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대중이 볼 수 있는 ‘시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e)를 만들어 최초의 영화를 만든 사람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시네마토그라프’라는 말은 ‘움직임을 기록한다’는 의미이다. 에디슨이 발명한 ’케네토스코프‘처럼 한 번에 한 사람만 감상할 수 있었던 기존 방식과는 달리, ’시네마토그라프‘는 여러 사람이 동시에 하나의 영상을 감상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영화는 대중과 교감하는 매체이므로 ‘시네마토그라프’를 영화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오늘날 사용하는 ‘시네마’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최초의 영화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의 한 카페에서 ‘뤼미에르 형제’는 자신들이 만든 작품을 영화사인 고몽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때 상영된 세계 최초의 영화는 ‘열차의 도착’이라는 50초의 짧은 내용의 작품이었다. 당시의 기술로 필름에 담을 수 있는 최대 시간은 90초였다.
뤼미에르 영화 필름은 대부분 정적 화면이지만, 촬영 기사들의 독창성이 아주 뛰어나 최초로 줌이나, 정지 카메라 상태에서 파노라마 화면으로 편집하는 영화 촬영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최초의 장편 영화
1906년 찰스 타이트 감독이 제작한 세계 최초 장편영화로 19세기 후반 호주의 ‘로빈 후드’로 불렸던 ‘네드 켈리’의 영웅담을 그린 작품이다. 세계 최초의 장편 영화는 미국도 아니고 유럽도 아닌 호주에서 만들어졌다.
1906년 첫 상영시 67~70분 가량의 분량이었으나, 당초 제작되었던 필름이 사라져 원형을 볼 수 없었다. 이후 개인 소장가와 영국 국립기록보존소 등에서 발견된 필름 조각들을 호주 국립영상자료원의 디지털 복원을 통해 총 18분 분량의 필름을 완성,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최초의 멀티미디어 공연
1900년 9월 13일 멜번 시청에서 ‘십자가의 군병들’ (Soldiers of the Cross)이 공연되었다. 호주 구세군의 라임라이트(Limelight) 부서에서 공연하였다. 초기에는 최초의 장편영화라는 칭호까지 받았지만, 영화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가 함께 연출되어 인정되지 않았다.
2천 명이 넘는 관객 앞에서 90초짜리 16편의 영상을 비롯하여, 2백 장 이상의 매직-랜턴 슬라이드 필름, 오케스트라와 찬양대 그리고 호주 구세군 사령관인 ‘허버트 부스’(Herbert Booth)의 감동적인 강연까지 무려 2시간 30분 동안 공연을 하였다.
이때 다리를 건너려는 병사가 달려오는 속도와 몸의 무게 때문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물 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관객들은 가난한 크리스찬 여인의 탈출과 당황하는 로마 병사를 보며 긴장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공연 내내 숨을 죽이고 영화와 슬라이드 필름에 집중하고 있던 관객들은 소리를 높여 환호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페리 사관은 ‘Ballarat Prisons Gate Brigade Home’에서 출소자를 위한 사역을 하고 있었다. 1891년 멜번 본영에서 근무하던 프랭크 배릿(Frank Barritt) 사관이 그곳을 방문하였을 때 페리 사관이 매직 랜턴 프로젝터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페리 사관은 매주 토요일 밸러랫(Ballarat)에서 프로젝트를 사용하여 홍보하고 있었다. 구세군 본영으로 돌아온 배릿 사관은 페리 사관에게 프로젝트와 함께 멜번으로 오라고 하였다. 배릿 사관은 특별 부서를 만들어1891년 9월에 호주를 방문할 구세군 대장인 윌리엄 부스를 홍보할 계획이었다.
허버트 부스 사령관은 페리 사관을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자체적으로 필름을 만들 것을 요청하였다.
1898년 5월 구세군 멜번 시티 교회에서 뤼미에르 필름과 랜턴 슬라이드 그리고 구세군 음악이 연합한 공연이 있었다.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선교는 구세군 교회는 물론 구세군 사회사업과 사관학교에서도 사용되었다.
1900년대의 사회는 단순하였다. 당시에 멀티미디어로 선교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때이다. 구세군은 창조적인 새로운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였다. 길가의 건물에 슬라이드를 비쳐 가로전도를 하기도 했다. 구세군 사람들에게 교회로 모이라고 하는 대신, 사람들을 찾아 거리로 나가는 적극적인 선교를 하였다.
1901년 1월 1일 구세군은 호주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나라의 역사의 현장을 필름에 담았다. 역사가 크라이스트 롱(Christ Long)은 그날의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지속적인 필름의 프레젠테이션, 길고 중요한 내용,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지속적으로 많은 산업에 영향을 끼쳤다.”
1901년부터 1905년까지 구세군은 호주에서 만드는 80% 이상의 필름을 제작하였다. 필름은 구세군의 복음전도와 사회사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제임스 헤이(James Hay) 새로운 호주 사령관이 1909년 9월 부임하면서 구세군의 영상사업은 사양길을 걷게 되었다. 1910년에 라임라이트 부서는 문을 닫고, 장비는 팔리고 필름들은 사라졌다.
제임스 헤이 사령관은 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구세군에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우리를 진정한 구세군에 합당하지 않은 사악한 길과 가벼움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내가 이 사업을 완전하게 끝낸다.”
미디어와 관련된 구세군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다. 아름답다는 것은 시대를 선도하는 창조적이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이고, 슬프다는 것은 필름사업이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오늘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멀티미디어 시대이다.
더구나 코로나 시대는 미디어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미디어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미디어를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선이 될 수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다.〠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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