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 길’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한 첫 걸음

글/주경식 사진/권순형 | 입력 : 2022/02/28 [14:29]
▲ 가평길 프로젝트 다큐멘터리 제작 팀은 QLD에서 10번째 가평 길을 찾았다. 취재팀은 드론을 이용해 가평 로드 주변을 촬영했다.     © 크리스찬리뷰


패트리샤 캐너드 여사와 알버트 베이커 씨를 인터뷰한 후 아쉬움을 뒤로하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패트리샤 여사가 선물을 하나씩 건네는 것이었다. 이제 다음주면 성탄절인데 우리 취재팀을 위해 조그만 선물을 준비했다고 쇼핑백을 건네는 것이었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인터뷰를 요청한 우리가 오히려 선물을 준비해 갔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분들에게 선물을 받는 것이 죄송스러웠다. 우리도 인터뷰에 응해 주신 분들을 위해 준비해간 크리스찬리뷰 30주년 기념품인 USB 메모리 스틱을 선물로 드렸다.

 

패트리샤 여사가 보여준 그동안의 헌신과 아름다운 마음에 감동이 되어 헤어질 때 허그를 해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패트리샤 여사는 가볍게 웃더니 우리의 허그를 받아 주었다. 참으로 따뜻한 순간이었다.

 

가평전투 참전용사를 만나다

 

머럼바 다운스(Murrumba Downs, QLD) 양로원에서 나와 다음 목적지인 코린다(Corinda)로 향하기 전 근처 식당에 들러 간단하게 점심을 했다. 점심 식사 후 코린다를 향해 부지런히 출발했다. 코린다는 머럼바 다운스에서 남쪽으로 약 45분 거리이다.

 

코린다에는 가평전투 참전용사인 레이몬드 디드(Raymond Deed, 95) 씨가 살고 있었다. 레이몬드 댁에 도착해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10분이다. 레이몬드가 일찍부터 기다린 듯 베란다에서 우리를 보고 일어선다.

 

▲ 가평전투에 참전했던 레이몬드 디드 씨가 자택에서 가평길 프로젝트 다큐멘터리 제작 팀과 인터뷰를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 가평 전투를 비롯한 한국 전쟁을 생생하게 증언한 레이몬드 디드 씨.     © 크리스찬리뷰


3시에 약속을 했는데 약간 늦었다. 늦어서 죄송하다고 인사를 드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레이몬드 씨의 집은 퀸즈랜드 전통 가옥구조이다. 아래층은 지하실과 차고로 되어 있고 계단을 약간 올라가 2층에 주거시설이 있다. 레이몬드를 만나기 전 들은 정보로는 그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그를 돕는 도우미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직접 만나보니 지팡이에 의지하기는 했지만 그는 혼자서 우리를 영접했고 촬영하기 좋은 장소인 식탁으로 익숙하게 우리 취재팀을 안내했다.

 

사물을 더듬긴 하지만 비교적 잘 걷는 레이몬드를 보고 궁금한 기자는 완전히 시력을 잃은 건지? 그리고 시력은 한국전 참전과 관련해서 잃게 된 것인지 물어보았다.

 

“시력은 완전히 잃지는 않았습니다만, 거의 실명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앞이 희미하고 뿌옇게 보여 간신히 사람들과 사물의 형체를 어릿어릿하게 판단할 뿐입니다. 그리고 시력은 노화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한국전 참전 때 잃게 된 것은 아닙니다.”

 

다행히 시각이 불편하게 된 것은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생긴 실명이라면 마음이 더 안타까웠을 것이다.

 

호주는 한국전쟁에 육·해·공군 합쳐 연인원 17,164명의 호주군을 파병했는데 그중 가평전투에 참전한 호주 왕립연대3대대 군인은 9백여 명 정도였다.

 

1951년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간에 벌어진 가평전투에서 호주 왕립연대 3대대는 1만 명이 넘는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에 맞서 가평 504고지를 지켰다. 이로 인해 수도 서울이 중공군에 의해 다시 탈환되는 것을 막고, 연합군이 반격할 시간적 기회를 갖게 하였다.

 

이때 사망한 호주군은 31명, 부상 58명, 포로 3명(한국 전사편찬위원회)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에 반해 호주군이 수호한 가평지구 전투에서만 중공군은 약 4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상당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 95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자택에서 혼자서 지내고 있는 레이몬드 디드 씨. 그는 시력을 잃고 건강이 좋지 않지만 가평 전투에 대한 기억은 생생했다.     © 크리스찬리뷰

 

가평전투에 참전해 생존해 있는 호주 참전용사가 몇명이 있는지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고 있다. 벌써 70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참전한 용사들의 나이가 평균 90세이다. 이런 상황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기 때문에 레이몬드 디드 씨의 인터뷰는 더 의미가 깊었다.

 

“저는 퀸즈랜드 킹거로이(Kingaroy)에서 태어났습니다. 18세 때 호주 왕립연대 육군에 들어갔고 제가 가평전투에 참전했을 때는 23세였습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 1950년 9월 17일 저는 호주왕립보병연대 제3대대 일원으로 부산에 도착해서 대구로 이동했습니다. 거기서 짧은 기간 동안 주둔하고 있다가 김포를 거쳐 38선 근처로 이동했습니다. 10월 중순경 사리원에서 첫 번째 북한군과 전투를 해서 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저희 3대대는 영유리전투, 박천전투, 가평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때 저는 서전트(Seargent, 중사계급)였고 30여 명의 소대원들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저희 중대는 1951년 4월 23일 오후 3시에 가평에 도착해서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곧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저희 부대는 영연방 27여단에 소속되어 가평지구를 방어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제가 속해 있는 C중대는 대대 예비중대로 A중대 서남쪽 1km에 예비진지를 점령하고 차후 명령을 기다렸습니다.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땅을 팠는데 4월임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추워 땅이 얼어 있어서 삽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위와 흙을 쌓아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저녁 8시쯤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더니 중공군의 대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중공군은 공격했다 후퇴했다를 반복하며 밤새도록 공격했습니다. 안타까웠던 것은 24일 D중대 10소대가 열심히 싸워 오후 3시쯤 중공군이 퇴각했는데, 잠시 후 출격한 미군 전투기들이 D중대 10소대를 적으로 오인하고 네이팜탄을 쏘는 바람에 2명의 전우가 죽고 많은 부상자가 생겼습니다.”

 

차분히 이야기를 하던 레이몬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마도 그때를 회상하며 아직도 가시지 않은 전운이 그를 감싸는지 잠시 상념에 젖었다. 그리고 잠시 후 레이몬드는 계속 말을 이었다.

 

“가평전투 당시 중공군 포로 한 명이 기억납니다. 그 중공군 포로는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부인과 어린 자녀 세 명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중공군 포로이긴 했지만, 그의 사진을 보면서 가정을 둔 아버지이니까 전쟁 후에 그 포로가 무사히 자기 나라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혼자 속으로 했습니다.

 

그후 그 포로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2013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복을 입고 저를 환영해 준 한국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를 보는 순간 갑자기 제가 60년 전에 보았던 그 중공군 포로의 사진 속 자녀의 얼굴과 눈이 생각났습니다. 그 중공군 포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무사히 자기 가족들에게 돌아갔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아픔과 고통은 아군이든 적군이든 누구에게나 있고 이 땅에서 전쟁은 영영 없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퀸즈랜드에서는 매해 4월 24일이면 가평전투를 기념하며 ‘가평 데이’로 한국전에 참전한 호주 참전용사들이 모임을 가져왔다. 올해는 코비드 팬데믹으로 행사가 취소되었지만 매해마다 ‘가평데이’로 한국전 참전 호주 베테랑들이 모여 왔다는 이야기는 레이몬드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엮어진 인연들이 세월이 흘러도 매해 모여 그때의 두려움을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고 삶을 지탱해 왔다는 것에 왠지 모를 숙연한 생각이 들었다.

 

레이몬드와 제법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으나 지면 관계상 다 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12월 18일(토) 오전 9시 30분 취재팀은 가평 로드(Kapyong Road)가 있는 골드 코스트 아룬델(Arundel)을 향해 출발했다. 오전 11시에 이곳에서 영국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에릭 매이요(Eric Mayo, 89) 씨를 인터뷰하고 아룬델의 가평로드를 사진에 담기 위해서이다.

 

차가 막히지 않아 예상보다 이른 10시 30분쯤 도착했다. 약속 시간이 남아있어 촬영장비를 꺼내 가평로드(Kapyong Road) 표지판을 여러 각도에서 사진에 담았다. 드론으로도 상공에서 가평 표지판과 가평길 주변을 담았다. 카메라와 드론까지 합해서 표지판을 찍는 모습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잠시 후 에릭 매이오 씨가 도착했다. 그리고 곧이어 브리즈번의 최기동 목사와 이번 취재 일정에 큰 도움을 준 김양구 씨도 도착했다. 김양구 씨는 이민 1.5세로 호주공군에서 근무했었던 베테랑이다. 그는 퀸즈랜드에 있는 한국전 참전 호주 베테랑들을 오랫동안 섬겨왔고, 참전용사들과도 지속적인 교제를 해오고 있어서 이번 취재에 그의 도움이 정말 컸다.

 

에릭 씨 인터뷰 일정을 주선한 김양구 씨가 에릭에게 우리 취재팀을 소개하고 가평길 표지판 앞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저는 1933년에 영국 코번트리(Coventry)도시 근처의 쉬피 마그나(Sheepy Magna)라는 아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18세인 1951년 9월에 워릭 부대(Warwick Barracks)로 입영하라는 엘리자베스 여왕 사인이 새겨진 입영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보병 훈련을 받은 후 1953년 6월 한국전쟁에 이등병으로 참전했습니다. 그때가 한국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데 저희 부대는 임진강에서 전투를 했습니다. 맨 처음 임진강 지역에 배치되었을 때 했던 일은 부대가 주둔하기 위한 베이스 천막을 세우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북쪽의 포탄을 피하기 위해 참호를 파는 일을 했습니다. 부대 주변에 많은 참호들을 파고 북한군이 포사격을 하면 그곳에 들어가 피했습니다.”

 

▲ 골드코스트 아룬델 지역에 있는 가평 로드에서 인터뷰 중인 에릭 매이요 씨 부부.     © 크리스찬리뷰

 

▲ 인터뷰에 앞서 리허설 중인 에릭 매이요 씨 부부. 주경식 국장과 김양구 재무(오른쪽)가 설명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그날 에릭 씨는 부인 일라인 매이오(Elaine Mayo) 여사와 함께 나왔다. 두 분 다 재혼인데 인터뷰할 때 그들은 손을 꼭 잡고 인터뷰하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그가 참전한 후 약 두 달 후인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었다. 그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 가운데 비교적 나이가 어린 편에 속한다(인터뷰 당시 그는 88세였다). 한국전 참전 용사의 평균 나이가 90세 이상인 것을 감안하면 그는 참전용사 가운데 비교적 젊은 그룹인 것이다.

 

이날 우리는 에릭 씨 인터뷰를 마친 후 아룬델에서 멀지 않고 바닷가 경치가 좋은 브로드 비치 볼링클럽(Broadbeach Bowls Club)에서 골드코스트에 거주하고 있는 참전용사들을 초청해서 점심을 대접할 계획을 세웠다. 에릭 씨 인터뷰를 마치고 함께 브로드 비치 볼링클럽으로 출발했다.

 

▲ 퀸즐랜드 한국전 참전비 앞에서 인터뷰 중인 퀸즐랜드 한국전 참전 전우회 회장 알버트 에드워드 그로컷 씨. 그는 영국군으로 참전했다.     © 크리스찬리뷰

 

▲ 한국 고아들을 입양한 그로컷 씨가 아이들에게 배운 산토끼와 아리랑 노래를 인터뷰 중에 불렀다.     © 크리스찬리뷰


점심 장소를 브로드 비치 볼링클럽으로 정했던 또 다른 이유는 참전용사 대접 후에 인근에 있는 퀸즐랜드 한국전 참전기념비 앞에서 알버트 에드워드 그로컷(Albert Edward Grocott, 91), 제프리 케리손(Geoffrey Kerrison, 89)씨를 인터뷰하고 한국전 참전기념비 조형물들을 사진에 담을 예정이었다.

 

이날 점심은 한국전 참전 용사들을 만나보고 나서 감동이 되었다며 함께 참석한 최기동 목사가 대접했다. 점심 후 참전용사들과 취재팀은 5분 거리에 위치한 골드코스트 캐스캐이드 가든(Cascade Gardens)에 있는 퀸즈랜드 한국전 참전기념비 앞에서 알버트(애칭: 에디)씨를 인터뷰했다.

 

“저는 1931년 영국 바닷가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18세 때 친구와 함께 UN 평화유지군에 지원했습니다. 그때 친구는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는데 다행히 저는 합격해서 UN 평화유지군에 입대할 수 있었습니다.

 

입대한 후 저는 스나이퍼 병사 훈련을 마친 후 알제리와 홍콩 등에서 근무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에 UN 평화유지군으로 참전했습니다. 물론 저도 가평전투에 참전했습니다.

 

가평전투는 정말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숫적으로 열 배가 넘는 중공군을 맞이해서 영연방국가 군인들이 가평일대를 책임지고 방어하는 전투였습니다. 다행히도 영연방 군인들이 중공군을 잘 무찔렀습니다. 덕분에 한국의 수도 서울이 방어될 수 있었고 연합군이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임진강 전투에 참여했는데 거기서 왼쪽 어깨와 다리에 총을 맞았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친했던 두 명의 전우가 안타깝게도 죽고 말았습니다.”

 

▲ 해군으로 참전한 제프리 케리손 씨가 호주 정부로부터 받은 일곱 개의 메달과 훈장,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받은 메달을 담은 액자를 갖고 나와 인터뷰를 했다. 민창희(골드코스트 한인회장)씨가 액자를 들고 있고 오른쪽은 김양구 재무( 퀸즐랜드 한국전 참전 전우회 ).     © 크리스찬리뷰

 

▲ 17세 때 왕립 호주 해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제프리 케리손 씨     © 크리스찬리뷰


그로컷 씨는 거기까지 말하며 울먹였다. 아직도 그 당시를 회상하면 그때의 악몽이 떠오르는지 그의 감정이 동요하는 것 같이 보인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에디는 자신의 부상당한 상황을 얘기했다.

 

“다행히 저는 총에 맞긴 했지만 치명적인 부위가 아니라서 죽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부산의 미군병원으로 이송되어 응급처치를 받은 후 일본으로 후송되어 영국군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때의 부상으로 걸음이 정상적이지 않다. 절름거릴 뿐만 아니라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는 오래 서있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전쟁이 끝난 후 에디는 한국 전쟁 고아를 둘이나 입양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한편으론 감동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편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 자신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고아들을 입양한 후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한국 동요까지 배울 정도로 순수한 청년이었다.

 

에디는 인터뷰 도중 양손의 두 손가락을 펴서 머리에 대고 토끼 귀를 표현하며 어눌한 한국말로 <산토끼> 동요를 불렀다. “산토끼 토끼야 어데를 가느냐, 깡총깡총 뛰면서 어데를 가느냐” 발음이 정확하지 않지만 아직도 그 노래를 기억하고 있는 그에게 감동이 간다.

 

<산토끼>가 끝나자 이어서 그는 <아리랑>도 불렀다. 아리랑 노래를 들을 때는 최기동 목사가 감동이 되는 지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서 제프리 케리손 씨를 인터뷰했다. 처음에는 서서 인터뷰를 했지만 그는 서있는 것이 불편해 한국전쟁 기념 조형물 앞에 앉아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 브리즈번 카불쳐 지역의 가평 로드. 개발 중인 이 지역은 현재 6채의 주택이 들어서 있는데 앞으로 대규모 주택 단지가 조성될 예정이다.     © 크리스찬리뷰

 

“저는 1933년 뉴 사우스 웨일즈주 나우라(Nowra)에서 태어났습니다. 17세 때 저는 왕립 호주 해군(Royal Australian Navy)에 입대했습니다. 한국 전쟁에는 1951년 8월에 HMAS Sydney(III) 전투함 기관 보조병으로 참전했습니다.

 

저희 전투함은 805, 808, 817 공군 소속 전투기들을 탑재하고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저희 전투함은 전투기들을 항모에 탑재하고 가서 전투기들이 적진에 가서 공격할 수 있도록 돕는 일도 수행했습니다. 해군이기 때문에 다행히 보병보다는 큰 위험은 없었습니다.”

 

제프리 씨는 액자를 가지고 나왔다. 거기에는 호주 정부로부터 받은 일곱 개의 메달과 훈장 그리고 심지어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받은 메달이 보관되어 있었다.

 

퀸즈랜드 한국전 참전기념비에 도착해서 참전용사들을 인터뷰할 때 골드코스트 한인회장 민창희 씨와 전 회장 전주한 씨가 인터뷰를 도왔다.

 

특히 골드코스트 한인회와 한국전 참전 호주 군인들과의 관계는 역사가 깊다. 골드코스트 한인회는 1992년부터 매해 정전기념일을 기해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고 보훈행사를 해왔다.

 

골드코스트 한인 동포들이 당시 잘 알려지지도 않은 이억만리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위해 싸워 준 호주 참전용사들의 은혜를 기억하고 한국을 대신해서 깊은 감사와 존경을 드려온 것이다.

 

전주한 씨의 인터뷰 내용을 들어보자

 

“골드코스트 동포사회에서는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은혜를 잊지 않고 영원히 기리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위해 기념비를 세우자는 의견이 모아졌고 바로 한국전 참전 기념비 건립위원회가 조성되었습니다.

 

건립위원회에서는 골드코스트 한인회, 호주군 참전용사회가 힘을 합쳐 골드코스트 시티 카운슬에 한국전 참전 기념비를 세울 부지를 제공받았습니다. 그래서 골드코스트 동포사회, 호주군 한국전 참전용사회와 한국정부를 비롯, 많은 곳에서 도움을 주셔서 2009년 드디어 이곳에 한국전 참전 기념비를 건립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골드코스트 전 한인회장 전주한 씨     © 크리스찬리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골드코스트에 한인 인구는 많지 않지만 큰일을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주한 씨 인터뷰를 마치고 부랴부랴 짐을 챙겨 브리즈번 카불쳐(Caboolture)에 있는 가평 로드를 촬영하기 위해 카불쳐를 향해 출발했다. 정성택 카메라 감독은 다음날 일정이 있어 오늘 저녁 비행기를 타고 시드니로 돌아가야 한다.

 

늦은 오후 시간에 카불쳐에 도착해서 권 발행인과 정감독은 카메라 장비들을 꺼내어 가평 로드 표지판 사진을 촬영 동안 기자는 주위에 사는 인근 주민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

 

가평 로드에 여섯 집이 살고 있었는데 토요일 오후여서 그런지 사람이 없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두 집에서 인기척이 있어 문을 두드리니 사람이 나왔다. 상황을 설명하고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인터뷰를 거절한다.

 

콥스하버의 주민들처럼 친절하지 않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에 다시 한 번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글/주경식|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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