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진실·화해를 향한 매우 큰 발걸음

마이올 크릭 추모제 (Myall Creek Memorial Ceremony 2021)

글/주경식 사진/권순형 | 입력 : 2021/06/28 [10:45]
▲   7/2021 표지  © 크리스찬리뷰

 

▲ 183년 전 마이올 크릭에서 있었던 원주민 대학살을 추모하는 기념행사가 지난 6월 13일 마이올 크릭 추모공원에서 열렸다. 사진은 추모제에서 전통춤을 공연하고 있는 원주민들.     © 크리스찬리뷰


블루 마운틴에 눈이 내린 다음날인 6월 11일 기자 일행은 인버렐(Inverell)로 향했다. 매해 6월 여왕 탄생일(Queen’s Birthday) 연휴기간에 마이올 크릭(Myall Creek)에서는 원주민 학살 추모제(Myall Creek Memorial Ceremony)가 열린다.

 

올해는 6월 13일에 추모제가 거행되었다. 크리스찬리뷰는 이 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 한 달 전부터 준비하고 숙소를 찾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이맘 때면 마이올 크릭 추모행사에 참석하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마이올 크릭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 빙가라(Bingara)의 모텔들은 이미 예약이 끝났다.

 

인터넷을 뒤져 마이올 크릭에서 3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인버렐(Inverell)에 겨우 숙소를 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이올 크릭에서 한두 시간 떨어져 있는 아미데일(Armidale)이나 모리(Moree)에 숙소를 정하고 추모제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기자 일행은 6월 11일(금) 오전 마운틴 쿠링가이(Mt Kuring-gai)에서 오전 10시 20분쯤 인버렐로 출발했다.

 

인버렐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인버렐은 시드니에서 북서쪽으로 580km 떨어진 NSW의 지방 소도시이다. 예상 도착시간은 오후 4시 30분이었다.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 가장 빠른 길을 선택했다.

 

▲ 마이올 크릭 추모의 길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     © 크리스찬리뷰

 

뉴카슬(Newcastle)을 지나서 글로스터(Gloucester)라고 하는 지역에서 북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차가 길을 막고 도로 폐쇄 방벽이 쳐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어제 내린 눈 때문에 길이 결빙되고 산길이 미끄럽기 때문에 도로를 폐쇄했다는 것이었다.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우회 산길 도로 역시 같은 상황이라고 했다. 할 수 없이 온 길을 다시 돌아 나와 M1 고속도로를 타고 콥스 하버(Coffs Harbor)까지 올라가 돌아가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오후 6시 산길은 칠흑같이 깜깜하고, 밖의 온도는 0도를 가리켰다. 이런 곳에서 혹시 차가 고장이라도 난다면 첩첩산중에서 모발폰도 터지지 않고 정말 위급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 10시 20분에 출발했는데 저녁 9시 30분에 겨우 인버렐 숙소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무려 11시간이나 걸린 것이다.

 

마이올 크릭 대학살 (Myall Creek Massacre) 배경

 

1838년 6월 10일, 뉴 사우스 웨일즈, 마이올 크릭 목축지에서 12명의 백인 남성에게 최소 28명의 원주민(Aborigine) 남성, 여성, 어린이들이 살해되었다.

 

백인들이 호주 원주민을 살해한 사건은 호주 정착 과정에 자주 발생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마이올 크릭 대학살이 다른 학살 사건들에 비해 중요한 이유는 백인이 원주민을 죽였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은 최초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호주 대륙에는 영국인이 1788년에 첫발을 딛기 전까지 최소 4만 년 이상을 원주민(the first people, 지금은 호주의 첫 번째 정착민이라고 부른다)이 살고 있었다. 영국인의 정착 초기부터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는 당연히 갈등이 벌어졌다.

 

이러한 갈등은 일반적으로 백인이 호주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땅을 원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처음에는 영국이 죄수 유형지로 호주 신대륙을 선택하고 죄수들을 보냈지만 점차 자유 정착민들도 호주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 마이올 크릭 추모의 길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     © 크리스찬리뷰

 

1838년 이미 백인들은 51년 동안 호주에 정착을 하면서 백인 목축업자들은 원주민의 땅을 빼앗고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을 무너뜨렸다.

 

전개

 

1830년대까지 원주민들에 대한 백인들의 폭력은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특히 뉴 사우스 웨일즈 국경지대에서 백인들의 이러한 원주민 공격은 1837-1838년에 야만적으로 증가했고 극에 달했다.

 

뉴 사우스 웨일즈의 식민지에는 공식적인 경계가 있었다. 공식 국경 너머에 정착한 사람들을 스쿼터(Squatter)라고 불렀다. 이 스쿼터(목축업자)들은 종종 더 넓은 목축지를 찾아 원주민의 땅까지 침범하여 자신들이 기르는 소나 양을 방사했다. 마이올 크릭 목축지는 그러한 장소였다.

 

▲ 추모의 길에는 7개의 석탑에 당시의 상황을 표현한 그림과 함께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이 스텐 명판에 적혀 있다.     © 크리스찬리뷰

 

▲ 1838년 6월 10일 한 갱단이 마이올 크릭 스테이션에 몰려와 28명의 여성, 어린이, 노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내용과 그림이 적혀 있는 명판.     © 크리스찬리뷰


1838년 6월 10일 마이올 크릭 목축지에서 28명의 원주민 남녀와 어린이들이 학살되었다. 마이올 크릭 대학살을 이끈 존 플레밍(John Flemimg)은 부유한 자유 정착민 목장주의 아들이었다. 그는 11명의 죄수들을 규합하여 원주민 학살을 이끌었다.

 

더욱이 끔찍한 것은 원주민들의 머리를 참수하여 시체들을 불태웠다는 사실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더 많은 원주민을 찾아 죽이려고 그 인근 지역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리고 인근 인버렐 지역에서 또 다른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그들이 살해한 원주민 희생자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술 파티를 열고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서로 자랑하기도 했다.

 

재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정착 초기에 식민지 호주 대륙에서는 원주민 학살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마이올 크릭 사건은 백인들이 원주민에게 저지른 만행이 문서로써 잘 보존되고 원주민을 살해한 백인을 처벌한 최초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다른 원주민 학살과는 다르다.

 

▲ 기념 바위 동판에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역사의 진실을 인정하고 화해의 행동으로 호주 원주민과 비원주민 호주인 그룹이 함께 2000년 6월 10일에 이 기념바위를 건립합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 크리스찬리뷰

 

당시 마이올 크릭 목장주였던 윌리엄 홉스(William Hobbs)는 학살사건을 지역 경찰인 토마스 포스터(Thomas Foster)에게 신고했다.

 

그리고 사건을 보고받은 당시 뉴 사우스 웨일즈 신임 총독이었던 조지 깁스(George Gipps)는 수사를 명령하고 학살자들을 체포하도록 했다. 얼마 후 학살을 이끌었던 존 플레밍을 제외하고는 모두 체포되었다. 존은 죄수가 아니라 자유인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쉽게 탈출할 수 있었다.

 

수감자들에 대한 뉴스가 퍼지면서 그들의 체포는 군중들에게 많은 관심을 끌었다. 심지어 어떤 백인 목장주는 죄수들을 위한 최고의 변호사를 구하는 자금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첫 번째 재판은 1838년 11월 15일에 열렸다. 그러나 시체들도 모두 불태워지고 목격자가 없는 상태에서 제시된 부족한 증거들로 인해 배심원들은 15분 만에 그들 모두에게 무죄판결을 냈다.

 

▲ 마이올 크릭 추모제 행사 전날 추모의 길 석탑 앞에서 묵상하는 방문객.     © 크리스찬리뷰

 

1938년 12월 18일자 ‘오스트레일리안’ 신문에 실린 당시 기사는 백인들이 원주민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는 원주민들을 원숭이 군집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구상에서 빨리 멸종될수록 더 좋습니다. 백인들이 살인죄를 범했다는 건 알지만 원주민을 죽였다는 이유로 교수형에 처해진 백인은 결코 보지 못할 것입니다.”

- 1838년 12월 18일 The Australian에 인용된 배심원 중 한 명의 이야기 -

 

당시 뉴 사우스 웨일즈 식민지 법무 장관이었던 존 플룬켓(John Plunkett)은 포기하지 않고 11명 중 7명에게 별도의 죄목으로 기소를 다시 한다.

 

두 번째 재판이 열릴 때 백인들은 배심원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존 플론켓 법무장관은 담당 판사에게 배심원에 추천되었는데 나오지 않는 자들에게 고액의 벌금을 부과하도록 명령했다.

 

다행히 두 번째 재판이 열리고 원주민 아이를 살해한 혐의로 7명 모두에게 유죄판결이 선고되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죄수들은 1838년 12월 18일 아침에 처형되었다. 영국의 법률 시스템이 원주민에 대한 범죄로 영국인을 처벌하는데 사용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백인들은 원주민 학살보다 영국 시민의 처형에 더 격분했다는 사실이다.

 

▲ 금년에 새로 건축된 마이올 크릭 야외공연장.     © 크리스찬리뷰

 

마이올 크릭 추모제 전날

 

2000년부터 시작된 마이올 크릭 추모 행사는 매해 6월 NSW주 국경일(Queen’s Birthday) 연휴에 열린다. 아마도 추모행사를 주최하는 ‘마이올 크릭 추모 친구들’(FMCM, Friends of Myall Creek Memorial Inc) 재단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학살이 자행된 6월의 공휴일로 정한 것 같다. 올해는 그날이 6월 13일 일요일이다.

 

▲ 추모제를 사흘 앞두고 마이올 크릭에는 48시간 폭우가 쏟아져 많은 도로가 파손되었다.     © 크리스찬리뷰

 

▲ 윈지캐리비(Wingecarribee) 화해 그룹 회원들이 도로 보수 등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 마이올 크릭 기념비 앞에서 윈지캐리비 화해 그룹 회원들과 인터뷰 중인 주경식 편집국장.     © 크리스찬리뷰

 

▲ 마이올 크릭 추모제 전날 추모의 길을 걷고 있는 참배객들.     © 크리스찬리뷰


6월 11일(금) 인버렐에 저녁 늦게 도착한 기자 일행은 다음날 취재 준비를 위해 마이올 크릭 관련 기사를 몇 개 읽고 잠을 청했다.

 

6월 12일(토) 오전 10시, 마이올 크릭 행사장으로 향했다. 구글 지도가 표시해 주는 대로 인버렐에서 B76번 국도를 타고 정확히 35분 거리에 있었다. 마이올 크릭은 도시가 아니다. 말 그대로 학살 현장이고 목축지이다. 근처에는 달랑 메모리얼 홀 하나만 있을 뿐 황량한 초원이어서 관심을 갖고 살펴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 기념비에 머리를 대고 선조들의 만행을 사죄하는 한 여성 봉사자.     © 크리스찬리뷰

 

오전 10시 40분경 도착한 취재팀은 주차장에 주차하고 추모행사가 열릴 예정인 오벌(Oval)로 향했다. 행사 전날인데도 불구하고 미리 온 사람들을 제법 많이 볼 수 있었다. 어제 온 비로 인해 포장되지 않은 흙길은 질척거렸다. 오벌 안에도 빗물이 고여 있어서 내일 추모행사를 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내일 행사를 참석하기 전에 사진 촬영 장소도 살펴보고 ‘마이올 크릭 추모의 길’을 미리 답사를 겸해 걸어 보았다. 추모의 길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7개 석탑들이 세워져 있었다. 석탑에는 마이올 크릭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학살이 벌어진 내용들이 스텐 명판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얼마를 걷고 있는데 몇 사람들이 길을 고르고 길옆의 잡초들을 뽑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중에 리더로 보이는 사람이 친절하게 인사를 걸어왔다.

 

로컬 화해 그룹(Local Reconciliation Group)

 

▲ 거스 존슨 씨(Gus Johnson)     © 크리스찬리뷰


그는 울릉공 밑에 있는 서던 하이랜드(Southern Highlands)지역인 윈지캐리비(Wingecarribee) 화해 그룹(reconciliation group)의 리더 거스 존슨(Gus Johnson)이였다.

 

10명 정도의 동료들과 함께 추모행사에 참여도 하고 추모의 길을 정돈하고자 미리 온 것이었다. 그는 반갑게 인사를 하더니 아시아인이 이 행사에 참여한 것이 신기한 듯 물어 왔다.

 

우리는 시드니 한인 커뮤니티에서 왔으며 크리스찬리뷰에서 취재차 왔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간단한 한국말을 몇마디 하더니 ‘윈지캐리비 화해그룹’에서는 해마다 참여를 하고 있으며 이렇게 미리 와서 잡초도 뽑고 길을 정비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저의 조상은 아이리쉬(Irish)입니다. 저희 아이리쉬도 예전에 영국인에게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영국 백인들이 이렇게 원주민을 대학살한 것은 끔찍한 범죄입니다. 어떠한 회개를 해도 그들의 죗값을 다 치루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라도 이것이 기억되고 해마다 추모제를 지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오히려 원주민들이 우리를 용서하고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백인들이 이것을 모르면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는 감정에 복받쳐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충혈된 눈으로 마이올 크릭 역사를 설명하며 이 추모행사를 참석하고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역설했다.

 

그 덕분에 뉴 사우스 웨일즈의 많은 지역 카운슬 안에 원주민을 지원하는 로컬 화해 그룹(Local Reconciliation Group)들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맨리, 레인코브, 베네롱, 혼스비, 마운틴 드륏과 파라마타를 포함한 웨스턴 시드니 지역, 이외에도 울릉공 등 많은 로컬 지역에서 원주민을 지원하고 협력하는 지역 화해 그룹들이 활동해 오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같이 간 권 발행인과 한인 커뮤니티에서도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한인 커뮤니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고 의기투합했다.

 

거스와 헤어진 후 조금 있다가 다시 한무리의 사람들을 만났다. 무리의 마지막에 있던 한 남자가 반갑게 인사를 전해왔다. 그의 인사를 받으며 역시 우린 한인 커뮤니티에서 참석을 했으며, 크리스찬리뷰에서 취재차 왔다고 설명했다.

 

▲ FMCM 재정이사인 그레엄 코디너 씨와 추모의 길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그러자 그는 이 추모제 행사를 주최하는 ‘마이올 크릭 추모 친구들’(FMCM, Friends of Myall Creek Memorial Inc) 재단의 재정이사인 그레엄 코디너(Graeme Cordiner)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 역시 추모행사를 위해 단체회원들과 함께 내일 걷게 될 길을 먼저 답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레엄은 진지하게 마이올 크릭 현장이 왜 호주 역사에 중요하며 떳떳하지 않은 역사지만 호주가 이것을 왜 기억해야 하는지 힘주어 설명했다.

 

“마이올 크릭에는 세 가지 다른 스토리가 존재합니다. 먼저는 학살을 당한 당사자인 원주민들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학살을 자행한 백인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호주의 다문화 커뮤니티에서 바라보아야 할 스토리가 있습니다.

 

먼저 백인들은 이 부끄러운 역사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저도 조상이 영국이지만 영국인들은 자기들이 우수한 민족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이올 크릭앞에서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부끄러운 역사를 기억하고 다른 문화와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 마이올 크릭 추모행사가 열린 야외 원형 공연장에서 참석자들이 학살당한 원주민 조상들을 기억하며 이 땅에 평화를 간구며 함께 묵념을 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 역사학자 린달 라이언 교수가 마이올 크릭 대학살의 비극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원주민은 이런 아픔을 당하고서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곳에 오면 미움이 보이지 않습니다. 원주민들은 우리를 용서하고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문화국가 호주의 모든 다민족 커뮤니티에서 이러한 정신을 배워 서로를 인정하고 조화롭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이올 크릭의 정신은 화해와 사랑입니다.”

 

그의 마지막말이 가슴에 와 꽂혔다. “마이올 크릭의 정신은 화해와 사랑입니다.”

 

마이올 크릭 추모제

(Myall Creek Memorial Annual Service of Commemoration)

 

6월 13일(주일) 오전 10시 30분에 추모제가 시작되었다. 대강 계수해보니 어림잡아 참석한 숫자가 4백여 명 정도 되었다. 채널 7과 채널 9 로컬 방송에서도 취재를 나왔다.

 

먼저 마이올 크릭 원주민 장로인 수 블랙록(Sue Blacklock)은 추모제에 참석한 참가자들에게 환영의 인사를 따뜻하게 전했다. 이어 사회자가 추모행사에 참석한 귀빈들을 소개한 후 원주민들의 문화를 소개하는 원주민 전통 춤 공연이 이어졌다. 그리고 초청 강사인 린달 라이언(Lyndall Ryan) 교수의 강연을 들었다.

 

린달 교수는 자신은 원주민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마이올 크릭 비극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마이올 크릭 학살은 호주 역사에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중요한 사건이며 후손들에게 교육해야 할 중요한 가치라고 강조했다.

 

▲ 추모의 길 입구에서 연기를 피우는 스모킹 세레머니(smoking ceremony)를 거친 후 추모의 길로 향하는 참가자들.     © 크리스찬리뷰

 

▲ 골드코스트에서 자원봉사자로 참가한 고등학생들.     © 크리스찬리뷰


“우리의 후손들은 마이올 크릭을 반드시 기억하고 정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린달 교수의 강연이 끝난 후 모두 일어나서 마이올 크릭 선언문을 함께 낭독하며 1부 추모행사를 마쳤다. 그리고 마이올 크릭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장소로 그룹을 지어 이동하며 기념비 앞에서 2부 추모행사가 이어졌다.

 

기자 일행은 사진 취재를 위해 서둘러 ‘마이올 크릭 추모의 길’로 향했다. 추모의 길 입구에는 원주민들이 불을 피워 놓고 연기로 정화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추모의 길’에 들어서기 앞서서 연기를 통과하게 하고 이마에 황토선을 그어 원주민 정화의식을 체험하게 했다.

 

삼삼오오 그룹들은 각 기념 석탑 앞에 서서 미리 와서 준비하고 있는 자원봉사자 학생들이 읽어주는 명판 내용을 눈을 감고 들을 수 있었다.

 

매해 추모행사에는 로컬 하이스쿨 학생들과 멀리 퀸즈랜드 하이스쿨 학생들까지 자원봉사로 참석하여 행사를 돕는다. 이렇게 학생들은 자원봉사를 통해 행사를 돕고 또한 참가한 학생들은 추모제를 통하여 화해와 조화의 삶을 배우게 되는 호주 교육의 우수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마이올 크릭 추모 기념 바위 앞에서

 

추모제에 참석한 사람들이 ‘추모의 길’을 통과하여 추모 기념 바위 앞에 모였다. 다시 마이올 크릭 원주민 장로 수 블랙록(Sue Blacklock)은 따뜻한 환영사로 참석자들을 맞이했다.

 

▲ 추모 석탑 앞에서 자원봉사 학생들이 참가자들에게 명판 내용을 읽어 주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그는 “마이올 크릭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이며 누구나 와서 화해하고 서로를 인정하며 조화롭게 사는 것을 배우자”며 참가한 모두를 따뜻하게 환영했다.

 

▲ 마이올 크릭 추모 기념바위 앞에서 2부 추모행사가 진행되었다.     © 크리스찬리뷰

 

▲ 추모제에서 사회를 맡은 마이올 크릭 원주민 장로 키스 문로 씨.(Keith Munro)     © 크리스찬리뷰


환영사가 끝나자 원주민 전통악기인 블로러(Bullroarer)를 돌리는 소리가 기념바위 뒤에서 들려왔다. 블로러는 전통적으로 원주민 의식에서 다른 부족끼리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되는 악기이다. 블로러를 연주한 원주민의 악기와 의식에 대한 소개가 끝난 후 이곳에서 희생당한 원주민들을 위해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곳에 세워진 14톤이나 되는 화강암 기념바위는 지금 있는 장소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하였는데 이곳으로 옮겨와 기념바위로 세우고 1838년 마이올 크릭에서 희생한 원주민들을 추모하는 청동 동판을 붙여 놓았다.

 

존 브라운(John Brown)목사와 마이올 크릭

 

▲ 원주민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 존 브라운(변조은) 목사(오른쪽). 그는 은퇴 후 원주민 선교에 헌신하고 있으며, 지난 2004년 6월 마이올 크릭 추모제에서 “이 땅에 평화를 세우도록 노력하자”고 강조했다.     © 크리스찬리뷰


사실 마이올 크릭 추모제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존 브라운(John Brown, 변조은) 목사의 공로가 크다. 추모행사에서도 공로자로 그의 이름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 불리우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80세 후반의 노장이지만 원래 올해 추모제에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마이올 크릭 추모제 취재를 준비하며 기자는 약 3주 전 존 브라운 목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매년 참석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올해도 참석하는지 확인하고 마이올 크릭에서 만나 짤막한 인터뷰를 할 계획이었다.

 

▲ 추모제 전날 빙 가라 귀 디르 오벌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참가자들이 원주민들과 함께 전통춤을 추며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그는 한국에 선교사로 다녀온 후 호주연합교회 선교부 총무로 오랫동안 봉사해 왔다. 한국 선교에 큰 공헌을 했지만 원주민 선교에도 크게 헌신했다. 마이올 크릭 추모제는 사실 그의 헌신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어떻게 마이올 크릭 추모제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전화로 물어보았다.

 

“제가 만나는 원주민들마다 마이올 크릭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 원주민들은 마이올 크릭 이야기를 했어요. 마이올 크릭에서 대학살이 있었다.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마이올 크릭을 넘어가지 않고는 원주민 선교를 할 수 없겠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원주민 위원회 장로들과 회의하면서 제가 마이올 크릭에 같이 가보자고 제안했어요. 그리고 1998년 10월에 저희가 마이올 크릭에 함께 모였습니다. 마이올 크릭을 본 후 우리 백인들이 원주민과 정말 화해를 하려면 우리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인정해야 하고 마이올 크릭에 원주민 추모 기념비를 세우고 이일을 두고두고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2000년에 호주연합교회의 모든 직분에서 은퇴했지만 마이올 크릭 학살 추모행사에는 깊게 관여했다. ‘마이올 크릭 추모 친구들’(FMCM, Friends of Myall Creek Memorial Inc) 비영리 재단도, 해마다 열리는 마이올 크릭 추모제 행사도 그가 없었다면 아마 조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존 브라운 목사는 올해 추모제에 참석하지 못했다. 손녀가 운전을 해서 손녀와 함께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개인 사정상 참석하지 못하게 되어 아쉽다고 전해왔다.

 

우리도 사람입니다

 

이제 마이올 크릭 재단은 3단계 사업으로 ‘마이올 크릭 교육·문화 센터’를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센터를 통해 마이올 크릭 역사와 진실을 배우고 원주민의 문화를 존중하고 함께 조화롭게 사는 법을 전수하는 데 목적이 있다.

 

추모행사에 참여한 70세 넘은 한 원주민은 자기들은 “학교에 가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라고 하소연을 해왔다.

 

“우리도 사람입니다. 똑같이 교육받고 똑같이 법적인 처우를 받고, 똑같이 호주 시민으로서 호주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우리도 동등한 호주 시민입니다.”

 

원주민들은 비로소 1970대에 들어서 초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것도 각 지역 학교마다 편차가 심했다. 호주는 2008년 케빈 러드 정부에 와서야 비로소 원주민에게 ‘Sorry’를 외쳤다. 백인들은 원주민의 땅을 빼앗고, 무참히 죽이고, 아이들 교육을 명분으로 부모와 생이별을 시켜 원주민의 전통과 문화를 멸절시켜 왔다.

 

▲ 마이올 크릭 추모 행사에서 만난 사람들.     © 크리스찬리뷰

 

그외에도 원주민들에게 행한 악행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제라도 원주민들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미안하다’라고 선언하고 원주민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원주민들의 인권을 법으로 인정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화해와 인정

(Reconciliation and Acknowledgement)

 

마이 올 크릭 학살 사건은 호주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건이다. 바로 영국 식민지의 법이 원주민과 백인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도록 식민지 행정부가 개입한 첫 번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이올 크릭에서의 학살은 호주 역사의 모멘텀이다. 마이올 크릭 학살 기록을 통해 1838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백인들에게 원주민 학대를 상기시켜 왔기 때문이다.

 

이제 마이올 크릭 추모를 통해 백인들과 원주민들이 화해하고 함께 살아갈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마이올 크릭 ‘추모의 길’ 끝에 세워진 기념 바위 동판에 새겨진 글귀가 이를 증명한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역사의 진실을 인정하고 화해의 행동으로 호주 원주민과 비원주민 호주인 그룹이 함께 2000년 6월 10일에 이 기념바위를 건립합니다.”

 

마이올 크릭에서 만난 백인들은 모두 그들의 선조가 행한 범죄를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마이올 크릭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이올 크릭에서 만난 원주민들은 모두 화해와 용서를 이야기했다.

 

마이올 크릭은 화해와 회복의 장소이다. 서로의 문화를 인정하고 화합을 강조하는 마이올 크릭에 한인 커뮤니티가 무엇을 공헌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시드니로 내려오는 내내 가슴이 뜨거웠다.〠

 

글/주경식|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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