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11-24)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2/04/25 [15:32]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찬양이 있다.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환경, 어느 조건에서 태어났든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사랑 받기 위한 존재라는 의미다.

 

그런데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좀 더 착하게 살고, 좀 더 선한 일을 하고, 좀 더 신실하게 살아야 하는데, 아직 그 조건을 다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큰 착각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조건과 무관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실수하면 줄어들고, 우리의 믿음의 좋으면 더 커지는, 고무줄 같은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우리가 부족하면 부족한 그대로, 실패하면 실패한 그대로, 죄가 있으면 죄가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

 

탕자가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했다. 당시 유산이 상속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아버지 사후에 두 번째는 아버지 생존 중에 증여되는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경우는 아버지가 매우 위독하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에만 가능했다.

 

아버지 생존 중에는 자식이 조른다고 해서 쉽게 받을 수 있는 유산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에게 분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라는 아주 무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탕자가 이 무례한 유산 상속을 요구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탕자가 얼마나 졸랐으면 아버지가 아직 정정한데 유산을 상속해 주었다.

 

유산을 받아든 탕자는 아버지를 멀리 떠나 그 유산으로 허랑방탕하게 살았다. 얼마나 허랑방탕하게 살았는지 그 소문이 멀리 형의 귀에 까지 들렸다. 나중에 집에 돌아온 탕자에게 형이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렸다”고 한다.

 

결국 탕자는 재산을 모두 낭비해 빈털털이가 되었다. 때마침 흉년까지 크게 들어 그는 궁핍해졌다. 먹고 살기 위해 탕자는 돼지 치는 일까지 하게 되었고, 먹을 게 없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했다. 그런데도 그것마저도 주는 자가 없었다.

 

그렇게 탕자는 돼지보다도 못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가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 아버지 없이 살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떠나자 허랑방탕해졌고, 아버지를 떠나자 궁핍해졌으며, 아버지를 떠나자 돼지보다 못한 인생이 되었다. 탕자가 뒤늦게 그걸 깨달았다.

 

아버지께 돌아가야 산다

 

탕자가 냄새나는 돼지들 틈에 쓰러져 있었다. 너무 굶어서 일어설 힘도 없고 곧 주려서 죽게 생겼다. 탕자는 쓰러진 채로 눈을 감고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들이 많았다.

 

그들의 얼굴은 풍요와 평안이 흘러 넘쳤다. 또 자신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불효막심한 아들이었는지 하늘과 아버지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탕자는 생각했다.

‘돼지 곁에서 이대로 굶어 죽을 수 없다. 아버지 집으로 가자. 이제는 감히 아들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품꾼으로라도 써달라고 하자” 그리고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탕자가 유일하게 잘한 일이 이것이다.

 

아버지를 떠나왔다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 회복이 시작된다. 품꾼이 되든 혼이 나든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우리도 세속적인 욕망을 탐하다가 하나님 곁을 떠날 때가 있다. 그게 가장 어리석은 일이지만 툭하면 그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고 타락해 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때 타락한 나의 인생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회복이 시작된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갈 때 살 수 있다. 주일예배가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살다가 주일에 되어 하나님께 돌아와 메마른 내 영혼이 회복되고 내가 살아나는 시간이다.

 

하나님이 달려오신다

 

탕자가 집을 나간 후로 아버지는 탕자를 그리워했다. 탕자가 허랑방탕하게 산다는 소문이 들려도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침 흉년이 크게 들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아버지는 걱정스런 마음에 날마다 동네 어귀를 바라보며 탕자가 오는지를 살핀다.

 

그러던 어느 날 저 멀리 동네 입구에 누군가 터벅터벅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누더기 옷을 걸치고 거지꼴을 하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대번에 아들을 알아보았다. 아직도 거리가 멀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달려간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나이든 사람은 달리지 않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다. 그것은 점잖지 못하고 체신머리 없는 행위로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탕자의 아버지는 점잖이고 체신이고 다 던져버리고 아들에게 달려간다. 아들이 돌아왔는데 그깟 체면 좀 상하고 수치를 당하는게 무슨 대수냐며 아들에게로 곧장 달려간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렇다. 하나님은 체신머리 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점잔, 그까짓 것 내던지고 달려오시는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체면 차리면서 오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 존귀, 체면 다 버리고 오셨다.

 

허름한 마굿간에 말 구유로,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셨다. 가장 비천한 인간을 사랑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그렇게 하늘에서 우리에게로 “아직도 거리가 먼데” 달려오셨다.

 

흔히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고 한다. 사랑은 폼 잡고 서 있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다. 내가 움직이는 게, 내가 달려가는 게 사랑이다. 하나님이 그러셨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달려오셨다.

 

한 번도 아들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탕자에게로 달려간 아버지는 그의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춘다. 죄인의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는 것은 ‘용서의 표시’였다. 다 용서했다는 의미다. 탕자는 아직 아버지께 죄를 고백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용서부터 한다.

 

우리는 흔히 회개를 해야 그 다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온다고 생각한다. 또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야 더 풍성한 사랑이 임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작정이고 무조건이다. 나의 회개와 무관하게 무턱대고 나를 먼저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회개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다. 언제나 먼저다.

 

이제 급해진 것은 탕자였다. 다짜고짜 용서부터 받았으니 마음이 급하다. 탕자는 오랫동안 연습해둔 말을 꺼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하여 지금부터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품꾼의 하나로 써주소서” 이 말만하면 된다.

 

그런데 아버지는 탕자가 그 마지막을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큰 소리로 외친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 15:22-23)

 

탕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몽둥이를 들고 내쫓아도 시원찮을 판인데, 잔치라니? 아버지가 제 정신이 아닌 듯하다. 아버지는 탕자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주고 신을 신겨주라고 한다. 또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탕자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어놓았다.

 

특히 ‘살진 소를 잡아 잔치’를 열었는데, 이것은 탕자를 위한 잔치가 아니었다. 그 잔치는 지금 가장 기쁘고 즐거운 사람이 바로 아버지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누구보다 기쁜 사람이 아버지였다. 그래서 무얼 주어도 아깝지가 않다.

 

아버지에게 탕자는 한순간도 아들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4)

 

아버지는 탕자를 향해 ‘내 아들’이라고 한다. 탕자는 아버지에게 너무도 큰 죄를 지어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했지만, 아버지에게 탕자는 언제나 ‘내 아들’이었다.

 

탕자가 허랑방탕한 죄를 짓고, 유산을 다 탕진을 하고 거지 몰골을 하고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그 모습 그대로 사랑했다. 아버지에게 탕자는 단 한순간도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단 한순간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날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하늘의 유업을 주신다. 샬롬! 〠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광고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