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정부 설립에 큰 공을 세운 알프레드 디킨

Alfred Deakin (1856-1919) Australia’s 2nd Prime Minister

정지수/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1/06/28 [15:07]
▲ 호주 제2대 총리를 지낸 알프레드 디킨. (1900)     


호주 제2대 총리였던 알프레드 디킨 (Alfred Deakin, 18 56~1919)은 연방 정부를 설립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이번 호에서는 그의 삶과 업적에 대해 살펴 보기로 한다.

 

출생 배경

 

영국 출신인 그의 아버지 윌리암 디킨(William Dea- kin)은 15살 때부터 방문 판매자로 일을 했으며, 1849년에 사라 (Sarah)를 만나 결혼을 했다. 1847년 영국에서 경제 공황이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힘든 삶을 살았다.

 

윌리암 디킨과 그의 아내 사라는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호주로 이민을 선택했다. 그들은 1850년 3월 호주 아들레이드(Adelaide)에 도착했다. 그해 7월에 첫 번째 딸, 캐서린(Catherine)이 태어났다.

 

이 당시 윌리암은 가게 점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1850년대에 멜번 주변에서 금광들이 발견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금을 찾기 위해서 멜번으로 몰려 들었다. 윌리암도 아델레이드를 떠나 멜번으로 이주해 운송업자로 일을 했다.

 

1856년에 알프레드 디킨이 태어났고, 윌리암은 직장에서 관리자로 또한 회계사로 일을 하게 되면서 중산층의 삶을 살게 되었다.

 

▲ 초등학교 시절 알프레드 디킨     

 

어린 시절

 

알프레드 디킨(Alfred Deakin)은 멜번 남쪽에서 자라났다. 5살 때 그는 11살의 누나 캐서린과 함께 기숙사가 있는 여자 초등학교로 보내졌다. 그의 어머니인 사라가 병에 걸렸기 때문에 자녀들을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보낸 것이다.

 

여자 초등학교에서 알프레드 디킨은 유일한 남학생이었다. 한편 알프레드 디킨이 8살이 되었을 때, 그는 멜번 그래마 스쿨(Melbourne Grammar School)로 전학을 가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 호주 연방 첫 번째 의회 개원 (1901. 5.9)     

 

대학 생활

 

알프레드 디킨은 1871년에 멜번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그는 법정 변호사가 되고 싶은 열망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그는 공부에만 전념할 수가 없어서 낮에는 개인 교사로 일을 했고 저녁에는 강의를 들었다.

 

한편, 당시 빅토리아 주에서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 대학 학위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알프레드 디킨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변호사 학교에 등록을 해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법률 공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독서를 좋아했던 그는 법률 공부보다는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법률가의 꿈을 접고 작가나 철학자 또는 시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 호주 연방 첫 번째 의회 개원 (1901. 5.9)     

 

그는 많은 시들을 썼고, 1875년에는 드라마도 한편 저술해 출판했다. 그리고 1878년부터 알프레드 디킨은 ‘디 에이지’(The Age)라는 신문사에 취직해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주로 정치와 문학 그리고 리더들에 관한 글을 썼다.

 

정치 활동

 

알프레드 디킨이 정치계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879년이었다. 그해 실시된 빅토리아 주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는 웨스트 버어크(West Bourke) 선거구에 출마해 79표 차이로 승리했다. 하지만, 투표 용지 부족으로 많은 유권자들이 투표를 못했기 때문에 알프레드 디킨은 당선 즉시 사임을 선언했다.

 

▲ 데일리 텔레그래프(시드니)에 실린 디킨의 풍자 만화.(1886)     

 

이듬해 2월에 열린 보궐 선거에서 그는 15표 차이로 낙선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에 열린 조기 총선에서 그는 당선되었다. 이후 1883년부터 1889년까지 상수도국 국장을 역임했고, 1890년에는 보건부 장관이 되었다. 1889년에 실시된 빅토리아 주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정치계에 발을 들여 놓은 이후 알프레드 디킨은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 왔다. 1890년에 그가 속한 정부는 항만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을 때 민병대들을 불법적으로 활용해 실각했다.

 

또한 1893년에는 부동산 가격 급락으로 인해 그는 많은 경제적 손해를 보았다. 그래서 그는 법원으로 돌아가 다시 변호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편, 알프레드 디킨은 내각 직을 맡으라는 모든 제안을 거부하고 영국 식민지가 아닌 독립적인 호주 연방 정부를 설립하기 위해 전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1900년에 제정된 호주 연방 정부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는데 깊이 관여했다.

 

알프레드 디킨은 독립적인 호주 연방 정부 설립을 원했다. 호주 연방 정부 헌법은 국민투표를 거쳐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호주 내에 있던 모든 주들은 호주 연방 헌법을 사용하게 되었고, 호주는 하나의 독립 국가가 되었다.

 

1901년에 호주 연방 정부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때 알프레드 디킨은 발라랏 선거구에서 연방 정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그는 법무부 장관이 되었고, 당시 총리였던 에드문드 바톤(Edmund Barton)이 해외 방문 중에는 총리 대행이 되기도 했다. 법무장관으로 그는 연방 대법원을 설립했다.

▲ 알프레드 디킨 총리의 국회의사당 초상화 (1914, 프레데릭 맥커번 작)     


 

1903년 9월 24일에 보호주의당(Protectionist Party) 소속인 알프레드 디킨은 호주의 두 번째 연방 정부 총리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알프레드 디킨은 자신의 정책이 국회에서 거부당하자 집권 216일 만인 1904년 4월 27일에 스스로 사임했다.

 

그의 사임을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노동당 소속인 크리스 왓슨(Chris Watson)이 제3대 총리가 되어 113일 동안 직무를 보았고, 이후에 자유무역당 (Free Trade Party) 소속인 조지 리드 (George Reid)가 제4대 총리가 되었다.

 

▲ 호주 연방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시티즌 아치.     © 크리스찬리뷰

 

▲ 현 총리로 디킨의 초상화가 그려진 어드밴스 오스트레일리아 엽서.     


한편, 1905년 6월 24일에 알프레드 디킨은 자신의 선거구인 발라랏 (Ballarat)에서 조지 리드 총리의 실정과 노동당과 자유무역당의 정치적 실정과 정책적 실정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의 연설은 ‘디 에이지’(The Age) 신문에 게재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알프레드 디킨의 비판에 동의했다.

 

한편, 국회위원들은 알프레드 디킨의 연설을 불신임 결의안으로 여겼다. 조지 리드 총리는 국회 해산과 조기 총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노스코트 총독 (Lord Northcote)은 이를 거부했다.

 

다시 알프레드 디킨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는 1905년 7월 5일에 총리로 임명되었고, 3년 131일 동안 성공적으로 총리직을 수행했다. 이 시기에 그는 호주 통화 (화폐)법과 저작권법과 검역법을 포함한 많은 법안들을 입법했다. 또한 1906년에는 인구조사 통계청을 신설했고, 1908년에는 기상청을 신설했다.

 

알프레드 디킨은 1908년 11월 13일에 노동당에 의해 다시 한번 사임하게 되었다. 노동당의 앤드류 피셔 (Andrew Fisher)가 수상이 되었다. 하지만, 알프레드 디킨은 자신의 정적이었던 자유무역당(Free Trade Party)의 조지 리드 (George Reid)와 연합해 다시 정권을 잡았다.

 

그는 1909년 6월 2일에 다시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에 실시된 연방 선거에서 그가 속한 정당은 노동당에게 패배했고, 앤드류 피셔(Andrew Fisher)가 다시 수상이 되었다. 알프레드 디킨은 3년 동안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연방 정부 선거가 있기 전에 사임을 했고, 그의 후임자인 조셉 쿡 (Joseph Cook)이 선거에서 승리해 총리가 되었다.

 

▲ 자유당 지도자로 마지막 날 국회의사당을 떠나는 알프레드 디킨. (1919. 1.)     

 

▲ 알프레드 디킨과 그의 아내 패티 여사. (1907)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 그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그는 혈관성 치매에 걸려 기억력이 쇠퇴했고, 토론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상실해 갔다. 1916년 그는 딸이 사는 런던을 방문했고, 1917년 호주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1919년 10월 7일 63세의 나이로 알프레드 디킨은 자택에서 사망했다.

 

알프레드 디킨의 업적들

 

그의 정치적 업적 이외에도 눈에 띄는 업적은 정치 칼럼니스트로서의 업적이다. 그는 ‘디 에이지’(The Age) 신문에 정치적 칼럼을 쓰며 정치 칼럼니스트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익명으로 ‘런던 모닝 포스트’(London Morning Post) 신문에 정치적 칼럼을 투고했다. 그가 총리로 활동할 때도 지속적으로 정치적 칼럼을 썼다. 그는 작가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의 정치 칼럼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정치 철학과 그의 정책들을 살펴볼 수가 있다.

 

▲ 연방국회의사당을 떠나는 알프레드 디킨의 장례행렬을 국회의원들이 지켜보고 있다. (1919. 10.9)     

 

그의 정치 칼럼들은 1968년에 ‘연방 호주’ (Federated Australia)라는 제목으로 편집돼 책으로 출판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알프레드 디킨을 ‘상냥한 알프레드’ (Affable Alfred)라고 부르며 좋아했다. 자유당(Liberal Party)에서는 알프레드 디킨을 자유당의 창시자로 여기고 있다.

 

알프레드 디킨은 총리였을 때 명예 학위를 거부했다. 1900년과 1907년에 옥스퍼드 대학(University of Oxford)은 그에게 명예 민법 박사 학위를 수여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또한 1912년에는 캠브리지 대학(University of Cambridge)의 명예 법학박사 학위도 거절했다. 그는 개인적인 명예를 위한 명예박사 학위를 거절한 것이었다. 그의 사후에 그를 기념하기 위해서 1974년에 멜번에 설립된 공립대학이 디킨 대학 (Deakin University)으로 명명되었고, 1969년에는 그의 초상화가 호주 우표로 발행되었다.

 

개인적인 삶

 

알프레드 디킨의 개인적인 삶은 행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패티(Pattie Deakin)여사와 결혼해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렸으며 3명의 딸들을 낳았다. 또한 4명의 손주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사업 경영자, 사회 사업가, 저널리스트, 그리고 호주비밀정보국 국장이 되었다.

 

한편, 패티 여사는 1934년 12월 30일에 사망했는데, 그녀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어린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유치원(kindergarten)과 놀이터(playgrounds) 시설을 늘리는 운동을 펼쳐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알프레드 디킨은 호주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적인 연방 국가로 변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총리이다. 그는 호주를 독립적인 연방 국가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노력한 총리로 기억될 것이다.〠

 

정지수|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