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에로의 초대

최주호/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2/01/27 [10:04]
 ©Ian Dooley   


주디스 올로라는 UCLA의 정신과 의사는 16세 때인 1968년에 히피 생활을 했다. 배꼽티에 찢어진 청바지, 가죽 부츠 차림에 심한 마약 중독자였던 그녀는 자신을 향해 세상의 잣대로 판단하고 그렇게 되라는 강요에 부모에 반항한다.

 

결국 그녀의 부모는 그를 청소년 약물 치료 기관인 웨스트우드 정신병원에 입원시켰고 그녀는 부모에게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그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분노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감정의 자유로 가는 치유를 경험하는데 어느 날 울타리 친 마당의 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듯이 말로는 표현 불가한 것이 그녀의 화를 진정시킨다.

 

그녀는 거기서 좋은 의사를 만나 그날 이후로 치유를 경험한다. 자신을 이해하고 도와줄 방법을 알았던 현명한 정신과 의사의 안내로 그녀는 정신병원에 갇히기 전의 삶이 자유롭지 못한 삶임을 깨닫고 그 후 몇 년 동안 천사 같은 의사의 인도로 진실한 삶을 사는 방법을 배운다.

 

그녀는 결국 정신과 의사가 되어 20년 후 자신이 16살 때에 갇혔던 그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정신과 의사 생활을 시작한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감금당해 낯선 사람들 손에 맡겨지는 심정이 어떤 지를 아는 환자였다는 사실이 자신의 일에 큰 깨달음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감정의 자유를 얻게 하는 보물”이라 부른다. 해피 앤딩으로 끝난 이야기지만 실은 자유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다.

 

오늘은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실 그 새 일이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냥 자유가 아닌 진정한 자유를 주는 것인데 성경의 두 번째 책인 출애굽기가 그 자유에 대한 좋은 소스를 제공한다.

 

만약 진정한 자유에 대해 알기 원한다면 그 자유를 얻기 이전 상태를 살펴보기를 권한다.

 

이스라엘에게 애굽과 애굽에서의 삶이 어떤 지를 알면

우리가 사는 세상과 세상에서의 삶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당신은 정말 자유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당신은 다음 셋 중의 하나로 대답할 것이다.

 

Yes | No | Maybe

 

당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당신은 현재 자유를 누린다고도 말할 수 있고 아니라고 말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린다고 말할 수도 있다. 실은 내가 처한 상황은 자유라는 것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애굽은 많은 생각을 주는 단어다.

 

먼저 말해주고 싶은 것은 애굽이 처음부터 히브리인들에게 나쁜 곳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기근으로 인해 온 세상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애굽은 생명을 살리고 자유를 주는 곳처럼 보였다.

 

어쩌면 총리 요셉의 인도함을 받아 애굽으로 내려온 70명의 야곱 가족에게 애굽은 자유와 희망(?)이 넘치는 살 만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 애굽에 진정한 자유가 없다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되는데 출애굽기 1장 8절이 바로 그 서막을 알리는 구절이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이 말은 히브리인들에게 우호적이던 왕조가 무너지고적대적인 새왕조가 시작되었다는 말인데 순풍순풍 아기들을 너무나도 잘 낳아서 그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히브리인들을 향한 새로운 애굽 왕조의 두려움이 시작된 것이다.

 

혹시나 히브리인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애굽의 적국과 손을 잡고 배반한다면 아마도 바로가 가장 상상하기 싫은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그래서 바로는 히브리인을 핍박하기 시작하고 히브리인은 고역으로 인해 하나님께 울부짖는다.

 

애굽은 천국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살기에 좋은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 좋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나는 이 세상이 우리를 대하는 3단계를 보라고 말한다.

 

1단계 : 우리에게 우호적인 단계

2단계 : 우리를 경계하는 단계

3단계 : 우리를 핍박하는 단계

 

우호적인 단계란 애굽이 살만한 곳이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킬 만큼 애굽의 삶이 좋게 느껴지는 단계라는 것이다. 아마도 세상을 덜 살아본 젊은 세대의 생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낙관적인 생각은 금새 비관적인 생각으로 바뀌어진다. 세상은 서서히 우리를 향해 마수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고 뭔가 적대적인 세상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인 세상이 나에게 고통을 주는 때가 도달한다.

 

요즘 가까운 친구가 암으로 투병하고 있는데 어느 날 이 친구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죽음이란 누구든 언젠가는 찾아오지만 일단 통증만 없었으면 좋겠다.”

 

통증을 없애기 위해 센 진통제를 먹다 보니 입안이 헐고 위가 고통스러운 상황이 되니 겪고 있는 심한 고통에 대한 넋두리였다.

 

실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암에 걸리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 암에 대해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인생도 없다. 아니 암이라고 특정지어 말해서 그렇지 인간의 최고의 적인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그 죽음의 고통과 동행함을 의미한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분은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잊지 못해 매일 아내의 무덤을 찾아가서 그 무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 분의 가장 큰 소일거리가 된 분도 있다. 고통과 죽음 앞에서 자유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실체를 일찍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지혜롭다고 말한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그런데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더 알려준다면 이 땅에서 당하는 고통보다 더 극심한 고통이 우리가 죽고 난 후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본다면 거지 나사로의 손가락에 물 한 방울만 찍어 자신의 혀에 닿게 해주기를 부탁했던 부자의 그 고통이 죽음 이후의 고통이다.

 

빛과 진리와 생명과 기쁨과 평안의 상징인 하나님이 부재한 그 어둠의 지옥에서의 고통(?)은 상상불가다. 오늘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새 일은 바로 이 땅의 고통과 허무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고 죽고 난 후에 겪는 영원한 지옥의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의를 얻어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과 의로운 성품으로 우리를 위해 은혜로 그 구원을 제공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우리를 향해서 권면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1-2)

 

예수를 믿기 전의 사람과 믿고 난 후의 사람이 다른 것은 그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내밷는 말을 보면 안다.

 

“아~ 이 힘든 세상~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아~ 이 힘든 세상~ 빨리 죽어 천국갔으면 좋겠다”

 

천국의 소망이 있는가 없는가는 정말 중요하다.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죽음으로 끝나는 우리의 인생은 헛되고 무가치해지지만 죽음이 아니라 천국이 기다리는 인생이라면 그 사람은 소망으로 인해 현재의 고통을 넉넉히 이길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의 복음이다

 

오늘은 주일, 성도들뿐 아니라 교역자들도 코로나에 걸려 정상적으로 드리던 예배가 약식으로 온라인으로 드린다. 우째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다스릴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으니 오늘도 그 소망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왠지 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최주호|멜번순복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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