석하고 이해한다. 미시 (세균, 원자, 분자 등)의 세계나, 거시 (태양계, 은하, 우주 등)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인간의 감각기관은 상당히 제한적이며 초라하다. 이런 면에서 종교적 차원의 영감을 필요로 한다.

 

과학과 종교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가는 사유의 길을 공유하고 있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순자(荀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부터 자기 마음속에 의심을 품고 다른 의심스러운 것을 풀려고 하면 그 결론은 타당한 것이 될 수가 없다. 대상에 대해 자기 마음이 이미 편견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먼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차분함 속에 있어야 비로소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이미 성취한 어떤 것이 아니라, 성취할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다. 기대감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힘든 상황을 견딜 수 있게 해주나, 삶에 의미를 갖지 못한 풍요로운 삶은 힘들고 권태로울 뿐이다.

 

과학은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으나 그 자체로서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인간을 행복으로 이끄는 구원의 신이 아니다.

 

그래서 과학과 종교는 서로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지성과 영혼의 겸허함으로 서로의 영역을 인정해 주며 관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누가복음 23:34)”〠 <계속>

 

양지연|분자생물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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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1/27 [15:20]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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