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출애굽기 34:9)
크리스찬 사이에 하나님 임재와 동행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환영할 일인지라 나도 몇 마디 거든다.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사람이 하나님께 동행을 요청한다. 동행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동행하는 대상이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구하고 배고픈 아이가 양식을 찾듯, 타는 목마름과 뒤틀리는 배고픔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쉼 없이 구하면 하나님께서 신령한 양식과 음료인 예수님을 통해 일하신다.
예수님께서도 네가 “나를 이끌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 하셨다.‘주께서 우리와 동행한다’는 우리 편의 의미는 앙망, 경청, 순종이다. 하나님 편에서 임재하는 동행은 우리 편에서 순종하는 행동으로 드러난다. 자연히 필연적으로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각자 생활에서 주체적 청지기로 행동하도록 이끈다. 동행(同行)과 행동(行動)은 음절의 앞뒤 순서만 바뀐 같은 말이 아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와 알뜰살뜰 함께하시고, 그 후에 우리가 가뿐히 움직여 행한다. 즉, 임재와 순종은 동시-순차-발생적 연계어인 셈이다.
말씀을 생활로 가져오는, 즉 행동이 뒤따르는 동행은 복되고 아름답다. 선물로 주신 자유케 하는 진리의 효능에 취해 만족감, 황홀감에 매몰되어 수련할 은둔지를 찾지 말라. 오히려 진리, 선물 자체인 주님께 더 매료되고 몰입하라.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일 누구 앞에서나 끊임없이 주 임재를 구하고 그 친밀한 사귐의 능력을 힘입어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섬겨라.
값없이 쏟아부어지는 은혜가 동행과 행동을 가능케 한다. 은총을 입은 자에게 뒤따르는 임마누엘의 축복이 동행이다. 목이 뻣뻣한 백성이여, 예수님께서 못 박힌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고, 예수님께서 피 뿌린 십자가의 문을 통과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에 이르라. 악과 죄의 사함을 받고 옛사람이 죽는 무덤으로 들어가라.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무덤의 돌문을 열어젖히고 새 생명과 참삶으로 나오라. 이 빛나는 순간을 경험한 사람에게 영원한 시간이 열리고, 이 비밀스러운 공간을 경험한 사람에게 내밀하면서 드넓은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초월해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에나, 편재하신다. 이미 죽은 우리 육체 안에 살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대신 죽으신 분을 위해 살도록 돕는다.
우리 삶을 통해 예수님의 현현의 옷자락이 살포시 보이게 하신다. 밖에서 문 두드리시던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전인적인 성장을 견인하시고,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동행하시며, 세상을 향해 함께 나가자고 문 안에서 문을 활짝 열어젖혀 우리를 전체적인 성숙으로 이끄신다.
우리에게 은총으로 다가와 ‘임재’ 속에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이 우리를 주의 기업(소유)으로 삼고 이제 ‘순종’하여 ‘행동’하라 명하신다.
동행에 대화는 필수다. 계시의 말씀과 계시의 빛이 내려앉는 자연, 환경 등 주변 모든 사물, 사람, 일과 대화하며 하나님(의 뜻)과 연합하라.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쉽게 말함으로 미래를 향해 활짝 열려 있는 하나님의 뜻을 닫으려는 말쟁이, 점쟁이, 거짓 선지자에게 속지 말라. 돼지도 낯을 붉힐 일이다.
오히려 계시된 말씀인 성경에 계속 말을 걸고 침잠하는 듬쑥한 사람이 돼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교통하며 즐겨 머물라. 성화와 사역의 긴 여행에서 하나님 은혜와 연합을 위한 지향이 우리를 내면 너머 세상 한 복판과 피안으로 인도하고, 비움과 내려놓음, 신뢰와 위탁, 청취와 청빈, 수용과 순종 등의 영적 훈련은 점차 생활이 되어 빛날 것이다.
정체, 침체를 반복하더라도 목적지가 가까워짐에 따라 그분이 점점 선명히 보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가슴 벅찬 흥분과 감동, 보람과 감사에 휩싸여 온유해지리니, 아~, 우리는 행복하여라. 〠
서을식|시드니소명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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