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부끄러워 말라

서을식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1/03/30 [09:26]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디모데후서 1:12)

 

출근하면서 집에서 키우는 개 ‘올리’를 데려왔다. 혼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무실이라, 별 상관없으리라. 갇힌 듯 자유로운 작은 공간에서 편안한 나와 달리, ‘올리’는 좁은 공간에서 시간이 길어지자 답답해하기 시작했다.

 

첫 전화다. “직장(job)을 잡았는데 당분간 주일에 일해야 해서 아침 일찍 예배드리는 가까운 교회로 다녀야 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기꺼이 “그 교회 좋은 교회이니, 그러시라”고 했다.

 

두 번째 전화다. 세미나 룸에서 한 주에 한 번 아트 클라스 운영하던 분께서 한국 다녀와 호주 호텔에 2주 격리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기쁘게 “나중에 뵙자”고 했다.

 

세 번째 전화다. 교통사고를 당한 한국의 구순 아버지께서 다리 수술을 한 후 슈퍼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1인 무균실로 옮겨 치료받고 있는데, 인수인계하는 간병인이 당일 수고비로 아버지 지갑에 있던 현금을 가져갔다는 내용이었다. 감사하면서 “알려줘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분명 입으로는 기꺼이, 기쁘게, 감사하면서, “그러시라”, “나중에 뵙자”, “알려줘 고맙다”라고 말했다. 허나 왠지 마음이 꿀꿀하다. 한 사람은 당분간 헤어지고 한 사람은 걱정되고한 사람은 씁쓸해서 그런가보다!

 

“나도 너도 답답하니, ‘올리’야, 일찍 들어가자.”하지만, 비도 오고, 집에 와도 할 일이 마땅찮아, 다시 책상 앞이다. 사순절이라, 국어대사전에서 ‘고난’을 찾아 읽었다. 뜻풀이 마지막에 영어로 distress라고 되어 있었다.

 

“성경에서는 주로 suffering이라고 하는데…” 중얼거리며, Short Oxford English Dictionary에서 distress를 찾아 읽다 보니, 3번째 설명이 좋다. “anguish or affliction affecting the body, spirit, or community”(신체, 정신, 또는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는 고뇌 또는 고통).

 

불현듯 몇 년 전 한국 방문길에 만난 한 사람이 생각난다. 나보다 연상인데, 청년 때 내가 신학을 하라고 권하여 입학원서를 가져다준 분이다. 성품 좋은 목사님과 결혼하여 개척교회의 사모와 동역자로 더 깊은 헌신을 이어 오셨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더하게 한 사람과 함께 이룬, 작아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교회를 거친 많은 사람들의 육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움직인 두 분의 분주한 발걸음과, 영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말씀으로 먹이면서 무릎 꿇고 홀로 시간을 보냈을 그분들의 고독을!

 

은퇴 직후라, 목회의 고난 길 헤치고 온 흔적이 아직 배어나는데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해온 능력이 사장될까 염려하면서, 인생 후반기 ‘고생되는’ 사역을 준비하고 계셨다. 별처럼 빛나는 순간은 하늘에 예약하고, 이 땅에서는 소금처럼 반짝이며 항상 녹아내리는 희생의 삶을 살아온 그리스도의 신부로, 먹음직한 육신의 열매, 보암직한 안목의 성공, 탐스러운 이생의 자랑과 평생 거리를 두고 살아온 그분은 이미 성자가 되어 계셨다.

 

나는 믿는다. 그분은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고난을 부끄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가 되어 적절한 섬김의 자리에서 또 다시 최선을 다해 여러 영혼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리라는 사실을.

 

왜? 오늘 성구가 말하고 있듯, 그분은 자신이 믿는 주가 어떤 분인지 알며, 위탁한 자신의 영혼을 재림하실 그날까지 주께서 안전하게 지키실 줄을 알기 때문이다. 마치 바울이 그랬듯, 이런 사람에게 고난은 영광, 죽음은 부활의 전주곡이다.

 

비견이 불가하나, 바울의 일생, 그분의 삶, 나의 오늘 하루도 만만치 않다. 주의 종들이 고난 길을 오랫동안 헤쳐 나가는 이유는, 주님께서 사역자를 위해 특별하게 좁은 길과 좁은 문을 별도로 예비하셨고, 예수께서 앞서 고난의 길을 가셨고, 오늘도, ‘나를 따르라’고 부르시니 어찌하겠는가?

 

내친김에 부활(resurrection)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부활은 죽음과 장사 후 그리스도가 다시 사신 사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지막 날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뜻하기도 하고, 잠자거나 사용되지 않던 상태로부터의 부활을 뜻하기도 한다.

 

예수 부활을 외치는 자, 마땅히 자신의 부활 소망으로 즐거워하고, 영적 잠에서 깨어나, 주의 사역을 위해 ‘I’m available, use me’라고 일어서는 부활절이 되어야 하리. 그러려면, 먼저 홀로 있는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고, 좁은 공간에서 자신을 만나 다듬은 후에 넓은 세계로 나가야 한다.

 

물론 ‘올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개는 골방이라는 영적 공작소와 상관없이 무조건 많은 사람과 넓은 활동반경을 더 선호하는 듯하다.〠

 

서을식|시드니소명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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