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의 결과이자 도구이다

위클리프(Wycliffe KDM) 정철화 선교사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입력 : 2021/03/29 [17:14]
▲ 1988년부터 파푸아뉴기니에서 성경번역 사역을 시작한 정철화 선교사는 2002년 1월 쿠오트 신약성경을 완역하여 봉헌했다. 그후 호주 위클리프는 정 선교사를 호주와 뉴질랜드 한인교회 담당자로 임명했다.     © 크리스찬리뷰


들어가면서

 

1980년 한국기독학생회(IVF)에서 예수님를 영접한 정철화 선교사는 이듬해 여름 수련회에서 선교 소명을 받아 외교관의 꿈을 내려놓고 성경 번역 선교사로 헌신했다.

 

아내 조경자 선교사와 함께 1988년부터 파푸아뉴기니의 식인종 부족인 쿠오토(Kuot)족과 16년을 동고동락하며 그들에게 문자를 만들어주고 신약성경 완역과 찬송가 420곡을 번역하였다.

 

이후 2004년에 호주 위클리프의 초청을 받아 사역지를 옮기게 되고, 호주 350개 한인교회와 뉴질랜드 150개 한인교회의 책임자가 되었다.

 

정기적으로 교회를 방문함(church engagement)으로 설교·선교 세미나·상담 등을 통해 21세기 최신의 선교와 목회의 동향을 나누고 한인공동체의 선교적 활성화(mission mobilization)을 돕고 있다.

 

영적 과제와 지적 방황

 

그는 1971년 대구 계성고등학교 장학생반에 입학했다. 계성학교는 1906년 10월 15일, 미국 북장로회 소속 아담스 선교사가 남문안교회 내의 선교사 사택을 임시 교사로 사용하며 개교하였다.

 

아담스 선교사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니라”(잠 1:7)는 말씀을 교훈으로 정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입학식 때부터 정 선교사 마음에 꽂혔지만 의미는 미궁이었다. 말씀을 깨닫고 싶어 철학·종교·사상 서적을 섭렵했지만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 정철화 선교사가 만든 문자로 출판한 신약성경을 받아든 쿠오트족이 기쁨에 넘쳐있다.  ©크리스찬리뷰(영상 촬영)     


교목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유신 철학자적 해명은 좌절만 키웠다. 다행히 그의 지적 방황은 8년 후 주님을 만나면서 멈췄다. 그는 IVF에서 성경 공부 중에 주님을 만났다.

 

자신은 상대적인 존재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절대 창조주 앞에 내가 누구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pass word를 간구하기 전에는 해결책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해결책을 찾은 날 그의 눈물샘이 터졌다. 새 눈은 새 세계를 보았다.

 

▲ 파푸아뉴기니 선교사로 사역할 당시 정철화 선교사 가족사진.  ©정철화    


모교인 외국어대학교 교정에 심긴 나무에게도, 새들에게도 미안했다. 그의 죄 때문에 피조물이 신음하는 것 같았다. 복음은 예고된 심판과 저주를 뒤집는 최종 선고이다. 그는 그날 자신에게 복음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진심으로 영접했다.

 

하나님의 부르심

 

그는 소시적부터 지적 호기심과 영적 외로움을 앓았다. 건축사인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우상이었고 그가 20살 때 병사하셨다. 선친은 가셨지만 그는 보내 드리지 못했다. 오랜 시간을 아쉬움으로 침울하게 보냈다.

 

그 후 기독교 공동체를 통해서 진솔한 형제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다. 기독교 공동체를 통해서 영적 문제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공허도 풍성하게 채움을 받았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의 서문을 보면 그가 기독교 공동체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저는 주(主)께서 ‘공동체’를 통해 주시는 축복을 가장 많이 누린 선교사입니다. 1979년부터 시작된 IVF 공동체와의 복음 교제를 시작으로, 1985년부터 남서울 교회 공동체의 가족이 되었으며, 1986년부터 GBT와 GMTC 공동체에 소속되어 풍성한 축복을 누렸습니다.

 

1987년부터 성경 번역 선교 현장에서 시작되었던 SIL 공동체와의 전우애도, 2004년부터 ‘선교 동원 사역’을 위한 호주와 뉴질랜드 위클립 공동체와의 동역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개입하신 결과라는 말 외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그간의 난제들이 해결되긴 했지만 곧 다른 고민이 시작됐다. 원치 않던 하나님의 소명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 고민은 6개월 후에 현실이 되었다.

 

1980년 IVF 여름 수련회에서 하나님은 그를 ‘성경 번역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다. 잠언 1장 7절 말씀에 대한 질문이 해결되자 이제는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을 당면하게 된 것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에게 ‘You will be my witness'는 명령이 아니라, 예언이었고 초대장이었다. 그는 이 말씀의 의미를 사복음서의 예수님의 지상사역이 계시록까지의 천상사역으로 연결하는 길라잡이로 정리했다. 그러나 소명 확인과 순종은 다른 차원이었다.

 

▲ 쿠오트 신약성경 봉헌예배에 참석한 원주민들. ©정철화     


그는 외교관이 되어 전문 직업인으로 주님을 섬기고 싶었다. 3개월 동안 앓고 고민하다가 결국 항복하게 되었다. 대학교 2학년 때이다.

 

그는 힌디어를 전공으로, 영어를 부전공으로 선택했다. 자연스럽게 인도 선교사의 비전을 가지게 되었다. 성경 번역에 필요한 원문 이해는 합동신학대학원에서 길렀다. 그곳에서 조직신학 성경신학 등을 연구했지만 최종 승부처는 성경 해석학이었다. 헬라어에 입각한 신약 해석에 중심을 두되 히브리어에 기반을 둔 구약해석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파푸아뉴기니 사역

 

싱가포르에서 10개월간의 언어학 과정을 거의 마쳐가는 시점에도 인도의 선교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 당시 인도는 성경 번역 선교사가 아니라 현지인에게 성경 번역을 가르치는 훈련자가 필요했다.

 

그때 마침 파푸아뉴기니에서 문이 열렸고 그 문으로 들어갔다. 파푸아뉴기니는 왠지 낯설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는 친근감이 있었고 현주민들의 얼굴에 소시적에 만났던 사람들의 좋은 인상이 중첩되었다.

 

1988년부터 정 선교사 가족은 공식적으로 성경 번역 사역을 개시했다. 쿠오트 원주민들과 함께 뒹굴고 먹고 자고 지내게 되자, 2년 만에 원주민들은 정 선교사와 가족을 입양하였다. 그들의 입양이란 외부인을 전통 부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공인하는 것이다.

 

쿠오트 부족은 모계 사회이다. 12개 씨족 중에서 정 선교사를 입양한 부족과 조경자 선교사와 아이들을 입양한 부족이 다른데, 자녀와 족보와 부동산은 모두 아내 씨족의 소유이다. 그런 사회구조와 개개인의 역할에 정 선교사와 가족들은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고, “저희가 역사상 가장 행복하게 사역했던 선교사 가족들 중 하나”로 고백한다.

 

정 선교사는 도착 직후부터 영어나 공용어 사용을 금하고 쿠오트어 학습에 전념했다. 언어 조력자로부터 배운 단어와 표현법을 철저히 익히고 모르는 것들은 그냥 외웠다.

 

2년차부터는 그들과 일상의 기본 대화가 가능해졌다. 그들은 문자가 없었기에 5년차에는 문자를 만들어 찬송가를 비롯하여 그들 손으로 쓴 이야기를 1백 종류의 소책자로 만들어 배포했다.

 

쿠오트어는 동사 변화가 심하다. 명사는 여성, 남성, 중성이 있는데 동사는 주어와 목적어의 성, 수, 격에 일치해야 했다. 짧은 문장이라 해도 문맥과 화맥을 살리기 위해 애썼다.

 

▲ 정철화 선교사가 15년간의 땀과 눈물로 문자를 만들어 번역한 쿠오트 신약성경. 신약 성경 봉헌 후 15년 만인 2017년, 그들은 스스로 성경을 녹음하여 두 번째 봉헌식을 올렸다.  ©정철화     


초벌 번역 후에는 반드시 집단 토의를 거쳤고, 어휘 선택은 현지민들의 몫이었다. 그는 이러한 준비 과정을 거쳐, 사역 6년 차부터 본격적인 성경 번역에 돌입했다.

 

2002년 1월 26일. 마침내 ‘쿠오트 신약성경’을 완역, 봉헌하게 되었다. 15년간의 땀과 눈물이 끝났다. “떼마이엥 예수”(예수님 감사합니다) 그 표현 외에 주님께 드릴 더 좋은 표현이 생각나지 않았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을까!

 

▲ 장남 성민 (왼쪽) 군과 차남 다민 (오른쪽) 군이 어린 시절 파푸아뉴기니 쿠오트 원주민 어린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 장면이 정겹다. ©정철화    

 

▲ 정철화, 조경자 선교사 가족사진.  ©정철화  


더 놀라운 사실은 신약 성경 봉헌식 후 15년 만인 2017년, 그들은 스스로 성경을 녹음하여 두 번째 봉헌식을 올렸다. 쿠오트교회는 ‘눈’ 복음과 ‘귀’ 복음을 함께 가진 것이다.

 

필자는 정 선교사가 번역한 성경을 보았다. 일반 성경 전권의 분량이다. 언어와 세계관의 차이로 인해 직역보다 의미 중심의 번역을 한 결과 분량이 많아진 탓이다. 문자가 없는 식인종 부족에게 말을 배워 문자를 만들어 주고 그 문자로 신약 성경을 완역한 사실은 참 놀랍다. 그러나 봉헌식은 사역의 끝이 아니라 그 모어 성경을 통해서 역사하실 하나님의 새 역사의 시작일 뿐이다.

 

자녀 교육

 

오지 선교사에게 가장 큰 부담은 자녀 교육이다. 정 선교사에게는 아들 둘이 있다. 두 아이는 원주민 아이들과 죽이 맞아 남태평양을 휘저으며 놀았다. 공부는 관심이 없고, 하루해가 다 가도록 바다와 산을 쏘다녔다. 그 덕분에 말라리아를 수없이 앓았다.

 

▲ 쿠오트 원주민들과 함께 뒹굴고 먹고 자며 생활한 정철화 선교사(왼쪽). 2년 만에 원주민들은 정 선교사와 가족을 입양했다. 그들의 입양이란 외부인을 전통 부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공인하는 것이다.  ©크리스찬리뷰(영상 촬영)     


홈스쿨링을 시작하면 10분 이내에 하품에다 딴전을 부렸다. 어느 날 한국에서 지인이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책을 보내주었다. 아이들이 이 만화책을 읽으면서 책 읽는 재미를 갖게 되었다.

 

한국 역사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책의 세계가 열대우림의 동심 세계만큼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홈 스쿨로는 한계가 있어서 파푸아뉴기니 선교 본부의 MK 학교로 보냈다.

 

파푸아뉴기니에서 고등학교까지 학업을 마친 후 한동대학교에 입학했다. 군대 생활은 두 아이 함께 같은 시기에 카투사로 마쳤다. 지금은 둘 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원 동문이다. 정 선교사는 아이들의 장래를 책임져 주신 에벤에셀 하나님, 명실상부한 여호와 이레에 감사하고 감격한다.

 

▲ 쿠오트 원주민들 ©정철화   

 

▲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한 정 선교사의 두 아들.     ©크리스찬리뷰(영상 촬영)   

 

호주로 사역지를 옮김

 

일본 선교사는 선진국 출신이지만 후원 교회의 후원 면에 있어 한국 선교사가 누린 호조건에 미치지 못했다. 그 결과 한국 선교사 여섯 팀이 신약을 봉헌하기까지 일본 선교사들은 한 팀도 완역하지 못했고 두 명의 일본 선교사는 병사하였다. 일본 선교사와 한국 선교사의 차이는 국력이 아니라 선교의 승패를 좌우하는 후원 교회의 기도와 동역에 있었다.

 

번역이 끝날 무렵, 그는 선교 현장에서의 경험과 사역의 노하우를 지역 교회들에 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파푸아뉴기니에서 사역하던 선교사가 호주 위클리프 선교회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호주 한인교회의 선교 열정에 관한 보고를 듣고 정 선교사 부부를 초청, 호주 한인교회 실태를 조사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004년, 호주 위클리프는 정 선교사를 한인교회 담당자로 임명하였고 곧 뉴질랜드의 한인교회 책임도 맡게 되었다.

 

동역의 큰 그림과 long term 비전

 

“2006년부터 오상원 치과 원장님의 도움으로 같은 건물 내에서 KDM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저의 주 사역은 지역 교회가 선교적 주인 의식을 갖도록 도우면서 함께 성경 번역 선교사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단과반이며 목회는 종합반입니다. 단과반은 종합반의 일부로써 전문적 전략적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선교사는 지역 교회와 밀접하게 동역해야 합니다.

 

현대 선교는 To Where가 아니라 To whom입니다. 실례로, 터키 선교는 터키 안의 터키인뿐만 아니라 오대양 육대주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터키인을 대상으로 한다는 의미로 확장되었습니다.

 

따라서 미전도 지역 선교뿐만 아니라 국내 다민족 선교가 부각되는 것입니다. 한인 교회들은 이 선교현장의 변화에 대한 총체적 이해와 세심한 대처가 필요한데 Auburn 지역이나 Lakemba 지역을 공부 삼아 방문해보는 것도 유익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세계적 동향 변화에 따라 교회의 한 지체로서 선교적 목회, 목회적 선교의 소통과 공유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는 디아스포라에 의해 쓰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안디옥 교회, 모라비안 교도들이 역사적인 예입니다. 한인 디아스포라도 한국 교회의 주변이 아니라 세계 선교의 핵심 허브입니다.

 

요한복음 17:18과 20:21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의 말씀과 같이 지역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선교 열매이자 세계 경영을 위한 모태입니다.”

 

카이로스(Kairos) 사역

 

정 선교사는 호주, 뉴질랜드 한국어 카이로스 코스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이다.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정한 때’를 이르는 말로, 교회와 기독인이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지역 공동체와 성도들로 세계 선교에 동참하도록 돕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이 코스는 1994년 필리핀에서 사역하던 뉴질랜드 출신 선교사가 소수 민족 선교를 위한 선교훈련에서 비롯됐다. Living Spring International에서 3만여 명의 필리핀 기독인을 훈련시켜 세계 선교에 나아가도록 했다.

 

이 사역은 2015년 태국 치앙마이 국제회의에서 공식 명칭을 Simply Mobilizing(SM)으로 개명한 후 지역 교회와 성도들이 선교적 교회와 선교적 삶을 실천하도록 돕고 있으며, 현재는 세계 80여 개 나라에서 40여 언어로 진행 중이다.

 

정 선교사는 호주와 뉴질랜드의 한인교회들이 다문화권에서 선교적 교회와 증인의 삶을 실천하도록 돕고 있다. "가속되는 디아스포라 현상의 세계화 추세에서, 다민족·다문화 현상은 전 세계 대도시들이 예외 없이 당면한 과제"라며 "나라·지역·도시 단위로 선교학적 연구가 더 활발하게 진행돼야 하며, 한인교회와 전문 선교단체 및 신학교들이 협력과 분업의 형태로 공동대처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선교적 동력을 위한 이러한 모든 시도는 교회 체질 변화와 질적 성장에 관계되는 중대사로, 오랜 시간과 끈질긴 노력을 요구한다"며 "눈에 띄는 결과를 얻거나 주류적 주목을 받지 못해도 하나님의 시간(Kairos)에 이뤄질 것이며, 그 유익함과 열매는 목회 현장과 선교 현지에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나가면서

 

필자는 선교 전문가 두 분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한 분은 깡통교회로 유명한 이동휘 목사이고 다른 한 분은 나섬공동체 대표인 유해근 목사이다. ‘나섬’이란 ‘나그네를 섬기는 공동체’의 약자이다.

 

▲ 카이로스 사역은 교회와 기독인이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지역 공동체와 성도들로 세계 선교에 동참하도록 돕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사진은 졸업식 장면     © 크리스찬리뷰


유해근 목사는 과도한 선교적 업무로 인해 실명한 분이다. 이동휘 목사는 ‘바울선교회’ 대표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사이다. ‘선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이동휘 목사는 “예수를 먼저 믿은 사람이 아직 예수를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를 전하는 것”, 유해근 목사는 “나그네를 순례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나그네는 목적지 없는 과객이며, 순례자는 목적지를 향해 나침반을 가진 사람이다.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목적지가 없는 배는 표류하고, 목적지가 있는 배는 신바람을 탄다. 선교란 나그네를 순례자로 만드는 일이며, 표류하는 인생을 미전도 종족 한 사람을 목표로 항해하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모든 성도가 선교사의 소명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만민을 위한 소명 (창 12:1-3)은 분명히 받았다. 지역 교회가 ‘선교적’이지 못하면, 그 교회는 ‘선교의 적’이 될 수도 있다. 〠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