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론(救援論) IV
거듭남, 중생 (重生, Regeneration, Reborn, Re-new, Re-creation)
 
주경식/크리스찬리뷰

중생(重生, Regeneration)의 필요성

 

구원의 순서에 따른 구원론의 두 번째는 거듭남, 중생이다. 중생은 사실 부르심(소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루이스 벌코프는 부르심(소명)과 중생 사이의 순서를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말씀 전파에서 벌어지는 외적 소명은 중생보다 먼저 오게 되거나 동시에 오게 된다. 말씀 전파를 통하여 성령께서 인간의 내적 성향에 영향을 주는 것이 효과적인 부르심인 것이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중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중생을 통하여 죄인은 하나님의 소명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게 됨으로 인간 영혼의 성향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과 효과적인 소명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부르심은 인간 의식을 대상으로 하고 인간 밖으로 부터 유래한다고 한다면 중생은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서 발생하고 인간의 어떠한 태도와도 독립되어 있으며, 인간안에서 발생한다는 차원에서 부르심(소명)과 구별된다.

 

중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의 본성은 변화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와 타락으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새로운 출생, 즉 영적인 출생을 필요로 한다.

 

로마서 3:9-20을 보면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죄악된 존재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인간은 어떤 한 부분만의 수정이나 개량을 통해서 고쳐질 존재들이 아니다. 어떤 근본적인 변화나 새로운 출생이 필요한 존재인 것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즉 영혼의 성향 전체가 변화되고 전환되어야 할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거듭남, 중생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설파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거듭남을 한자어로 표현한 것이 거듭 중(重), 날 생(生), 즉 중생(重生)이다. 한자어 표현의 의미는 거듭해서 태어난다, 반복해서 태어난다의 의미가 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밤중에 찾아온 관원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답하신 예수의 말씀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이에 놀란 니고데모는 그럼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 라고 반문한다.

 

이에 예수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5)라고 대답한다. 거듭남을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으로 대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은 주석학자들은 ‘물과 성령’을 다 같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이해한다. 물과 성령을 똑같이 성령의 역사로 이해하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거듭나는 역사는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 새로운 출생의 역사이다.

 

사실 우리 말 성경에는 ‘거듭남’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거듭남’의 희랍어의 의미는 “위로부터, 처음부터, 새로” 등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아니하면”의 정확한 의미는 “위로부터 다시 나지 아니하면”의 의미이다.

 

“위로부터” 다시 말해 “하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중생은 인간의 노력이나 계획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된 자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고후 5:17)”.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라는 예수의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중생의 개념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바람은 꽃과 잎사귀들을 흔들고 그 소리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들린다. 그러나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것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중생(重生)의 신비

 

성령이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것도 이와 같다. 바람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도 설명할 수 없다. 사람의 거듭나는 과정과 거듭난 확실한 시간이나 장소를 분명히 대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중생은 성령의 주도적인 신비한 사역이다.

 

그러나 바람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고 느낄 수 있는 결과를 드러낸다. 이와 같이 인간 영혼에 역사하는 성령의 활동도 그 구원하는 능력을 체험한 모든 사람의 행위 가운데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거기에는 변화가 수반된다. 회개와 거듭남은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신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죄를 사랑하고 악을 추구하는 마음을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함으로 영혼이 거룩한 사랑에 빠지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은 신비한 일이다.

 

그래서 벌코프는 중생의 정의를 “새 생명의 원리를 인간 속에 뿌리시고 영혼의 지배적인 성향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정의한다.

 

중생은 초자연적 현상이다. 인간의 열심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요 3:9).”라고 분명하게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생은 분명한 성령의 사역이다. 이것은 성령이 인간의 심령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여 인간의 영적인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중생에는 인간의 어떤 협력도 필요하지 않다. 성령의 직접적이고 독자적인 사역이다(겔 11:19, 요 1:13, 행16:14, 롬 9:16, 빌 2:13).

 

구원이 성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시작되었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이루신 객관적인 구원사역이지만 신자들의 삶과 영혼에 주관적으로 적용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시는 분은 성령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론은 다르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객관적인 구원사건을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는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변화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오직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에 의해서만 변화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도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마 19:26).”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를 두고 하는 말인 것이다.〠 (계속)

 

주경식|본지 편집국장, 호주비전국제 대학 Director, ACC(호주기독교대학) /ACT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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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1/27 [15:40]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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