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ㆍ창원 - ‘제자들이 가는길’ (6-상)

글|김명동,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9/27 [14:51]
경남 거창군은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 등 3대 국립공원과 인접해 있는 산 깊고 물 좋은 곳이다. 넓은 들판이 산으로 둘러싸여 예로부터 넓고 큰 밝은 들이란 뜻에서 거열로 불렸다. 신라 경덕왕 16년(서기 757년)에 처음 거창으로 불렸으며 그뒤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조선조 고종 32년에 거창군으로 정착됐다.

 
▲ 1929년 4월 문창교회에서 설립한 월영유치원이 첫 번째 졸업식을 가졌다(1930년). 뒷줄 가운데가 클레어 엘리스(Clare Ellis, 한국명 이명선) 선교사이며 그녀는 1927년 통영에서 마산으로 사역지를 옮겨 유치원실습센터를 설립했으며 경남 전역에서 찾아오는 유치원 교사들에게 훈련과 실습을 경험하게 했다.     ©크리스찬리뷰 자료사진

인구는 6만 5천여 명으로 10년 전보다 1만여 명이 줄었다. 또한 인구의 감소로 인해 학교 수도 큰 폭으로 감소했다. 실제로 지난 2000년엔 거창에 76개의 학교가 있었지만 현재 52개로 줄어들었다. 모두가 저출산 탓이다. 기독교 인구는 5천5백여 명으로 인구대비 복음화율은 8% 정도이다. 복음이 전해진 지 100년이 넘었지만 복음화율이 낮은 이유는 이 지역이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 등에 산재한 큰 사찰들의 영향을 받고 있는 불교문화권이기 때문이다. 선교 초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교회가 세워진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1909년 10월 10일 설립, 고신교단의 모체-거창교회

거창에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은 두 가지 유형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타 지역(특히 진주, 서울 등)을 왕래하는 현지인들이 타 지역 신자들과 접촉하면서 신앙을 갖게 되고 거창지역에 기독교신앙을 전파한 경우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거창교회 설립의 동기를 부여한 오형선 씨의 경우이다.

 
▲ 거창교회 전경     ©크리스찬리뷰

오형선 씨는 금광을 경영하기 위해 서울에서 거창으로 이주해 왔는데 그는 서울의 기독교회관을 출입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이곳에 기독교 신앙을 전하게 된 것이다. 또 하나는 선교사들의 전도와 활동이다. 1905년을 전후하여 거창에는 선교사들의 왕래가 있었다. 진주에 주둔하고 있던 거열휴 (Dr. Hugh Currell) 선교사는 조사 박성애(전도사. 후에 진주지방 첫 한국인 목사가 됨)와 함께 거창을 순방하였는데 이 결과로 이 지역에도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1909년 10월 10일 거창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이날 모인 교인 수는 18명이었는데 이때 주남고(주남선)도 함께 예배에 참석하고 기독교에 입신했다.

주남선은 1912년 호주 선교사 맹호은(Rev. Fred Macrae)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집사, 장로를 거쳐 1930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경남노회 목사로 안수를 받고 제5대, 제7대 담임목사로 거창교회를 섬겼다. 그는 거창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 또 의용병을 모집한 독립군에게 자금을 제공, 항일 독립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했다. 주 목사는 일제 말 한국교회 항일운동의 최대 이슈인 신사참배 반대로 평양형무소에서 5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 출옥한 주 목사는 교회 쇄신운동을 전개하고, 1946년 한상동 목사와 함께 고려신학교를 설립한다. 한국전쟁 때는 심한 폭격 속에서도 기도하고 심방하는 등 목회현장을 초연히 지켰다. 공산군에게 붙들려 심한 구타를 당한 그는 후유증으로 1951년 3월 23일 63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치다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성도들이 1945년 8월 17일(해방 후 이틀) 평양감옥에서 석방되었다. 뒷줄 좌로부터 : 조수옥 선생,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이인재 전도사, 고흥봉 목사, 손명복 전도사ㅣ 앞줄 좌로부터: 최득지 선생, 이기선 목사, 방계성 전도사, 강화준 목사, 오윤선 장로, 서정환 전도사    ©크리스찬리뷰

김진성 목사가 제16대 담임목사로 거창교회에 부임한 것은 2000년 10월 22일이었다. 부산 삼일교회 부목과 제2영도교회 담임목사, 부산 장전교회 담임목사를 거친 김 목사는 침체되어 있는 교회의 틀을 바꾸기에 전력을 다했다.

"사실 제가 왔을 때는 교회가 성도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등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먼저 성경대학을 개설하고 일대일 양육, 바나바 사역 등을 통해 성도들에게 신앙의 확신을 갖게 했죠. 그런 후 새생명 전도단을 창단하여 노방전도와  캠퍼스, 병원 등지에서 전도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거창교회 땅끝선교회'를 창립하여 선교사 7명을 후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김 목사는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잘 따라주었다"면서 "당시 교인 수는 340여 명으로 새가족 성경공부를 거쳐 새신자로 등록하는 성도수가 해마다 늘어나 현재 1천여 명이 출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거창교회 땅끝선교회'는 2009년 5월 17일 '거창교회 오형선 선교회'로 명칭을 바꾸고, 현재 미얀마, 필리핀 중국, 브라질 등 14명의 선교사를 후원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중국 운남성 쭈리땅교회를 건축하여 봉헌했다.

김진성 목사는 "사회봉사위원회에서 지역 내 독거노인들에게 반찬을 만들어 직접 찾아가 드리고 있으며 어려운 사람들에게 생활비, 수술비, 학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고 말하고 "2001년 설립된 주남선 장학회는 거창지역 7개 고등학교에서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7년째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거창교회 16대 담임 김진성 목사     ©크리스찬리뷰

거창교회 예배당 입구에는 눈에 띄는 문구가 있다. 바로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이다. 이 말은 역사에 저항한 주남선 목사가 평생 삶의 지표로 삼던 말씀이다.

거창교회는 지난 2006년 주 목사 소천 55주년을 맞아 그의 삶과 사상을 조명하는  기념관을 교회 내에 마련했다. 이 기념관은 740여 평의 부지에 연건평 726평으로 지상 5층 지하 1층 규모로 건축됐다. 기념관은 400석 규모의 다목적 집회장과 주 목사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주 목사의 일대기가 적혀있는 책들과 당회록, 성경책, 종, 강대상 그리고 관련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기년관은 또 지역 교회와 주민들을 위해 각종 예배, 집회와 예식장, 문화행사 등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꾸몄다.

김진성 목사는 "이 기념관은 말씀에 생명을 건 순교신앙과 기독정신의 센터이자 21세기 교회의 참 모습을 제시하는 비전의 산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거창교회는 지난 해 100주년을 맞아 '거창교회 100년사'를  발간했다.

 
▲ 거창교회 입구에 주남선 목사가 평생 삶의 지표로 삼았던 ‘죽도록 충성하라’는 성경구절이 돌판에 새겨져 있다.     ©크리스찬리뷰

김 목사는 "교육하는 교회, 전파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 이 세 가지 목표를 두고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다"면서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한 세기를매듭지고 또 한 세기를 새로 시작하는 거창교회를 더욱 큰 은혜로 인도하실 줄 믿는다"고 말했다.

 
믿음의 인재산실 - 거창고등학교

거창고등학교 교정으로 들어서자 학생들이 우리를 보고 "안녕하세요?" 라고 반갑게 배꼽인사를 한다.  얼굴이 밝고 인사성도 10년 전과 똑같다.  

거창고등학교는 근대교육의 산실이자 신앙유산을 계승한 '뼈대 있는' 학교다.

호주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에서 파송한 스키너 (Miss A. M Skinner, 한국명 신애미)가 거창에서 첫 학교를 시작한 것은 1915년이었다. 그녀는 보통학교를 설립할 계획이었으나 총독부의 법적 규제 때문에 성사되지 못하고 정규학교가 아닌 강습소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강습소가 명덕강습소로 현 거창고등학교 전신이다.

 
▲ 김진성 목사가 주남선 목사 기념관을 안내하며 본지 김명동 편집인에게 전시된 유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입시경쟁이 치열하다는 서울 강남의 학부모들 사이에 수년 전부터 수상한 소문이 돌았다. 학원도 없고 과외조차 받지 못하는 환경에 있는 지방의 한 고등학교가 부모로부터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는 서울 8학군의 고등학교를 제치고 서울대와 연·고대에 더 많은 합격생을 배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도시의 학생들이 학원이다 과외다 보충수업이다 입시에 매달리는 시간에 이들은 농사일을 배우고, 가축을 키우며, 토끼몰이에 눈싸움, 심지어는 야영과 예술제까지 대학입시와는 전혀 관계없는 교과목 외 활동에 더 많은 공을 들인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난 번 한국교육과정평가연구원이 발표한 대입수학능력시험 평가자료 발표에서 군 단위 농촌학교로는 거창고가 가장 돋보이는 농촌학교로 이름을 떨쳤다.

전교생 대부분이 기숙사 생활을 해 치맛바람도 고액과외도 학원수업도 없는 현실을 감안하면 믿기 어려운 결과다. 저녁식사 후 이뤄지는 자율학습은 말 그대로 자율, 뭘 공부하든지 상관하지 않으며 설사 '땡땡이'를 쳐도 문제 삼지 않는다고 한다. 한 때 교육부가 시골학교에서 벌어진 '기적'을 파헤치기 위해 연구팀을 내려 보내는 등 야단을 떨기도 했다.

이 사실에 "축하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자 김선봉(58) 교장은 칭찬에 대해 오히려 부담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김 교장의 이러한 반응은 학교가 수능시험 평가로 서열이 매겨지고 수준이 결정돼서는 안 된다는 신념 때문이다.

지난 수년 동안 수능시험 평가에서 연속으로 전국 20위권 이내를 차지하고 있는 거창고는 이미 군 단위 학교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학입학 비율과 수능평가 등에서 높은 성과를 올리고 있고 이로 인해 많은 언론매체를 통해 그 성과가 소개됐으며 이 학교를 소재로 한 책과 다큐멘터리가 제작됐을 정도다.

 
▲ 2004년 10월에 신축한 거창고등학교 도서관. 2층 전체가 도서 열람실이며, 멀티미디어 시설을 갖춘 소강당, 컴퓨터실, 회의실을 갖추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한 해 졸업생이 120명에 불과한 시골의 미니학교이지만 1960년대부터 매년 소위 일류대 합격생은 졸업생의 20%에 육박하는 20여 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05년부터 4년째 교장을 맡은 김선봉 교장은   "우리 학교가 좋은 성적을 얻었다고 선전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우리 선생님들이 성적만이 아닌 학생들의 인성과 생활인으로서의 자세를 가르치는데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부분에 더 많은 배려를 해 주셨으면 한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이번 수능성적이 발표되고 나서도 많은 취재진이 몰려와 성적을 올리는 방안에 대해 문의해 왔지만, 우리학교가 추진하고 있는 교육목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소 내뱉기 어려운 말을 꺼낸 김 교장은 "우리 교직원들은 학교 창설자인 고 전영창 교장 선생님의 유지에 따라 기독교 이념을 바탕으로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인재를 육성해 내는 것이 기본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는 따라서 우리는 학생들에게 지식교육에 앞서 신앙교육과 정서교육을 앞세우고 있으며 이를 사전에 학생들에게 통보해 이를 거부하는 학생들은 아예 입학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 학교 출신들이 사회에 나가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는 등의 소식을 전해 올 때가 있습니다. 물론 축하는 해주지만 그렇다고 현수막을 걸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선생님들이 보기에는 공부를 잘해서 고시에 합격한 아이들이나 농사일을 잘 배워 농사를 하고 있는 아이들이나 또 출신지역에서 장사하는 아이들이나 모두 똑같이 성공한 제자들이기 때문이지요."

수십 년 전부터 한 학년이 남녀를 합쳐 120명으로 정예화한 이 학교는 지금까지 학생들에게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정서교육과 지식교육을 해왔고 소문을 통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많은 뜻있는 인사들이 자녀를 이 학교에 보내왔다. 따라서 거창고는 위치만 거창에 있을 뿐 '전국구'라는 평가를 받았고 학생들은 수십 년 전부터 특별한 인원 외에는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 학생들은 도시의 학생들처럼 과외를 하거나 특수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대신 학생들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겠다는 목표에 따라 일찌감치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정하고 지식배양과 함께 사회에 나갔을 때 필요한 정서교육을 겸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비교적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는 것도 바로 학업성적에 대한 불안감 없이 각자 학교와 자신이 정한 목표대로 꾸준히 노력하는데 있습니다."

 
▲ 거창고 7대 교장 김선봉 선생     ©크리스찬리뷰

'공부벌레는 사양 한다'는 학풍은 20개가 넘는 각종 동아리와 무수한 축제에서도 엿볼 수 있다. 개교기념일을 전후해 모든 수업을 중단하고 사흘간 벌이는 예술제, 지리산 계곡으로 떠나는 1박 2일 캠프 등. 첫눈이 내리면 무조건 책을 덮고 전교생이 학교 뒤편 아홉 산으로 달려가 한바탕 겨울축제에 빠져든다. 수십 년 째 이어져온 거창고만의 토끼몰이다.

김 교장은 "학교의 취지를 잘 모르는 학부모 중에는 더러 학교수업시간은 적고 학생들을 예술제나 연극제 등산대회 등에 동원하는데 대해 항의를 하는 일도 있지만 나중에 알고 나면 오히려 격려를 해주는 경우가 많다"고 털어놓았다. 

이 학교의 정신은 교훈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에 그대로 담겨있다.

김선봉 교장은 "이러한 교육을 받은 우리 졸업생들은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그리 돋보이지 않지만 나름대로 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작은 수의 동문이지만 이렇게 자주 만나고 잘 단결된 동문회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①연극을 끝낸 거창고 학생들이 전영창 교장과 함께(195 7 년) ②거창고 교사와 전교생 (1959년) ③거창고 전경(196 8년) ④거창고 교사들(1970년)     ©거창고등학교

109년 전통, 섬김과 양육 목회지향 - 문창교회

아듀 마산!

경남 마산시와 진해시가 7월 1일 통합 창원시 출범과 함께 간판을 내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10년 '창원부'가 '마산부'로 개칭된 지 100년 만이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1949년 8월 15일 마산부가 마산시로 바뀌었다. 마산시는 1970년대 수출자유지역설치, 남해 구미고속도로 건설, 창원공업기지 조성, 1980년대 후반 두 차례에 걸친 마산만 매립으로 인구가 50만을 넘어서자 1995년 창원군의 5개 면과 통합해 지금의 마산시가 됐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 수출자유지역에 있던 한일합성, 한국철강 등이 철수하면서 한때 50만 명을 넘어섰던 시 인구가 40만 명 선으로 줄어들면서 창원과의 통합을 추진한 것이다.

문창교회의 설립은 호주 선교사 아담슨의 선교활동이 가져온 결과였다. 1900년대 이후 마산지방은  아담슨의 순회전도 지역이었으므로 그는 수시로 백도명 조사와 함께 마산을 방문하였고 1901년 김마리아, 김인모 등 여자 7명이 신자가 되었다.

1903년에는 김주은이 믿게 되었는데 그의 아들 이승규(시조시인 이은상 부친)  또한 교인이 되었다. 이러한 형편이 되자 아담슨이 성호리의 한옥 한 채를 사서 예배당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곧 문창교회의 전신인 마산포교회이다. 문창교회는 여성들이 창립을 주도한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 거창고 3대 교장 전영창 선생의 동상     ©크리스찬리뷰

문창교회는 교육과 문화, 계몽운동에 선봉이 됐으며 애국운동의 거점이 됐다. 교회는 유치원을 설립해 어린이 조기 교육에 힘썼고, 야학교를 만들어 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 신식 교육기관인 독서숙은 창신중.고와 창신대학으로 발전했다. 여자 교육기관인 의신여학교를 설립해 여성 교육에도 앞장섰다.

초대목사는 호주 선교사인 아담슨(한국명 손안로)이였다. 한석진 목사(3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 사람이다. 함태영 목사(6대)는 목회자이면서도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했으며 해방 후에는 부통령을 지냈다. 나라와 교회를 타락과 멸망의 불구덩이에서 건져내려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8대)의 혼이 담긴 예배당이다.

 
▲ 마산 최초로 세워진 문창교회(가운데). 교회 뒤편 보이는 제비산 기슭은 호주 선교사들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크리스찬리뷰

또한 예장 고신 교당을 창설한 한상동 목사(9대), 만주 독립군 출신인 김석찬 목사(14대) 등 기라성같은 목회자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말씀의 성전, 눈물의 성전, 기도의 성전이었다. 시조시인 이은상도 문창교회 출신이다. 김영삼(YS) 제14대 대통령 가문과는 인연이 깊다. YS의 부인 손명순 여사가 어릴 적부터 믿음의 계단을 쌓은 곳이다. 손 여사의 신앙심은 대통령 선거 운동 때 주일성수를 위해 일요일 유세를 중단시킬 정도였다.

이화여대 재학 중 결혼한 손 여사는 51년 3월 6일 문창교회에서 예식을 올렸다. 결혼 전 서울대 철학과 4학년이었던 YS는 '할아버지 위독'이라는 거짓 전보를 받고 급히 마산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맞선을 본 지 한 달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 초기 선교 역사를 전시하고 있는 문창교회 사료실     ©크리스찬리뷰

"우리교회가 있는 지역은 기초생활수급자 비율이 12%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기 위해선 이들을 돌보지 않을 수 없어요."

올해로 부임 5주년을 맞은 김세권(52) 목사는 교회 주변 지역에 형편이 어려운 이웃이 많기 때문에 이들을 돌보는 일에 신경을 많이 쓴다.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일단 춥고 배고픈 사람들의 허기를 면하게 하는 것이 더 급하기 때문이다.

"복지를 통한 목회를 하지 않으면 교회 존립이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을 제대로 받아야 합니다."

김 목사는 서울 구로동교회 출신이다. 교수가 꿈이었던 그는 미국에서 유대주의 공부를 했다. 한국 내 탈무드 공부 1세대다. 하지만 경제적인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뒤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다. 42세에 목회자가 됐다. 철두철미한 전도와 복음 전파가 그의 사명이다.

▲ 문창교회 제16대 담임 김세권 목사     ©크리스찬리뷰

김 목사는 개인적으로 셀과 소그룹 성경 공부에 관심이 많았지만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교회의 맥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강력한 전도폭팔 훈련과 제자 훈련을 시킨다. 문창교회의 새신자 정착율은 70%다. 새신자 성경 공부와 새가족부의 헌신의 결과다. 당회원들도 훈련은 필수다. 새가족부의 도우미들은 새신자들에게 8주간 의무적으로 섬기게 한다. 또한 구역과 선교회, 새가족부를 통해 선물도 세 번 받게 해 감동을 준다.

김 목사는 "이 지역은 여전히 불교세가 강하다. 이단도 많다. 해안지역이라서 무속신앙도 활개를 친다."고 말하고 "이곳에서 목회하는 것이 의미있다. 도전의식이 생긴다. 1%라도 지역복음화율을 끌어올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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