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년 가까운 오래 전의 일이다. 청송계곡에 있는 교도소를 갔다 온 목사가 변호사인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허리와 손을 동시에 묶는 가죽 수갑을 찬 죄수가 깜깜한 감방에서 개같이 엎드려서 양재기에 든 밥을 핥아먹는 걸 봤어요. 죄수도 사람인데 어떻게 국가가 그렇게 할 수가 있어요?”
목사의 눈에서 은은한 분노의 불이 타고 있는 것 같았다. 목사는 내가 그런 것들을 문제 삼아 달라는 취지였다. 나는 피하고 싶었다. 아직 권위주의의 그늘이 여기저기 남아 있는 때였다. 그런 걸 말하면 비웃음과 억압이 되돌아올 수 있었다. 튄다는 소리를 듣고 소외당할 위험성도 있었다.
그 얼마 후 목사가 다시 와서 말했다. “교도소 안에 미운털 박힌 죄수를 괴롭히는 감방이 있어요. 사람하나 들어갈 만한 비좁은 콘크리트 벽 사이에 사람을 가두는 거예요. 햇빛이 못 들어오게 손바닥 만한 창문마저 철판으로 용접해 버렸어요. 다른 감방을 마주하는 복도 쪽 창도 플라스틱으로 막아 공기마저 희박하게 만들었어요. 이런 일들을 누가 알까요?”
그래도 나는 개입하기 싫었다. 교도소나 검찰이나 법무부 조직이었다. 검찰이 제대로 수사를 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경찰은 높은 담 안의 수사를 할 능력조차 되지 않았다. 목사가 자꾸만 내게 말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인권유린이 이루어지는 그곳은 당시로서는 하루에 갔다 올 수 없는 깊은 산골이었다. 나는 먹고 살기 바쁜 변호사였다. 나는 그 일을 하기 싫었다. 한 달 후 목사가 다시 찾아왔다.
“먹방에서 개같이 밥을 먹는 그 죄수가 예전에 고관이나 부자집만 턴 유명한 도둑이래요. 훔친 물방울 다이어가 신문에 났던 걸 저도 기억해요. 내가 그 사람을 알아서 부탁하는 거 아니예요. 하도 사정이 딱해서 말하는 거죠.”
그 순간 전율 같은 어떤 느낌이 내게 왔다. 하나님이 강하게 명령하는 것 같았다. 성경 속의 요나처럼 피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재심을 제기하고 인권유린을 말하기 시작했다.
한 방송에서 나를 불렀다. 기회라고 생각하고 나갔다. 몇 마디 끝에 진행자가 내게 물었다.
“일각에서 별 볼 일 없는 변호사가 한번 떠보려고 스타범죄자를 맡아 언론플레이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오물을 흠뻑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먼지 같은 내 존재는 잘 알고 있었다. 고관집의 금고나 벽장 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하는 언론의 관심이 그를 이용해서 기사가 되었다. 암흑 같은 방에서 개같이 엎드려 밥을 먹는 그를 스타 범죄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누구일까 하는 원망이 들었다.
그날 저녁 텔레비전 뉴스가 나왔다. 앵커맨이 뉴스 도중 살짝 비웃는 표정이 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날씨가 더워지더니 감옥에 있는 도둑까지 세상에 대고 헛소리를 하는 것 같습니다.”
공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할 뉴스에서 앵커맨이 자기의 선입견을 노골적으로 뱉어내고 있었다.
며칠 후 담당 검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너무 공명심이 강한 거 아닙니까?
인권유린을 고발하는데 증거 있어요?
아니 변호사를 계속할 생각이 맞습니까?”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내가 공명심으로 하는 것인가? 위선일까? 그것 때문에 일을 하기엔 날아오는 돌이 너무 아픈 것 같았다. 멍이 들고 피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주요일간지의 사회면에 박스기사가 났다. 들뜬 변호사 한 명이 인권을 운운하면서 근거 없는 소리를 지껄인다는 내용이었다.
가까운 고교 동창 한 명이 찾아와 이런 말을 했다.
“주간지에서 흥밋거리로 네가 변호하는 도둑에 대해 기사를 내보내고 있어. 거지 출신이 부자 집을 전문으로 턴 걸 의적으로 미화해서 말이야. 우리 동창 사이에서는 네가 사상이 이상해서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을 변호한다는 얘기가 돌고 있어.”
좌파라는 소리였다. 내가 변호를 하는 사람의 어린 시절 거지 동료 중 몇 명이 나를 찾아와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돈을 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내가 좀 맞아야 하겠다며 육체적인 협박을 하기도 했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쓰라린 고통 같았다.
나는 선을 행하려고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오해를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오해를 풀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해였다. 그걸 푸는 것은 그들의 의지에 어긋났다.
악마가 누군지 그때 알았다. 남을 헐뜯는 자였다. 그들은 개와 비슷했다. 한 마리가 짖으면 수백 마리가 따라서 짖었다. 나는 십자가상의 고통이란 게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선을 행하면서 오해를 받는 것 피를 흘리는 것 말이다.〠
엄상익|변호사, 본지 한국지사장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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