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마 6:25-34)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2/08/28 [23:15]

단 하루만이라도 걱정이나 염려 없이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행복을 꿈 꾸면서도 염려를 한다. 자녀 문제, 직장 문제, 건강 문제, 노후 문제 등 우리에게는 염려할 일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염려의 대부분이 쓸데없는 일이라면 어떻겠는가? 어니 젤린스키가 쓴 [모르고 사는 즐거움]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는다. 걱정의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며 22%는 사소한 고민이다. 걱정의 4%는 우리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오로지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바꿔 놓을 수 있는 일에 대한 걱정이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96%는 쓸데없는 일, 아무 소용도 없는 걱정이란 것이다. 고작 4%만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걱정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런데 우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모두 걱정하면서 온갖 염려 속에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이 염려가 우리의 행복을 갉아 먹는다는 것입니다.

 

염려를 영어로 ‘worry’라고 하는데, 어원은 ‘물어뜯다, 목을 물어 질식시킨다’라는 뜻이다. 염려가 우리의 삶을 물어뜯고 우리를 숨 못 쉬도록 질식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염려하고 걱정하지만, 그 염려가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점점 황폐하게 만들어 간다. 실제로 염려가 심해지면 정신분열증을 일으키기도 하고 심장병, 고혈압, 신경통, 위궤양, 감기 등을 초래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잠언 17:22도 이같이 경고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뼈는 우리의 신체를 지탱하는 기초다. 만일 그 뼈가 마르게 된다면 치명적이다. 그런데 근심이, 마음의 염려가 우리의 뼈까지도 마르게 한다니 염려가 얼마나 위험한가?

 

염려하지 말라

 

그런데도 사람들은 염려한다. 몸이 쇠하는 것도 모르고 뼈가 말라가는 것도 모르고 염려하고 또 염려한다. 오늘의 염려가 부족한지 내일의 일까지도 앞당겨 염려를 한다. ‘일주일 뒤, 1년 뒤, 아니, 죽으면 어떻게 하지?’하며 염려한다.

 

죽으면 다 끝나는 것인데 무슨 염려 타령인가! 오늘 잘 살아야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내일 일, 1년 뒤에 일, 죽으면 어떻게 하나,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내일의 일은 우리가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tomorrow)이 하는 것이다. 오늘 괴롭다고 해서 내일까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 괴로움은 오늘 하루로 족하다. 우리가 내일 일을 염려한다고 해서 내일 당할 시련이나 고난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염려만으로 우리의 질병이 나을 수 없고 우리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더우기 내일은 아직 오지도 않았다.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을 염려와 걱정으로 채운다면 그 인생이 과연 희망이 있겠는가? 내일도 오늘처럼 불행할 뿐이다.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오늘도 행복하고 내일도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한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 6:26-27)

 

지구 상에는 약 1천억 마리의 새가 날아다닌다고 한다. 1백 마리 1천 마리가 아니라 무려 1천억 마리다. 그 많은 새들이 어떻게 매일 먹고 마시는지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는다. 그 수많은 새들이 오늘도 먹고 마신다. 누가 기르시는 것인가?

 

하나님이 기르신다. 날마다 창공을 날아다닐 수 있도록 부족함 없이 세심하게 기르신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가능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새보다 우리가 귀하다고 하신다.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저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든 새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그 새들보다 귀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시겠는가?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못본 척 하실까?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를 돌보신다. 눈동자처럼 돌보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염려만 한다. 귀하디 귀한 존재이면서도 염려하기에 바쁘다. 그러나 염려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우리말 ‘키’로 번역된 단어는 본래 ‘생명’이란 뜻이다. 그래서 NIV는 ‘life’로 번역했다. 누가 염려한다고 해서 자기 생명을 한 시간인들 늘릴 수 있을까? 걱정하고 염려해서 수명이 늘어난다면, 날마다 염려해야 한다. 항상 염려하고 쉬지말고 염려하고 범사에 염려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염려해도 단 1초의 수명도 늘릴 수 없다. 오히려 염려할수록 건강만 해친다. 우리는 염려하는 대신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 맡기자

 

뒷마당에 가면 웬 꽃들이 그렇게 많고 풀이 많은지 모른다. 그 중에는 잡초와 같은 들풀도 있고 이름 모를 꽃들도 있다. 나는 그 꽃을 피우기 위해 물 한번 줘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꽃이 피고 풀이 자란다. 또 꽃을 자세히 보면 참 아름답다.

 

어떤 꽃이 되었던 꽃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그래서 예수님은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이 꽃 하나만 못하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입히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들풀과 꽃보다 더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바로 우리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30)

 

나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큰 감동이 된다. 특히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이 대목에서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하나님은 한 송이 이름 모를 들풀도 솔로몬의 모든 영광보다 더 아름답게 입히신다. 그러니 얼마나 귀한 들풀인가?

 

하지만 들풀은 오늘 피었다가도 내일이면 시들어져 아궁이에 던져질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하나님에게 가장 귀한 존재다.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아름답게 핀 들풀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귀한 존재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꾸실 만큼, 그래서 영원토록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될 우리는, 귀하고 귀한 존재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이 말씀을 믿는다면, 염려할 이유가 없다. 우리를 그토록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무엇이 염려되고 걱정이 되겠는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염려한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 작은 자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우리가 자꾸 염려하는 것은 우리의 성격이나 상황 때문이 아니다. ‘뭐 나는 염려하는 스타일이야, 난 원래 걱정을 많이 하는 성격이야, 지금 이 상황에서 걱정 안 할 수 있겠어?’ 이런 문제가 아니다. 믿음의 문제다. 내 믿음이 작아서 염려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광야에서 보낸 기간이 40년이다. 그때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이 남자 장정만 60만 명이었다. 여자, 어린아이, 노인을 포함하면 적어도 2백만 명이 넘는다. 그 많은 사람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내야 한다. 광야가 어떤 곳인가? 풀 한 포기 물 한 모금 얻을 수 없는 황무지다. 먹을 것이 없고 마실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 날마다 만나를 내려주셨다. 메추라기를 보내셨다.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셨다. 그뿐만이 아니다. 40년을 광야에서 보냈지만 그들의 의복도 헤어지지 않았고 발도 부르트지 않았다.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신 8:4)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신다. 구하지 않아도 다 아시고, 때가 되면 주신다. 아낌없이 주신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면 된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우리가 살면서 왜 어려운 일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 염려할 일들은 내가 짊어지는게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자. 염려는 우리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 얼마나 쉬운 인생인가! 그때부터 행복 시작이다. 샬롬! 〠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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