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개척 초기 100년, 기독교 학교의 시대
 
정지수/크리스찬리뷰
▲ 리차드 존슨 목사가 록스 지역에 세운 호주 최초의 교회와 학교 건물.     ©크리스찬리뷰

 

호주 기독교 교육 학교(Australian College of Christian Education)의 설립자인 알렌 로버츠(Allen Roberts) 박사는 호주 개척 초기 100년 동안의 기독교 학교 시대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그의 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호주 개척 초기 100년 동안 기독교 학교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살펴 보자.

 

교회 학교, 호주 최초의 학교

 

호주에서 처음 교육을 실시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교회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호주 기독교 학교 운동(Australia's Christian Dayschool Movement)의 역사는 식민지 시대가 시작할 때부터 정부가 공식적으로 교육을 시작한 1880년까지 이어진다.

 

호주의 초기 식민지 시대에 교회가 실시한 성경을 바탕으로 한 교회 학교 교육이 당시 많은 학생들의 영적, 도덕적, 학문적 필요를 충족시켰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기독교 학교 운동을 뒷받침하는 특정 원칙이 무시되면서 호주의 교육이 역동성을 잃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다시 성경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교육이 활성화되어 기독교의 역동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본다.

 

기독교 학교의 역사

 

1793년 8월 25일에 호주 최초로 지금의 록스(The Rocks) 지역에 교회 건물이 세워졌다. 이 교회 건물은 호주 식민지 최초의 교목인 리차드 존슨(Richard Johnson) 목사에 의해 세워져 약 5년 동안 교회와 학교로 사용되었다.

 

주일에는 예배를 드렸고, 주중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로 사용되었다. 호주 개척 초기에 학교들을 세운 사람들이 교회와 선교 단체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은 목회자들이었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 호주 식민지 최초의 리차드 존슨 목사   ©크리스찬리뷰DB     

 

그들은 적은 재정을 후원받았지만, 헌신적인 노력으로 교회 건물을 건축해 교회와 학교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성경을 바탕으로 교육하는 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새롭게 건국된 호주와 미국은 초기 교육 역사에서 많은 공통점을 공유한다. 첫 번째 공통점은 목회자들이 학생들을 교육시켰다는 점이다. 두 번째 공통점은 영국의 복음주의 전통을 공유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퀘이커(Quaker) 교도인 윌리엄 펜(William Penn)과 청교도인 존 드루리(John Drury)를 통해 설교와 교육을 모두 포함하는 총체적인 선교 활동이 펼쳐졌다. 이 두 목회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은 식민지의 젊은이들에게 종교적, 도덕적 교육의 필요성을 크게 강조했다.

 

호주에서는 영국 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가 파송한 리차드 존슨(Richard Johnson)과 사무엘 마스덴(Samuel Marsden)과 같은 목회자들이 교육 사역을 통해 복음주의식 총체적 선교 활동을 펼쳤다.

 

많은 영국의 복음주의자들과 단체들이 호주의 교회 학교 운동에 큰 관심을 갖고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들의 지원으로 많은 목회자들이 호주 개척 초기에 목회 사역과 교육 사역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호주 개척 초기 100년 동안 기독교 교육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자.

 

호주 개척 초기에 리차드 존슨(Richard Johnson) 목사는 자신이 섬기게 될 죄수들의 도덕적 상태에 대해 깊이 우려했고, 그들을 위한 기독교 교육 사역을 펼칠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존슨 목사는 영국의 한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뉴 사우스 웨일즈(NSW) 주의 문맹 수감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울 준비가 된 사람을 모집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호주 식민지에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가려면 젊은 세대들을 키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무엘 마스덴(Samuel Marsden) 목사도 젊은 세대의 교육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런던에 있는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 식민지의 미래 희망은 자라나는 세대에 달려 있습니다. 악하게 늙어가는 죄수들에게서는 거의 희망을 기대할 수 없지만 적절한 교육을 통해 그들의 자녀들을 교육한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희망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젊은 세대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목회자들뿐만이 아니었다.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펜서(Spencer) 재무 장관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도덕 교육과 기술 교육이 모두 동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킹(King) 총독도 청소년 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학교 설립을 크게 장려했다.

 

그는 죄수들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들을 위해 자신의 사적 기금으로 고아원을 설립하고 후원했다. 이 고아원에서는 학교도 운영했는데, 원생들에게 재봉기술, 제화기술, 원예기술 등을 가르쳤다.

 

호주 식민지 개척 초기에 많은 정치인들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호주 식민지가 도덕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고, 이대로 방치해 두면 다음 세대들에게도 악한 영향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 그들은 젊은 세대의 도덕적 타락을 막고 그들을 훌륭한 시민으로 키워내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기술 교육과 더불어 도덕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교회의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 젊은 세대들에게 인간이 가져야 할 도덕성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19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브로우톤 (Broughton) 주교는 도덕적 타락 문제에 대한 유일한 실행 가능한 해결책이 종교 교육에 있다고 달링 총독(Governor Darling)에게 편지를 보냈다.

 

“불행하게도 이 식민지 주민들의 타락성은 많은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되었으며, 총독님도 크게 걱정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도덕 교육이 필요하며, 이는 기독교 교육을 통해서 이룰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식민지 개척 초기에 호주 개신교는 기독교 교육을 기독교 윤리와 교리를 가르치는 수단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교리를 이해하고 기독교 진리를 이해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문해력을 높이는 수단으로 보았다.

 

1790년대 영국 성도들은 성경의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밝혀지려면 대중에게 읽기를 가르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신앙의 전통이 호주까지 전해졌고, 이는 호주 식민지 개척 초기에 주일학교 운동, 교회 학교 운동, 도서관 운동 등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호주 교회 교육의 특징

 

호주 식민지 개척 초기에 교회 교육의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개척 초기에 세워진 교회 학교의 교사들은 학생들의 영적인 필요와 현세적 필요를 모두 충족시키는 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교사가 필요했기 때문에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교사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사무엘 마스덴 목사(Samuel Marsden)는 개인적인 경건함과 기독교 지식을 전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소유한 사람이 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주 개척 초기 몇 년 동안에는 교회 학교 교사의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영국이나 유럽에서 이제 막 개척되기 시작한 식민지인 호주에 가고 싶어하는 교사들도 찾아 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가진 소수의 교사들이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마음으로 호주로 떠났다.

 

실제로 이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교사였다. 예를 들어 키싱 포인트 채플 학교(Kissing Point Chapel Schoolroom)를 운영했던 매튜 휴(Matthew Hughes)는 아일랜드에서 존 웨슬리(John Wesley)를 따르는 사람들의 기도 모임에 참여했던 '진실한 개종자' 였다.

 

그가 운영했던 키싱 포인트 채플 학교(Kissing Point Chapel Schoolroom)는 1800년 7월에 사무엘 마스덴(Samuel Marsden) 목사와 리처드 존슨(Richard Johnson) 목사에 의해 봉헌되었다.

 

또한 윈저 학교(Windsor School)는 노포크 섬(Norfolk Island)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제이 헤리스(J. Harris) 목사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그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식민지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도덕적 원리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죄악 된 세상에서 구원하는 것이 기독교 교육의 근본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크룩(Crook) 교장이 섬겼던 파라마타 학교(Parramatta School)에서도 기독교 교육이 실시되었다. 크룩(Crook) 교장 또한 선교사였다.

 

호주 식민지 개척 초기에는 교장을 비롯해 교사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교사들을 임명할 때는 항상 교사들이 학생들의 영적, 도덕적 교육에 적합한 사람인지를 확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기독교 정신에 적합한 교사들을 선별해 기독교 학교에서 가르치도록 했기 때문에 기독교 교육 사업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살펴 볼 것은 교과 과정이다. 호주 개척 초기에는 교육의 목표가 분명했는데, 그것은 학생들의 영적인 면과 도덕적인 면을 성장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학교 교과 과정에서도 이를 반영해 영적 가르침과 도덕적 가르침에 중점을 두었다. 성경을 기초로 한 기독교 교리 교육과 도덕 교육이 교과 과정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읽기, 쓰기, 말하기와 같은 다양한 교육 영역은 기독교 교리 교육의 핵심 내용과 관련이 있었다.

 

예를 들어, 시드니의 하이드 파크(Hyde Park)에 세워진 교회에서 운영했던 학교는 16세기에 루터와 칼빈이 세운 개신교 전통에 기반을 둔 교육 과정을 통해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학생들은 교회 교리서를 암기해야 했고, 월요일마다 리처드 존슨(Richard Johnson) 목사 앞에서 암송해야 했다. 그리고 음악 시간에는 찬송가를 배웠고, 영어시간에는 기독교 문서들을 가지고 영어 철자를 배웠다.

 

한편, 1820년대 말에 영국의 교육계에서는 한 명의 교사가 고학년 학생들이나 유능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 학생들이 저학년 학생들이나 학업에 부진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니터리얼 시스템 (Monitorial System)이 크게 유행했다.

 

이 시스템은 소수의 교사가 많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식민지였던 호주에서도 크게 유행했다. 모니터리얼 시스템(Monitorial System)을 개발한 교육학자들은 교사 1명이 5백 명의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국에서는 1820년말까지 약 25만 명의 학생들이 모니터리얼 시스템(Monitorial System)을 적용한 학교에서 공부했다. 호주에서도 적합한 교사를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이 교육 시스템이 받아들여졌고, 크게 유행했다.

 

학생들에게 기독교 정신을 불어 넣어주고, 공동체 정신을 심어주는데 이 교육 방법이 사용된 것이었다. 최근에 모니터리얼 시스템(Monitorial System) 교육 원칙들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일부 학교에서는 이 시스템을 학교 교육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로 살펴볼 것은 학교 재정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초기 호주 식민지 시대에는 교회와 선교 단체가 교육 비용을 지원했다. 교회와 선교 단체는 학교를 설립하고, 교사들을 배치하고, 학교 운영을 책임지는 역할을 감당했다.

 

이 당시에는 아직 공립학교가 설립되지 않았으며 식민지 정부가 교육을 주관할 만큼 조직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육은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 학교에서 진행되었다.

 

재정이 빈약한 식민지 정부는 교육에 투자할 재정이 부족했다. 영국인들은 영국 정부가 호주 식민지의 교육 사업에 재정을 투자할 것을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호주 식민지 개척 초기에는 교회들이 자신들이 세운 학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식민지 정부도 부족한 예산 중에 일부를 기독교 학교들을 지원하는데 사용하였다. 성공회(Anglican Church) 의 경우 정부로부터 교회와 학교를 지을 수 있는 부지를 지원받았다.

 

한편, 시간이 지나가면서 교회들과 선교단체들은 호주에 더 많은 학교가 필요하게 되면서 교육 사역을 수행하는데 매우 큰 부담을 갖게 되었다. 많은 학교들을 운영하고 새로운 학교들을 신설하기 위해서 더 많은 재정이 필요했다.

 

재정적 압박을 받은 교회들과 선교단체들은 정부에 지원금을 요청했다. 정부는 교육에서 교회들과 선교단체가 차지하는 비중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요청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정부는 예산을 편성해 교회들과 선교단체들이 운영하는 학교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재정지원은 불가피하게 정부가 사립학교들을 통제하는 권한을 갖게 해 주었다.

 

평가

 

호주 식민지 개척 초기의 교육 시스템을 평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문해력의 영역과 도덕적 영역에서 기독교 학교들이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 평가해보도록 하자.

 

먼저, 문해력의 영역에 대해 살펴보자. 앞에서 논의된 교회 학교 교육이 식민지에서 문해력 수준을 어느 정도 증가시켰는지 정확하게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에 교회 학교 교육이 문맹 퇴치에 기여했다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주장만은 아니다.

 

두 번째로 도덕적 영역에 관하여는 식민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죄수들, 만기 출소자들 및 자유 이민자들보다 범죄율이 더 낮았다. 기록에 의하면 호주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은 많은 죄수들의 자녀들이 부모의 부도덕한 삶을 거부하고 독립하기를 열망했다고 한다.

 

호주에서 태어난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우리는 1828년판 에딘버러 리뷰(The Edinburgh Review) 잡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잡지사에서 보낸 특파원은 호주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평범한 수준 이상으로 온화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19세기 초에 다음과 같은 범죄율에 대한 분석이 나왔다. 자유 이민자의 범죄율은 4.23%, 만기 출소자들의 범죄율은 15.4%, 죄수의 범죄율은 10.4%였던 반면, 호주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범죄율은 3.43%에 불과했다.

 

이와 관련하여 버톤(W.W. Burton) 대법원 판사는 호주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준법 정신이 높아 자신이 판사로 근무하는 동안 그들이 살인이나 강간과 같은 중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한, 그는 단지 경범 죄를 지은 몇몇의 사람들을 재판한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무엘 마스덴 목사(Samuel Marsden)가 주장한 것처럼 호주 식민지 초기 개척 당시 태어난 사람들의 금주, 정직, 근면과 기독교 학교의 교육 사이에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교파 간의 갈등

 

교회들과 선교단체들이 영국의 식민지인 호주에서 교육 사역에 집중하면서 교파 간의 갈등이 더욱 깊어지기 시작했다.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는 영국 정부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았고, 호주에서도 식민지 정부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한편, 천주교와 장로교는 영국 국교회가 정부로부터 더 많은 후원을 받자 이에 불만을 품고 정부가 공정하게 지원해 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럽에서 있었던 교파 간의 갈등이 호주에서도 벌어질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교파 간의 갈등은 1830년에 교회와 학교 연합회(Church and Schools Corporation)를 설립하면서 폭발했다.

 

영국 정부는 이 연합회를 설립하면서 명시적으로 호주 내의 영국 왕실 토지의 7분의 1을 영국 국교회 성직자들과 선교사들을 후원하고 교회 사역과 학교 사역을 지원하는데 할당한다고 밝혔다.

 

다른 교단들은 이러한 영국 정부의 정책에 극렬히 반대했다. 먼저, 천주교의 테리(J.J. Therry) 신부는 영국 정부와 식민지 정부가 개신교 학교들에게는 왕실 토지를 제공하는 등 다양한 후원을 하는 반면, 천주교가 운영하는 학교나 고아원에는 재정적 지원을 해주지 않고 있다고 강력히 비난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천주교 교육 협의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하며, 천주교의 교육 사역을 위해서 한 달에 3펜스를 기부해 줄 것을 천주교 성도들에게 부탁했다.

 

한편, 장로교에서는 존 던모어 랑(John Dunmore Lang) 목사가 영국 정부의 교육 후원 정책을 강력히 비난했다. 그리고 영국 정부와 호주 식민지 정부는 천주교와 장로교에서 교육 후원 정책을 강력히 반대하자 1833년에 모든 교육 후원 정책을 다시 검토하기로 결정하였다.

 

기독교 교파 간의 또 다른 갈등은 1833년에 버크(Bourke) 총독의 정책 때문에 발생했다. 버크 총독의 정책에 따라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학교에 입학해 공부할 수 있었다. 학교는 교과과정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쳐야만 했다. 더 이상 교사들은 자신들이 속한 교단의 교리를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학교가 속한 교단의 목회자가 학교에 들어가 자신이 속한 교단의 자녀들에게 종교 교육을 제공할 수는 있었다.

 

모든 교파는 이러한 버크 총독의 정책을 강력히 반대했다. 성공회의 브로우톤(Broughton) 주교는 학교에서 성경을 자유롭게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을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장로교의 존 던모어 랑(John Dunmore Lang) 목사도 브로우톤(Broughton) 주교의 주장에 동의하며, 버크(Bourke) 총독에게 세속적인 교육 정책을 철회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한편, 이러한 논쟁을 통해 정부가 교육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는 사실이 부각되었다. 버크 총독은 정부가 학교를 세우고, 교장들을 임명하고, 교사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호주 정부의 교육 제도가 자리를 잡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호주 정부는 공립학교와 사립학교를 분리해서 관리하기로 결정했다. 호주 정부는 국가에서 직접 운영하는 공립학교들을 위하여 국립 교육 위원회를 설립했고, 사립 학교들을 위해서는 재정적 지원을 감독하는 교단 교육 위원회를 설립했다.

 

정부의 교육 정책에 강력히 반대했던 장로교의 존 던모어 랑(John Dunmore Lang) 목사와 천주교의 브로우톤 (Broughton) 주교는 당시 호주 사회의 상황이 급격히 변하자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해야만 했다.

 

골드러시 이후에 호주로 몰려온 이민자들은 종교 교육에 큰 관심이 없었고, 정치와 종교를 철저히 분리하고 종교 색체가 없는 국가 건설을 추구했다.

 

또한 민주주의 사상이 발전하면서 정부가 주도하는 공교육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더 이상 교회가 교육의 주도권을 갖고 호주의 교육을 좌지우지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남호주(South Australia)에서는 새로 선출된 입법부가 1851년에 정부의 사립 학교 지원을 모두 철회하고 비종파적 교육에 전념하는 최초의 주가 되었다.

 

한편, 뉴 사우스 웨일즈(NSW) 주에서는 공립학교의 등록 학생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사립 학교 등록 학생 수가 크게 감소했다. 1867년 공립학교의 학생 수는 2만 8천 명이었고, 1879년에는 3배 이상 증가하여 8만 8천 명에 이르렀다. 이에 반해 교회에서 운영하는 사립 학교는 같은 기간 재학생 수가 31만 7천 명에서 3만 3천 명으로 줄었다.

 

▲ 호주 식민지 시대에 호주교회가 원주민 어린이들에게 교육을 시키고 있는 장면.©크리스찬리뷰DB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교회가 운영하던 사립학교들이 쇠퇴하기 시작했고, 교육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크게 늘었다. 개척 초기에 교회 학교가 누렸던 자율성과 독립성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또한 교회도 많은 학교들을 운영하는데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1880년에 뉴사우스웨일즈(NSW) 주정부는 공교육 법안을 발표했는데 다른 주들도 비슷한 법안을 재정해 발표했다. 이 공교육 법안에 따르면 모든 학교 교육은 엄격하게 비종파적이어야 했다. 특정 교단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종교에 관한 일반적인 내용을 가르칠 수 있었지만 교리를 가르칠 수는 없었다. 또한 모든 학교는 대부분의 시간을 일반 과목을 가르치는데 사용해야 했고 특정 기독교 종파에 속한 자녀들이 자신들이 속한 교단의 교리를 배우기 원한다면 각 교단의 성직자들이 하루에 1시간 이내로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 교육 법안은 중앙집권화되고 통합되고 엄격하게 표준화된 학교 시스템을 추진하는 정부의 강력한 조치였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찬성하는 사람들이 나뉘어져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논쟁의 핵심은 도덕적, 종교적 교육의 위치였다.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교육이 가장 최선인가? 도덕적, 종교적 교육이 호주 사회에 꼭 필요한 교육인가?

 

뉴 사우스 웨일즈(NSW) 주의 교육 위원회의 수석 감사관이었던 윌리엄 윌킨스(William Wilkins)는 국가 교육 시스템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종교적 중립을 핵심 원칙으로 채택한 국가 교육 시스템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가 교육 시스템을 통해서 학교 교육이 더 쉽게 감독되고 더 효과적으로 통제되며 훨씬 더 저렴하게 관리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천주교의 바간(Vaughan) 대주교는 국가 교육 시스템을 호주 교육에 심각한 위협으로 보았고 이를 ‘하나님을 배제한 교육’이라고 비난하며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무지보다 더 큰 저주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도덕과 종교의 가르침을 떠나서 가르치는 것이다. 대중에게 쓰기와 산수를 가르치고 종교와 도덕을 배제하는 것은 범죄를 저지르는 도구로 무장시키는 것이다.”

 

그는 도덕적, 종교적 교육을 하지 않는 공립학교 교육이 미래의 부도덕, 부정, 불법의 씨앗이 될 것이며, 인간의 탁월함의 기준을 떨어뜨리고 미래 시민의 정치적, 사회적, 개인적 삶을 타락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어떤 사람들은 천주교의 바간(Vaughan) 대주교의 주장이 100년이 지난 지금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종교적 중립'이라는 정부 정책이 우리 학교의 표준을 낮추면서 영적, 도덕적 교육의 비극적인 손실을 초래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넘쳐난다고 주장한다.

 

1세기 전에 바간(Vaughan) 대주교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기독교 교육 시스템이 종교적 중립을 추구하는 정부 교육 시스템 위에 세워질 수 없다고 믿는 학부모들과 교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사람들은 호주의 기독교 학교 유산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 결과 최근 수십 년 동안 많은 수의 사립 학교들이 설립되었으며 성경을 믿는 호주 교회에 속한 교사들이 이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다.”(사 54:13)”〠

 

*상기 내용은 Allen S. Roberts 박사의 글을 참고 했습니다.

 www.chr.org.au/books/understanding-our-christian-heritage-volume-two/page5.html 

 

정지수 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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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8/30 [14:42]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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