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는 농인들의 모국어다

박영주/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2/03/28 [15:00]
▲ 합정동외국인교회에서 열린 목사 임직감사예배. 김용환(왼쪽), 오세환(가운데), 연복남(오른쪽) 목사. 네빌 뮤어 목사(왼쪽 2번째)   ©박영주     


한국에서 제정한 한국 수어의 날(2월 3일)을 맞아 특별이 농인과 수어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다. 한국 수화 언어법에 따라 한국 수어는 줄인 말로 한국어와 영어처럼 독립된 언어라는 의미를 담고 한국어 문법과는 달리 한국 공용어이다. 단어마다 달라지는 표정, 의미와 손 동작을 종합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언어다.

 

해방 후 한글 지문자 창안자 육백원 선생(1909-1995, 국립 맹아학교, 현재 서울농·맹학교 전신)이 농인 학생들을 위해 한글을 잘 사용하도록 대구에서 올라온 이광호 학생과 1년 동안 한국어의 자음과 모음의 모양을 연구하며 그는 세종대왕처럼 농아학생들이 한글을 배우게 한 한글지화 창안자이다.

 

농아교육은 농인에게 지식을 수화와 구화로 가르치는 특성에 맞춘 교육이다. 대한민국 역사 속에 특수 사역은 미국 선교사인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여사가 의료선교사로 알려졌으며, 조선에 오기전 신혼 여행 차 중국에 농아학교 설립자인 Annetta Mills(1853-1929) 선교사가 중국 췌후 시찰 후, 농교육에 관심 갖고 귀국 후 1909년 최초로 맹인 소녀 만나 평양맹학교에 농아부 부설한 후 한국 최초의 농교육이 실시되었다.

 

그때 수어 아닌 구화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익문을 중국 췌후에 1년 동안 파견하여 농교육을 받고 그 후 중국식 수어가 도입됐다. 그리고 1913년 일제시기에 일본 교사들이 파견되어 일본식 수어도 도입되었다.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어떻게 우리와 소통했는지 항상 관심이 있었는데 이 기회를 통해 지난해는 이두형 목사에 대해, 이번에는 연복남 목사를 독자에게 소개한다. 그와 네빌 뮤어(Neville Muir, 1945–2020)라는 호주 선교사가 수어로 소통한 이야기를 전한다.

 

한국수어에 대해 중요한 이야기를 하자면 많은 사람들에게 수어가 만국 공통어가 아니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이에 대한 나와 모든 농인들의 답은 “아니다, 모든 나라의 수어는 다르다”이다.

 

한국수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호주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서로의 수어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소통하기 어렵다. 소통은 어렵지만 농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국제수어나 제스처/몸짓을 사용하여 소통을 간결하게 할 수는 있다. 수어는 다른 언어와 같이 하나의 언어일 뿐이다.

 

연복남 목사는 누구인가? 1967년 네빌 뮤어 목사께서 월드비전(World Vision)을 통해 후원하게 된 이두형 목사(강화도임마누엘 농아교회)의 절친 동창생인 한국 소년이다. 그는 현재 대전 한민농아교회 담임목사이다.

 

연복남은 3남 3녀 중 둘째이다. 그는 생후 6개월 때뇌척수염으로 입원한 후 고막 후유증으로 4살 때 소리를 영원히 듣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그의 부모는 그를 사랑으로 잘 키웠다.

 

어린 복남은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등교하는 길에 철길 앞에서 친구는 그에게 빨리 건너가라고 재촉하였다. 겁먹은 복남을 밀려서 넘어졌는데 마침 기차가 막 지날 때였던 것이다. 친구는 분명히 복남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복남은 머리에 조그만한 상처만 입고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다. 부모는 그것이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불행 중 다행으로만 생각해 왔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간 후 그곳에서 전도를 받고 어머니, 누나 그리고 동생은 일찍 예수님을 알게 되어 신앙 생활을 시작했다. 복남은 학교와 집이 멀어 가족들과 떨어져 농아학교 기숙사 생활하면서 교회를 다니지 못했다.

 

▲ 연복남-권혁선 결혼식. 네빌 뮤어 목사가 주례를 맡았다. ©박영주     

 

매주 토요일마다 부모 댁으로 돌아와 수어를 배우지 못한 가족들과 서로 필담을 나누며 달라진 것 없이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 기억이 있었다. 대부분 농인들은 이와 같이 명절이나 가족 모임에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본인을 항상 우물 속의 개구리같이 느낀다. 주변에 가족들과 청인들이 수어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감정과 상황들이다.

 

졸업 후 복남은 농인 친구들을 만나는 즐거움에 빠져 방황하다 나중에 동창이었던 친구 이두형을 통해 네빌 뮤어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뮤어가 교회 개척을 준비하던 시기에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모습을 보고 복남은 네빌 뮤어 목사로 인해 예수 안에서 너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와 관계된 모든 것에서 분명히 주님이 계시다고 알고 믿었다.

 

성경 구절 중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약 나쁘면 몸도 어둡고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을 것이다.”(누가복음 11:34-35)

 

네빌 뮤어 목사는 복남과 많은 농인들에게 빛과 같은 존재가 되었으며, 뮤어를 만남으로 복남은 기쁨과 풍성함을 예수님 안에서 경험하고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네빌 뮤어 목사의 설교를 보고 많은 감사와 기쁨과 그리고 사랑이 넘치게 되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증거하고 그를 따라 작은 예수가 되고 싶어 침례받은 후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과 행동이 모두 달라졌다.

 

예수님께 감사하여 봉사와 헌신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운 그는 네빌 뮤어 목사와 함께 춘천에 가서 전도를 했다. 그때 학생부 교사를 맡게 되어 예수님을 더 알게 되었고 더 신뢰하고 더 사랑하기 위해 성경 말씀을 보고 기도로 교제하는 것임을 알았다.

 

청년 복남은 신학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기독교신학교 입학했다. 학비는 네빌 뮤어 목사가 전 세계 후원자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아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신학교에서 수업할 때 수어 통역의 도움 없이 항상 녹음기를 갖고와 수업할 때마다 녹음해서 수업 후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들이 다 모이는 늦은 밤에 가족들이 녹음기를 듣고 필기를 해주었다.

 

어느 날 수업 후 옆에 앉아있던 신학생이 복남이 농인인 것을 알고 필담으로 몇 마디 질문하면서 수어를 배우고 싶다고 제의왔다. 그렇게 둘은 수업 전 미리 만나 기본 수어를 배우고 가르쳤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진 후 수업 때 신학생이 복남에게 수어 통역을 조금씩 해주었다.

 

수업 중 신학생이 수어하는 모습을 본 교수가 야단을 쳤다. 수업을 마친 후 신학생이 교수한테 사실 설명을 하자 교수와의 사이에 오해가 풀렸다. 그 신학생이 얼마 후 호주다문화농아선교사로 멜번에 정착한 오세황 목사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청년 때 다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만나게 되었고 연복남의 전도사 시절 그는 혼기가 차 부모의 권유로 결혼을 재촉 받았다. 부모는 복남에게 농인보단 청인과 결혼하라고 강요를 했고, 마음이 어수선한 상태에서 인천임마누엘교회 학생부가 그에게 맡겨졌다.

 

학생부 중에 한 여학생(권혁선 사모)이 연복남에게 수줍게 고백해 두 사람은 연인으로 발전해서 부부가 될 것을 약속했다. 부모는 두 사람을 축복해 주었으며, 두 사람 결혼식은 네빌 뮤어 목사가 주례를 맡아 한국수어로, 음성 통역은 오세황 목사(호주다문화농아선교사)가 맡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은 깊어 갔다.

 

네빌 목사가 그의 생전에 가장 즐겼던 찬양 ‘어찌하여야/하나님께 영광’(My Tribute)을 통해 하나님은 비장애인을 만들고 장애인들도 보내주셨고 왜 우리만 장애를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성경대로 그리고 이 찬양처럼 하나님께 영광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믿고 장애인들에게 누구보다 큰 마음으로 불평 하나 없이 기쁨으로 섬길 줄 아는 대부 같은 삶을 살다 가신 네빌 뮤어 목사를 잊지 않을 것이다.〠

 

박영주|DMI 홍보대사, 시드니새순장로교회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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