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회복해야 할 모성애

백종규/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1/02/22 [11:24]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신실하게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이를 믿고 고백하면서도, 오늘 우리의 삶에서 왜 이토록 많은 문제들이 우리의 삶을 가로막고 있는 것인지 의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지 않거나, 책임지지 않는 것인지 의심스럽게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플로이드 맥클랑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마치 고층 빌딩의 유리나 다름없다.”고 말합니다. 유리는 필요한 것이지만 그 자체로는 빌딩을 지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받쳐주는 내부 구조가 있어야 하는데,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지지대가 필요합니다. 곧 ‘말씀으로 계시된 진리’에 ‘순종하는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렘 31:18)처럼 제 갈 길을 가려고 하기에 우리의 삶이 더 고단하게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기고 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감히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을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곧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예배하며 가정에 돌아가서는 가족에게 충실하며 사회에서는 법을 준수하며 이웃과 동료에게는 따뜻한 한 마디를 전하며 격려하는 것입니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듯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우리 주변으로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물이 흘러가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물은 항상 무리하지 않습니다. 막히면 서고, 서 있는 것 같아서 밑에서는 계속 움직이며, 막힌 게 뚫리면 또 흘러가고, 흘러가면 항상 낮은 곳으로 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분의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 사이사이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지 못하는 이유를 바로 진단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자신의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정작 우리는 내 삶을 둘러싼 문제와 위협을 더욱 크게 느끼면서 주님께 맡기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단단히 붙들고 계심에 대해서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죠.

 

암벽을 붙잡은 손을 놓으십시오

 

제가 몇 년 전에 실내 암벽 등반을 간 적이 있습니다. 처음 해보는 암벽 등반이라서 아주 낮은 높이의 초보자용 코스를 올라갔습니다. 튀어나온 돌을 붙잡으며 조금씩 올라가는 것이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올라간 후에 밑을 내려다보니 도저히 암벽을 쥔 손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두 손을 놓고서 허리에 묶인 로프를 붙잡고 내려오면 되는데 내가 붙들고 있는 암벽을 놓으면 바로 땅으로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먼저 암벽을 올라갔다 내려온 사람들이 조언을 해줍니다. “로프가 허리에 묶여있으니까 안전합니다. 그냥 손을 놓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암벽 위에 있는 사람은 그 조언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진땀을 뺀 후에야비로소 암벽을 붙잡은 손을 놓고서 로프를 의지하여 밑으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로프가 허리에 묶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암벽만을 붙잡고 있던 저의 모습처럼 나의 등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눈앞의 문제에 시선을 빼앗기는 우리들입니다.

 

어쩌면 우리 중의 누군가는 용기를 내서 로프를 붙잡기도 할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완전히 탈진한 뒤에야 암벽의 손을 놓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바닥으로 완전히 추락하지 않는 것은 우리를 변함없이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단단히 붙들고 계심을 경험한 이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더 높은 암벽을 올라갈 수 있는 것이며 더 높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그 은혜를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의 힘을 빼고서 주님께 나의 짐을 맡기는 것에서부터 은혜를 흘려보내는 준비가 완성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 다른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물이 막힘없이 흘러가야 하는데 어디에선가 꽉 막혀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를 보면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나와 이익을 경쟁하는 관계이거나 혹은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상대방이 사회적인 약자로서 아픔이 있고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조건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즉 누군가를 품어주는 것도 오직 내 편일 때만 가능한 것이기에 어디쯤에선가 은혜가 더 이상 흘러가지 않고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사랑과 섬김이 아닐 것입니다.

 

엄마 닭의 모성애

 

저는 뒷마당에서 암탉을 몇 마리 키우고 있는데 얼마 전에 그 중의 한 마리가 ‘포란’을 시작했습니다. ‘포란’이란 병아리가 태어나도록 따뜻하게 알을 품는 행위입니다.

 

수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암탉이 포란을 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가까운 농장에서 유정란을 몇 개 사와서 닭장 안에 넣어주었더니 예쁜 병아리 한 마리가 태어났습니다. 병아리 한 마리만 있으면 외로울까봐 농장에서 병아리를 네 마리를 더 사왔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걱정했던 것은 과연 엄마 닭이 자기 품 속에서 부화하지 않은 병아리들을 돌볼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다른 암탉들은 병아리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포란을 했던 암탉은 자기가 부화시킨 병아리 외에도 나머지 네 마리의 병아리들을 지극정성 돌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먹이를 먹을 수 있도록 잘게 부수어주고 밤에는 춥지 않도록 따뜻하게 품어줍니다. 바로 이것이 엄마 닭의 모성애였습니다.

 

내가 직접 부화시킨 병아리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엄마 닭이 없기에 보호와 돌봄이 필요한 병아리들을 있는 그대로 품고 돌보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시대에 필요한 모성애입니다.

 

곧 내 편이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나와 생각 신념이 같기에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라 할지라도 슬픔 당한 사람들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 위로가 필요한 이들이라면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고 함께 눈물을 흘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신 그리고 우리가 회복해야 할 모성애입니다.

 

물론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과 문제들을 우리가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갈등하며 논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의 모성애 그 눈물의 씨앗을 흘려보냄에 있어서는 내 편 네 편이 따로 없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이 있다면 위로해주며 누군가 막힌 문제가 있다면 옆에 머물러 있어 주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낮은 곳으로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갈등과 분열을 화해시키며 하나 되게 할 수 있는 크리스찬이 꼭 필요한 이유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도구로써 쓰임을 받는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며 책임지지 않겠습니까?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랑을 가지고 은혜를 흘려보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백종규|히스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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