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론(救援論) V

주경식/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1/02/22 [15:32]

소명, 중생에 이어 구원론의 논리적 순서 세 번째는 회심 또는 전향(Conversion), 회개(Repentance)이다.

 

회심(Conversion) 표현의 다양성

 

구원의 서정에 따른 구원론의 세 번째는 바로 ‘회심’(conversion)이다. 먼저 회심에 대한 구약에 나오는 단어를 살펴보면 나함이 있다. 나함은 “후회하다(삼상15: 11,35, 렘4:28), 한탄하다(창 6: 6,7), 뉘우치다(출13:17, 렘 31:19, 스 8:14), 뜻을 돌이키다(렘1 8:8, 요 2:14, 시 106: 45), 돌아오다(시 90:13)”등으로 구약성경에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나함보다 회심에 대해 더 보편적으로 사용된 구약성경의 단어는 슈브가 있다. 슈브는 신앙적, 영적 입장에서 ‘돌아오다’ ‘돌이키다’ ‘돌아가다’ 등의 의미를 가지면서 가던 길을 180°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에피스트레포(ἐπιστρέφω)’로 번역되었다. ‘에피스트레포(ἐπιστρέφω)’는 항상 신앙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칠십인 역(LXX)에서는 슈브가 메타노이아로번역되지않고나함이‘메타노이아’로 번역되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신약 성경에서 회심을 뜻하는 가장 보편적인 단어는 메타노이아이다.‘메타노이아’는 헬라어 전치사 ‘메타’와 ‘알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노이아’가 합성된 말로 ‘아는 것을 바꾸다’라는 뜻으로 곧 ‘회개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회심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conversion’이 있다. 이 회심을 뜻하는 영어 단어 ‘conversion’은 우리말로 번역될 때 ‘전환’, ‘변환’, ‘개조’, ‘전향’, ‘개종’, 특별히 종교적인 ‘회심’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우리말 ‘회개’를 뜻하는 ‘repentance’를 찾아보면 후회, 회한, 회개, 참회’라는 단어로 번역된다.

 

루이스 벌코프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구원의 서정의 세 번째 요소로 영어 단어 ‘convesion:회심, 전향’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회심’(conversion)에는 두 가지 요소인 ‘회개’ (repentance)와 ‘믿음’(faith)이 있다는데 동의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말에는 회심(conversion)과 회개(repentance)가 구별되어 사용되어지고 있지 않다.

 

교회 안에서 회개에 대해 이야기 할 때도 그것이 ‘회심(conversion)’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회개((repentance)’를 의미하는 것인지 모호할 때가 많다.

 

탕자를 통해 본 회심, 전향(Conversion) 이야기

 

죄인이 죄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의식적인 변화의 모습(회심)을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 (눅 15: 11-32)는 드라마틱하게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허랑방탕하게 살며 미리 물려받은 유산을 탕진한 탕자가 급기야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도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돌이켜(눅 15: 17)”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

 

탕자의 비유보다 회심의 내러티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는 본문은 흔치 않다. 삭개오의 비유(눅19:1-10) 역시 죄인이 회심할 때 보여주는 진정한 변화에 대해 자세히 묘사해 주고 있다.

 

회심한다는 것은 후회하고 뉘우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후회할 뿐 아니라 삶을 바꾸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후회하고 뉘우치기(悔)까지는 잘 하지만, 고치는 일(改), 가던 방향을 바꾸어 돌이키는 일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탕자가 깨닫고 뉘우칠 수 있었지만, 방향을 바꾸어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가 결심한 것들은 어떠한 상황이 와도 다 감수하겠다는 결연한 믿음과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돌이켜 아버지 집으로 가기 위해서,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과 어려움들이 있었겠는가?

 

돌아갈 결심을 한 탕자의 내면 세계를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8-19)” 탕자는 아버지께 돌아가기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뿐 아니라 가족과 동네 사람들에게 받게 될 멸시와 조롱 심지어 어떤 처벌이 주어지더라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볼 수 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을 품꾼의 하나로 여겨달라고 할 정도로 낮아진 마음으로 결연한 결심을 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이렇듯 진정한 회개의 특성은 ‘의식의 변화’뿐만 아니라 ‘삶의 방향성’을 실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회개(悔改)를 단순히 우리 감정의 뉘우침과 후회 정도로 생각하는 수준에서 마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회개는 뉘우치고 후회하는 감정의 변화뿐만 아니라 실제 삶을 고치고 방향성을 바꾸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없다.

 

구원에 이르는 후회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회개는 세상 근심과 구별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참된 회개로 이끈다고 하면서 세상 근심과 구별되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회개는 ‘생명 얻는 회개’ (행11:18)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진리의 지식에 이르는 회개”(딤후 2:25)라고도 불리운다. 이러한 회개는 분명 부자관원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돌아가지만 (눅 18:23) 진정한 회개로 이끌지 못하는 세상 근심과 비교해 볼 때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은 삼십에 예수를 판 가룟 유다도 ‘스스로 뉘우쳤지만’(마 27:3) 결국은 목매달아 죽고 말았다. 가룟유다는 ‘스스로 뉘우쳤지만’ 그의 뉘우침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고후 7:10)로 이끌지 못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회개(悔改)는 후회하고 뉘우치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후회하고 뉘우침이 생명 얻는 진정한 회개가 되기 위해서는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돌아섬’이 있어야 한다.

 

사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이미 믿음과 후회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은 후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아섬, 돌이킴’ 즉, ‘온전한 회심’으로 이끌어 준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87문에서는 회개를 이렇게 묘사한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회개는 곧 구원의 은혜인데 이로 말미암아 죄인이 자기 죄를 바로 알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깨달아 자기 죄를 원통히 여기고 미워함으로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굳게 결심하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새로이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자기 자신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어야 하고 아울러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상한 마음, 뉘우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되고 죄의 길에서 돌아서는 결단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

 

죄를 깊이 깨닫고 죄에서 돌아서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속사람 안에서 역사할 때 가능한 것이다.〠 (계속)

 

주경식|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호주비전국제 대학 Director, ACC(호주기독교대학) /ACT 교수

▲ 주경식     © 크리스찬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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