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한 걸음 디딜 때마다 ‘그분들’의 향기(5)

두 번째 길을 떠나다-거제

글ㅣ김명동,사진ㅣ권순형 | 입력 : 2010/08/23 [12:59]
하나님 사랑. 나라사랑 100년 - 사등교회

거제시 사등면 사등리 838번지에 위치한 사등교회는 성도들 모두가 성내마을 사람들이다. 그중에 원씨와 양씨가 많이 산다는 성내마을은 가구 수 150세대 정도로  교회에 나오는 성도는 80여 명이다.

 
▲ 통영에서 약 32km 떨어진 욕지도는 현재 2천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사진은 욕지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욕지제일교회 전경, 교회 뒤편은 욕지도의 명물인 고구마 밭이다.     ©크리스찬리뷰

'성내마을'은 글자 그대로 성내(城內)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사등성'을 말한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있는 이 성(城)은 도로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고 늙은 담장이덩쿨이 성벽을 에워싸고 있어 사등성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성의 일부는 아직도 일반 가정집의 담벼락으로 사용되고 있을 만큼 친숙한 편으로 사등교회도 이 성과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에 사등교회가 세워진 것은 1909년 8월 22일 임기주 사택(사등리 855번지)에서 60여 명의 신자들이 모여 첫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됐다. 특이한 것은 선교사들이 와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스스로 선교사에게 찾아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를 세우기로 결의를 해서 사등교회가 세워지게 됐다는 점이다.

 
▲ 경남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있는 사등성.     ©크리스찬리뷰

역사학자 전갑생 씨는 이점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사등교회가 설립된 과정에 있어서 사등이라는 마을이 원씨와 양씨가 모여살고 있는 씨족사회를 이룬 마을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의해서 씨족사회 공동체가 해체될 위기에 대한 압박감과 두려움,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예수교라고 생각했다. 둘째, 씨족사회를 유지하고자 하는 동시에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열망이 결합해서 가까운 지역에 있는 통영 대화정교회(현 충무교회)의 조사 김낙진을 찾아가 만났다. 셋째, 사등면의 중심지가 성내마을이었고 성내마을은 성안이라는 좋은 조건이 결집을 가능케 함으로 주민들이 교회로 모여들었다.

그는 "당시 교회는 동네 청소년들에게 학문의 전당이었고 주민들은 신학문을 배우고 성경을 배웠으며 기독교의 진리를 배웠다"고 말하고 "작은 교회였지만 신사참배에 반대하고 옥고를 치르는 등 큰 인물들이  배출됐다"고 말했다.

 
▲ 역사학자 전갑생 씨     ©크리스찬리뷰

1909년 전후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자 강제병합을 요구하고 거제 등지에 일본군 군사기지를 설치하는 등 침략을 노골화하고 있던 시기였다. 풍전등화에 놓인 나라와 마을에 침범하는 일제와 싸우고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등리에 거주하는 원석범, 양재우 등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예수교를 받아들이고자 논의했다.

그 뒤 원석범은 통영 대화정교회의 조사 김낙진을 찾아간다. 그는 마가복음을 받아들고 와서 지역 주민들을 모이게 한 후, 함께 성경을 공부하려 했으나 내용을 잘 알 수가 없자 통영 대화정교회의 조사를 초청했다. 그런 후 성경공부를 하고 첫 예배를 드린 것이 사등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두 달 후 호주 선교사 아담슨(A. Adamson. 한국명 손안로)은 원석범, 양재우를 영수로, 양구환, 진종학을 집사로 첫 직분자를 세우고, 초가 6칸 (사등리 826-2번지 현 이봉춘의 집)을 2백 원에 구입하여 예배당을 마련한다. 이후 1910년 왓슨(Rev. Robert D. Watson, 한국명 왕대선)선교사가 예배당에 소학교를 설립했다. 이는 자연히 문맹퇴치운동으로 이어졌고 애국심을 기르는 도장이 됐다.

 
▲ 지난 해 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은 사등교회 전경     ©크리스찬리뷰

1925년 10월 22일 매견시(Rev. J. Noble Mackenzie) 선교사가 성찬을 집례했고, 1929년 추마전(Rev. Martin Trudinger) 선교사가 부임했다. 1944년에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해방 전까지 예배가 중단됐다. 해방 이후 교회 문을 다시 연 사등교회는 최초로 청년회를 발족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민족운동에 힘쓰기도 했다.

이동진 목사는 "교회가 100년이 넘다 보니까 3대, 4대째 그리스도인 가정도 있다"면서 "마을 교회당이다보니 젊은이는 다 떠나고 대부분 노인들이다"라고 말했다.

"젊은이들은 가르치고 심어 놓으면 다 나가요. 대학가고, 군대 가고, 장가 가고, 시집 가고 여기에 비전이 없으니까요."

이동진 목사의 말처럼 사등교회 역시 대다수의 농어촌 교회가 못자리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것처럼 교인들의 도시로의 진출은 심각한 문제인 듯했다. 그러나 실상 사등교회의 교인들은 이런 문제를 별로 염려하지 않는 것 같다. 교인들을 대하다 보면 감사의 조건이 더 많다.
 
▲ 사등교회 교육관. 설립 초기에는 교회당으로 사용했다.     ©크리스찬리뷰

무엇보다 어떻게 우리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을까 생각만 해도 감사하고, 어려운 형편임에도 국내외 25개 교회, 기관, 단체 등에 선교헌금을 보내고 있으니 감사하다. 겉모습만 보면 사등교회는 분명 어둠에 잠겨가는 저녁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웃음을 잃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교인들을 만나다 보면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빛을 비추고 계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이 목사는 "성장이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선교와 지역교회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음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라고 말하고 "100년을 맞이한 사등교회가 더욱 성장하고 부흥하는 교회가 되길 소망하며 전도, 선교, 양육, 교제가 풍성한 교회로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를 맺도록 기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 성내마을에 있는 사등교회 쉼터     ©크리스찬리뷰

이철민 장로는 "사등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함께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기념비를 세웠다"고 말하고 "100주년사도 편찬 작업 중에 있으며 홈페이지도 새롭게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교회 홈페이지가 단순한 정보의 공유와 교제의 장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진리를 만방에 증거하고 우리 교회 성도들, 우리 교회 출신 교역자들과 성도들, 또한 사등교회를 사랑하며 기도해 주시는 모든 분들과 이곳에서 성령의 교제를 나누는 아름다운 만남의 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원효섭 장로는 "지나온 100년을 디딤돌로 삼아 새로운 100년을 맞이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오랜 지기처럼 얘기를 나누었다. 동족이란 무엇일까? 어째서 이다지도 스스럼이 없는 걸까? 우리는 한동안 교회 주변을 돌아보고 나서 그들과 악수를 하며 작별을 했다.

"또 오십시오."

정말 정겨운 말이었다.

 
▲ 사등교회는 지난 해 8월 설립 100주년을 맞아 100주년 기념비를 교회당 입구에 세웠다. 이동진 목사, 원효섭 장로, 이철민 장로(왼쪽부터)     ©크리스찬리뷰

땅끝서 익는 복음 열매, 욕지도

욕지도. 그곳에도 사람이 있어 하나님의 교회가 섰다. 그 이상 달리 무엇으로 감사하고 감격할 것인가?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벌써 콧마루가 알싸해졌다.

통영에서 약 32km 떨어진 욕지도는 어민들이 대거 정착한 1887년(고종 24년)을 개척원년으로 삼고 있다. 주민 20여 명이 입도를 허락받고 정착했다. 192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남해안 어업전진기지로 큰 명성을 떨치면서 경남 최초의 공립 유치원이 설립될 정도로 전성기를 맞았지만 점차 수산업이 쇠퇴하면서 인구가 줄기 시작, 현재 2,0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해군부대가 주둔하는 군사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관광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2백여 농가가 재배하는 욕지고구마는 연간 20억 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는 욕지도의 주산물이다.

 
▲ 욕지교회는 2004년 4월, 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았다.     ©크리스찬리뷰

욕지도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1902년 봄 동항리 논골 초가에서 손안로 (Rev. A. Adamson) 선교사와 박명출, 박인건, 박래찬, 이영백, 최명언 등이 처음 예배를 드린 것으로 시작됐다. 이것이 동항리교회였다. 동항리교회는 1955년 3월 13일 욕지 제일교회와 제이교회로 분열됐다. 두 교회는 1959년 2월 7일 다시 합쳐서 욕지중앙교회로 새 출발 했으나 얼마 후 욕지교회(통합)와 욕지제일교회(합동)로 또다시 분열됐다. 그 뒤 욕지제일교회는 1980년 4월 16일 욕지제일교회와 욕지서부교회로 분열됐다.

손성택 목사(55)는 5년 전 욕지제일교회에 부임했다. 그는 "물론 통영에 있으면서 섬 교회도 생각해 보고 시골목회도 생각해 봤는데 욕지도는 생각을 안 해봤다"면서 "그런데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하시니 어쩌겠느냐"고 웃었다.

 
▲ 올해 설립 20년을 맞이한 욕지서부교회는 욕지항에 인접해 있다.     ©크리스찬리뷰

"와 보니까 교인이 거의 60대 이상이시더라고요. 주로 고구마 농사하시는 분들이신데 이분들을 붙들고 제자훈련한다고 성경공부를 시도했죠. 그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보니까 농사일 하시느라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 많아요. 일일이 심방하면서 기도해 드리고, 이렇게 하면서 유대관계를 쌓았죠."

손 목사는 이곳에서 가장 좋은 전도의 방법도 가정심방이라고 말한다.

"믿지 않는 가정을 찾아 심방해 보면요, 반갑게 맞아줍니다. 교회는 선뜻 나오지 않지만 반대는 안 해요. 기도해 드리고 명절 때는 필요한 생활필수품 갖다드리면 얼마나 좋아들 하시는지요."

욕지도의 전체 신자 수는 250명 정도다. 그 가운데 70여 명이 욕지제일교회에 출석한다. 손 목사는 일꾼이 필요해 훈련을 시키지만 곧 떠나버리고 만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어렵사리 한 명 전도하면 기존의 성도 두 명이 떠납니다. 뭍으로 이사를 가거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거나... "

 
▲ 욕지제일교회 담임 손성택 목사     ©크리스찬리뷰

실패한 그리고 성공한 목회자의 구분이 설령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는 틀림없이 실패한 셈이다. 100년 교회에 교인 수가 70명밖에 안 된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첫 번째 호주 선교사인 헨리 데이비스목사의 삶도 실패한 것일까? 선교지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어떠할까? 하나님의 계산법은 우리와 심히 다르다는 생각에 미치자 이사야서 55장이 떠올랐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욕지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겠다. 섬에 있는 미자립 교회들도 돌아볼 것이다"라고 말하는 손성택 목사는 부산진교회 손명암 장로가 그의 부친이다.

욕지제일교회 이도성 장로(80)는 "교회가 분열이 될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면서  "싸움의 제일 큰 원인은 WCC(세계교회협의회)이었다."고 회고했다.

 
▲ 1887년(고종 24년)을 개척원년으로 삼고 있는 욕지도는 1920년대부터 19 90년대까지 남해안 어업전진기지로 큰 명성을 떨쳤다. 사진은 욕지 항구와 어촌 풍경     ©크리스찬리뷰

"WCC 에큐메니칼 운동을 제가 극구 반대했어요.  결국 WCC를 지지하는 성도들과 나뉘어져 그 쪽은 통합측 교단이 되어 욕지교회가 된 겁니다. 그런데 지금 그 교회가 창립 년 월일을 우리교회와 똑같이 사용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도성 장로는 겸연쩍었는지 홍조를 띠고 있었다.

이 장로는 "당시 선교사님들이 통통배를 타고 이 섬까지 오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그렇게 선교사님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내가 예수를 믿게 됐다. 뿐만 아니라 내 두 아들이 모두 목사가 됐다."고  감격해 했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하는 욕지서부교회 원경남 목사(43)는 해군부대를 사역지로 하고 지금껏 섬겨오고 있다. 그는 "매주 목요일 부대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며 "욕지도에 온 것은 우연치 않은 일이었다."고 말한다.

"거제도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 도시로 나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꿈에 이 교회가 보이더라고요. 너무 생생해서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이 섬에 오게 됐습니다."

후회는 않느냐고, 대놓고 물었다.

 
▲ 욕지서부교회 담임 원경남 목사     ©크리스찬리뷰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역입니다.”

원 목사는 "서부교회 성도는 25명이지만 기쁘게 감당하고 있다"면서 "하나님의 일에 있어 비전이란 대단히 중요하다. 섬 선교는 열정보다 인내가 긴요한 곳"이라고 말한다.

"교회당이 지대가 낮아 태풍이 불면 예배당에 물이 들어와 재건축이 필요해 온 성도들이 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말해 놓고, 그는 수평선 멀리로 시선을 던졌다.

박갑순 목사가 욕지교회에 부임한 것은 2004년 11월이었다. 그는 섬 목회를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세상 사람들은 가벼이 말한다. 삶은 곧잘 예기치 못했던 곳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그는 예기치 못했던 섬을 향해 이야기한다.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예비해 두신 사역의 현장이라고.
 
▲ 욕지교회 담임 박갑순 목사     ©크리스찬리뷰

"아무래도 노인들이 많다보니 복지 쪽으로 사역방향을 정하고 노인대학도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됐습니다. 복지사 자격증을 가지고 왔거든요. 보니까 주민들이 현실 안주적인 그런 부분이 많고 자존심이 강하고 배타적이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어요. 그러나 정도 많아서 한번 마음을 열면 끝까지 믿어주고 모든 것을 나눠주기도 합니다."

박 목사는 "교회들이 앞서가는 교육 자료를 가지고 훈련하기는 어렵다"면서 "우선 그들의 필요한 부분들을 찾아 섬겨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그는 "중학교 밖에 없으니까 자녀들이 중학교를 졸업하면 이 섬을 다 떠나간다. 그러기에 주민들이 상처가 많다"고 설명하고 "지난 5년간 이곳에서 사역하면서 하나님이 왜 이곳에 나를 심었는지를 깨닫게 해주셨다."고 고백했다.

 
▲ 욕지교회 설립 100주년 기념비 앞에서 기념촬영. 오른쪽부터 박갑순 목사(욕지교회), 이도성 장로(욕지제일교회), 손성택 목사(욕지제일교회), 김명동 편집인(크리스찬리뷰), 원경남 목사(욕지서부교회), 이인식 장로(전 창신고 교장)     ©크리스찬리뷰

현재 욕지교회 출석교인은 80명이다. 욕지교회는 2004년 4월 23일 교회설립 100주년을 맞아 100주년 기념비를 교회입구에 세웠다.

"어디에서 사역하든지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있다는 것보다 큰 축복이 있겠습니까."

그의 마지막 말에 가슴이 저렸고 기자는 뒤뚱거리며 통영행 여객선으로 올라섰다.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고. <계속>

 

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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