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 (베드로후서 1:20)
불경스럽지만 어떤 의미에서 성경은 내 장난감이 맞다. 매일 마주하면서 말을 건다. 편안한 상대는 아니다. 오히려 많이 불편하다. 나는 성경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한다. 말씀 앞에 내가 서고, 말씀이 나를 해부한다. 성경은 결코 내 장난감이 아니다.
치과에서 목회자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은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 다소 들떠 말씀하셨다. 성경을 보는 눈이 열렸다고. 영적인 말씀을 영적으로 해석하니 다 풀리더라고. 얼마나 좋은 일인가! 축하해 드렸다.
하지만 모든 성경이 다 풀리는 마법의 열쇠는 존재하지 않기에 염려스러운 면도 전했다.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여러 방편 중 다른 해석법이 통하지 않는 벽을 만나면 취할 수 있는 방식이 영적 해석이다.
이스라엘이 주목받는 요즘, ‘이스라엘 회복 운동’과 관련된 성경해석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운동은 세대주의 신학과 밀접하다. 역사를 7개의 시대로 나눠 놓고 각 시대에 따라 하나님께서 다른 경륜과 섭리로 일하신다는 영국 다비의 세대주의 신학은 미국 스코필드의 관주성경으로 세력을 넓혀 1900년대 미국의 오순절 교회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여기에서 늦은비 운동이 나오고, 이는 나중에 신사도운동의 모태가 된다.
초기 한국교회에도 세대주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가 많았다. 장로교조차 한국 개신교 전파 역사의 절반을 넘어서는 한국전쟁을 전후해서야 개혁주의 신학을 회복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교회 현장에 혼재된 가르침이 난무하는 이유다.
한국에서는 송만석 장로의 메시아닉 쥬(KIBI, Korea Israel Bible Institute), 그리고 선교 법인 인터콥(InterCP)이 운영한다고 알려졌고 코로나 시국을 통해 주목받았던 상주 BTJ(Back To Jerusalem) 예루살렘 센터 등이 활발히 활동한다.
유대인 목사 키이스 인터레이터의 주장대로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해 이스라엘 선교에 힘써야 한다고 가르친다. 여기에 신사도운동까지 결합해, 구약부터 면면히 이어지는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를 왜곡하고 있다.
유대인을 중심에 둔 구원과 종말 해석은 비성경적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감람산에 임하지 않는다. 구약에도 이스라엘의 전 민족적 구원은 일어나지 않았다. 복음은 유대인으로 특정되지도, 이방인으로 한정하지도 않는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구원받는 교회라는 제3의 종족이 탄생했다. 유대인의 특수한 지위가 편향적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계속되다가 역사의 끝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된다는 세대주의적 가르침은 허황하다.
이론적 취약성을 가진 거짓 교사는 성경 인용에 더 집착한다. 성경을 선택적으로 다룬다. 확증편향이다. 맥락 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가르침을 여기저기 갖다 붙이는 짜맞추기, 짝맞추기식 해석이 이단 사이비의 온상이다.
당연히 무리한 적용이 따른다. 급기야 신앙과 생활에 자리 잡는 비정상도 간과한 채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성경 가르침과 동떨어진다.
하마스의 이번 선제적 공격은 비난받아 마땅하고 이스라엘의 분노도 정당하다. 하지만 길게 보면, 중동의 비극은 이기적 제국주의 산물로, 가자지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창살 없는 감옥, 인권 유린의 표본이었고, 지금은 살육장으로 변해간다. 팔레스타인은 나라 없이 떠돌던 이스라엘인의 초기 정착을 도왔다.
무력과 협박으로 몸집을 점차 키운 이스라엘이,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듯, 이제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점령하고 추방해 과거 자신들처럼 나라 없는 떠돌이로 만들려 한다는 뉴스조차 나온다. 멈춰야 한다.
나는 두렵다. 기독교인이 그릇된 성경해석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낭만적 환상에 젖어, 반인륜적인 폭압의 고삐를 바짝 조이는 정의롭지 못한 국가권력을 묵인하거나 맹목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을지.
하나님의 정의는 불의한 강한 자를 향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의로운 연약한 자를 품는다. 성경은 바른 해석과 적용을, 시대는 균형 있는 통찰과 분별을, 그리고 현실은 탐욕 없는 자족과 평화를 요구한다.〠
서을식|시드니소명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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