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화폐 $50의 주인공 데이빗 유나이폰

(David Unaipon, 1872-1967)

글/정지수 사진/권순형 | 입력 : 2021/02/22 [12:14]
▲ 데이빗 유나이폰(1924년). 그의 책 ‘호주 원주민의 전설적인 이야기’ 표지를 위해 찍은 사진이다.©State Library of NSW  


데이빗 유나이폰(David Unaipon)은 호주 원주민으로 설교자이자 저자이자 발명가였다. 그는 호주 사회에 많은 업적을 남겨 50달러 화폐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번 호에서는 그의 삶과 업적에 대해서 알아 보자.

 

데이빗 유나이폰의 출생 배경

 

데이빗 유나이폰은 1872년 9월 28일 남호주 포인트 맥리 미션(Point McLeay Mission, 현재는 지역명이 1992년 Raukkan으로 바뀌었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임스 유나이폰(James Unaipon)으로 남호주에 거주했던 호주 원주민이었다. 제임스는 머레이 강(Murray River)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운얄쿤디(Wunyalkundi) 부족의 일원이었다. 그의 부족은 검은 백조 ‘쿵 가리’(Kungari)를 토템으로 섬겼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신이 속한 부족의 문화와 전통의식을 배우고 익히는데 열심이었다. 그의 키는 약170cm였는데, 다른 부족민들보다 키가 큰 편이었다.

 

어느 날, 제임스 유나이폰은 창 싸움 중에 한쪽 눈을 실명했다. 이로 인해 그는 장애를 가진 불편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의 삶은 운명적 만남을 통해 변화되기 시작했다.

 

▲ 데이빗의 부친 제임스 유나이폰. ©State Library of NSW     

 

그는 1861년에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에서 파송한 제임스 리드(James Reids) 선교사를 만났다. 그를 통해 제임스 유나이폰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듣게 되었고,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 제임스 리드 선교사는 제임스 유나이폰이 믿음이 있음을 보고 세례를 베풀었다.

 

제임스 유나이폰은 그의 부족민들 중에서 첫 번째로 세례를 받은 성도가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리드 선교사의 도움으로 그는 영어를 읽고 쓸 줄 알게 되었다. 제임스 유나이폰은 부족민들 중에서 첫 번째로 문자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한편, 불행히도 1863년 7월에 제임스 리드 선교사가 알버트 호수(Lake Albert)에 빠져 숨졌다. 그와 함께 사역했던 조지 타플린(George Taplin) 선교사는 제임스 유나이폰을 더 훈련시켜 리더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겼다.

 

▲ 호주 원주민 천재였던 데이빗 유나이폰의 초상화가 호주 $50 지폐에 실렸다.     © 크리스찬리뷰

 

또한 타플린 선교사는 호주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주술행위와 장례 예식 등을 금지시키거나 바꾸려고 했다. 타플린 선교사의 이러한 시도는 부족 장로들의 끈질긴 저항에 직면했지만, 제임스 유나이폰이 중간에서 중재자 역할을 잘 감당해 주었다.

 

제임스 유나이폰은 1866년 7월 27일에 부족 지도자인 풀럼(Pullum)의 딸인 림불다(Nymbulda)와 결혼을 했다. 이들의 결혼식은 이 지역에서 최초로 기독교식으로 치러졌다. 그들은 9명의 자녀들을 낳았는데, 그 중에 네 번째가 데이빗 유나이폰이었다.

 

제임스 유나이폰은 자녀들 모두를 기독교 학교에 보내 교육시켰다. 자녀들은 기독교 교육을 통해 기독교 정신을 배웠고 성경 교육을 통해 신앙을 배울 수가 있었다.

 

제임스 유나이폰은 성경 번역 사업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1871년에 그는 교회에서 집사로 임명을 받았다. 그가 집사로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겨서, 교회의 원주민 선교 사역과 목회 사역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그는 1879년까지 약 200km 이상을 걸으며 복음을 증거했다.

 

또한 그는 미션 스쿨에서 조교, 요리사, 사서 등으로 일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은퇴할 때까지 그는 목동, 보트 수리공, 노동자, 토끼 사냥꾼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삶을 꾸려나갔다. 그는 그가 속한 부족에서 리더가 되었고, 많은 영향력을 자기 부족민들에게 끼쳤다.

 

1907년 10월 24일에 그는 포인트 맥리(Point McLeay)에서 사망했다.

 

데이빗 유나이폰의 어린 시절

 

▲ 어린 시절의 데이빗 유나이폰.  ©Timeline     

 

데이빗 유나이폰은 7살 때부터 미션 스쿨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몇 년 후 그는 학교를 떠나 영(C. B. Young)이라는 사람의 조수가 되었다. 영은 데이빗에게 철학, 과학, 음악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할 것을 장려했다.

 

한편, 그는 1890년에 자신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포인트 맥리(Point McLeay)로 돌아왔다. 그후에 그는 폭넓게 책을 읽고 오르간을 연습을 했다.

 

또한 부츠를 제작하는 방법을 배웠고 이후에 부츠 상점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책을 제작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 이빗 유나이폰의 양털깎기 특허 증빙서류.  ©State Libraey of SA   

 

결혼과 사역

 

1902년 1월 4일에 포인트 맥리 (Point McLeay)에서 데이빗 유나이폰은 호주 원주민인 캐터린 카터(Katherine Carter)와 결혼했다. 결혼 이후에 그는 원주민들의 친구들(Aborigines' Friends' Association)이라는 단체에서 홍보대사로 섬기게 되었다.

 

이 단체에서 그가 하는 일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원주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는 알리거나 원주민들의 권리를 알리는 것이었다. 1959년까지 그는 이 사역을 맡아 해 왔다. 이 사역을 하면서 그는 멀리까지 여행을 갈 수 있었다.

 

그는 여행을 하면서 많은 원주민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원주민의 문화와 권리에 대해 연설을 하거나 복음을 증거했다.

 

한편, 데이빗 유나이폰은 호기심 많고 종교적인 사람으로 전통적인 원주민의 신앙과 기독교의 영성이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1960년대부터 발명가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발명가의 삶

 

데이빗 유나이폰은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기계를 만들기 위해서 5년간 연구를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여러 가지 유용한 장치들을 개발했다. 그는 중력 방지 장치, 다중 방사형 바퀴 및 현대식 양털 깎는 가위 등을 만들었다.

 

다른 발명품으로는 원심 모터 및 기계식 추진 장치 등이 있다. 특히, 발명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것은 부메랑의 원리와 빛의 편광 원리를 이용한 헬리콥터 설계 이론이었다. 그의 헬리콥터 설계 이론은 1차 세계 대전 이전에 헬리콥터 도면 작업에 포함되었다.

 

또한, 그는 탄도학에 관련된 내용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탄도학에 있어서 전문가 수준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기계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 한편, 그의 기발한 여러 발명품들 때문에 그는 호주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 데이빗 유나이폰의 첫 번째 책. 활판 인쇄 소책자, 15pp, 21.6 x 13.8cm. 그는 설교자, 발명가 및 최초로 출판한 호주 원주민 작가였다.  ©Josef Lebovic Gallery     

 

작가와 교수의 삶

 

데이빗 유나이폰은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했는데 특히 그는 고전 영어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글은 존 밀톤이나 존 번연의 스타일과 비슷했다.

 

▲ 데이빗 유나이폰의 ‘네이티브 레전드’중 11-12 페이지. 현재 이 책은 보관상태에 따라 호주 내 고서점에서 $550~$750 정도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Josef Lebovic Gallery     

 

그는 1920년대 초에 아들레이드(Adelaide) 대학의 부탁을 받고 원주민 전설에 관한 책을 써 원주민 최초로 책을 출판한 작가가 되었다.

 

▲ 데이빗 유나이폰이 남호주 원주민 보호자인 Herbert Basedow 박사에게 보낸 편지 (1914. 4.21)                        ©State Libraey of SA     

 

1927년, 1928년, 1929년에 걸쳐 그는 원주민에 관한 책을 3권 출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시드니 데일리 신문(Sydney Daily Telegraph)에 많은 기사들을 썼다. 그의 기사는 헬리콥터의 원리로부터 시작해서 원주민의 전설과 삶, 원주민들의 권리를 위한 캠페인 등 거의 모든 주제들을 다루었다.

 

사회 운동가의 삶

 

데이빗 유나이폰은 여행을 하는 동안 호주 원주민이라는 이유로 숙박업소에서 출입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몸 색깔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원주민 문제를 둘러싼 정치 문제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는 원주민의 자결권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호주 정부가 원주민 복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남호주 정부의 원주민 보호 국장을 책임 있는 위원회로 교체해 줄 것을 요구했으며, 호주 중부와 북부의 원주민들에게 별도의 영토를 제공하려다 체포되기도 했다.

 

▲ 호주 $50 지폐에 실린 데이빗 유나이폰의 초상화(위, 1992년. 아래는 2018년 10월 18일부터 유통된 신권)     © 크리스찬리뷰



데이빗 유나이폰은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 발명가로, 작가로, 사회 운동가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1967년 2월 7일에 숨졌다.

 

데이빗 유나이폰의 죽음 이후

 

데이빗 유나이폰이 죽은 이후에 그를 기념하는 다양한 사업들이 펼쳐졌다. 그의 인생을 주제로 한 댄스 공연이 뱅가라 댄스 극장(Bangarra Dance Theatre)에서 열렸다. 또한 그의 이름으로 된 문학상이 만들어졌다. 1988년에 데이빗 유나이폰 문학상이 제정되었는데, 이 문학상은 호주 원주민들과 토레스 해협 섬 주민들 중 최고의 작품을 쓴 작가에게 매년 수여되고 있다.

 

▲ 데이빗 유나이폰의 고향 라우칸 공동체.  ©Medium     

 

그리고, 남호주 대학교의 단과 대학이 그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The David Unaipon College of Indigenous Education And Research).

 

호주의 수도 캔버라에 그의 이름으로 된 도로가 생겼다(Unaipon Avenue in the Canberra suburb of Ngunnawal).

 

한편, 1985년에는 호주작가협회(Fellowship of Australian Writers)가 데이빗 유나이폰에게 호주 원주민 작가 상을 그의 사후에 주었다. 호주은행은 데이빗 유나이폰의 얼굴을 그가 개발한 양털 깎는 기계와 함께 50달러 호주 지폐에 새겨 넣었다.

 

제임스 유나이폰과 데이빗 유나이폰의 삶을 들여다 보면 복음이 어떻게 사람들의 인생을 변화시키는지 알 수가 있다. 눈 한쪽을 잃어버린 제임스 유나이폰이었지만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는 의미있는 삶을 살았고, 그의 삶은 그의 아들인 데이빗 유나이폰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그의 신앙은 그 아들에게 전달되어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다. 호주 역사에서 꼭 기억해야 할 데이빗 유나이폰. 우리가 50달러 지폐를 볼 때마다 그를 기억해 보자.〠

 

글/정지수|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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