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 (레위기 19: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고,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해야 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위기 19:2).
하나님의 거룩함이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속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판결이 바로 서야 했다.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심지어 가난한 자의 편도 들지 않아야 한다. 즉 공평해야 한다. 이것이 진실에 기초한 공의이고 중용이며 치우치지 않는 정의다.
슬프게도 현실은 혼탁하다. 이러한 원칙이 완전히 뒤집어졌음을 보여주는 말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다. 살권수(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는 찾아볼 수 없고, 국가 권력이 총동원되어 반대 세력 잡아 죽이려 혈안이 되어 있으니, 나라 돌아가는 꼴이 말이 아니다.
내가 최근에 정치적으로 비칠 수 있는 내용을 자주 언급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나보다 양심적이어야 할 나보다 잘난 사람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주변을 둘러싼 비리 의혹뿐 아니라 채 해병 사건 특검 요구로 온 나라가 들끓어도 제대로 된 양심선언 하나 없이 정권 방탄만을 외치며 몸을 사리는 고위공직자와 돌아올 손익계산에 바쁜 용기 없는 사람에 대한 실망감이 크다.
정권을 향한 수사라인에 있던 검사들을 직접 겨냥한 인사 교체가 있었음에도 검찰 종합 정보통신망에 구축한 시스템 ‘이프로스’가 조용하다고 해서 시끄러웠다. 인사권의 오남용으로 침묵을 강요한다. 교묘하지도 않다. 입틀막 정권이라더니 검틀막도 잘 한다. 다 읽히는 수임에도 통한다는 점에서 더 절망이다.
피해자처럼 보이는 검찰을 향해 ‘침묵을 깨고 나오시라’ 강변하고 싶지도 않다. 처음에는 ‘왜 저렇게 용기가 없을까?’ 싶었다. 나중에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고 혹시 욕심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날의 출세에 대한 욕심도 물론 크리라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자기 욕심에 이끌려 이미 한번 높여 놓아 현재 즐기고 있는 자기 신분이나 생활 수준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처지, 즉 더 낮게 내려앉을 용기가 없어서 그럴 수 있다.
피치 못할 환경적 상황에 둘러싸여 있기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아니다. 결국은 용기이고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욕심에 있다. 욕망은 수위 조절이 절실하다. 이에 실패하면 작은 파도에도 흔들려 삶에서 지켜온 원칙을 고수하기 어렵고 이에 따른 정신적 충격도 클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자기 관리의 실패다. 이 시대의 풍조는 누구나 높게 상승하려고 한다. 승진하고 싶고 힘을 유지하고 싶고 미래를 보장받고 싶어 한다. 출세하여 사회적 사다리를 오르려는 욕망은 마그마처럼 뜨겁고 분출구만큼 폭발적이다.
그래서 마그마는 땅 속에 있어야 한다. 일단 분출이 시작되면 파괴적이다. 욕심대로 한번 수준을 높인 후에는 다시 낮추기 어렵다. 지출이 늘수록 편리는 더하겠지만 돈의 노예가 되어 빠져들어 간 늪에서 다시 빠져나오기는 어렵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명예는 더럽혀지고 존경은 사라진다.
이 세상에서 용기 없이 되는 일은 아무런 책임이 없을 때나 가능하다.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책임에 걸맞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는 항복할 용기도 포함한다.
교황이 말했다. 우크라이나를 향해 어차피 자기 땅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지 못할 바에는 항복할 용기(the courage of the white flag)를 가지라고.
전쟁을 끝내는 것도 용기임은 틀림없다. 나서서 진실을 말함으로 소모적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대한민국을 구하고 양심의 가책으로 죽어가는 자신도 구하는 참으로 용기 있는 자 하나님의 거룩을 공의로 우리 사회에 배달할 사람을 기다리는 희망이 자꾸 커간다.〠
서을식|시드니소명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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