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자의 목마를 탄 작은 거인

테너 최화진 교수

글/송기태,사진/권순형ㅣ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02/19 [11:26]
미래 비전이 중요하다 
 
▲ 쓰나미 자선콘서트를 마치고 시드니타운홀에서    ©크리스찬리뷰

“호주가 너무 좋네요. 공기가 맑고 자연경관도 아름답고 말입니다. 높은 빌딩도 시티 외엔 없고요. 또 하나 저는 낚시를 좋아하는데 배 선착장에는 기름 한 방울 없는 청정해역이더군요.” 
  
그는 호주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로부터 흔히 들을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말부터 꺼냈다. 그러나 그가 관찰한 자연은 보통 사람의 관찰과는 다르다. 단풍잎 하나에서도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튀어나오고, 이내 찬송으로 이어진다. 그럴 때 잘 부르는 찬송이 바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나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등이며, 곧바로, 그는 이사야 43장 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함이니라”라는 말씀으로 연결시켜 아름다운 자연을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당연한 환호임을 고백했다. 
  
“단지 제가 사는 미국과는 길이 거꾸로 되어 있어서, 길 건너는데 저는 왼쪽부터 쳐다보는데 차는 반대쪽에서 오더라구요. 잘못하면 여기서 큰일 날 뻔했지요.” 
  
쓰나미 자선 콘서트를 위해 호주에 온 그는 ‘작은 거인’이었다. 오척단구의 아담한 그의 몸은 ‘청아한 악기’였다. 그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향은 어느 악기보다 투명하고 밝았다.       
  
“크리스찬으로서 지나온 이야기보다는 미래 비전을 이야기하는 앞일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지금 1초 1초 지나가는 시간이 우리의 인생이 아닙니까? 지나가는 순간순간마다 우리가 참되고,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내 주머니가 열렸는가? 닫혔는가? 현실 속에서 진실되고 참되게 살아보자고 하지요. 우리가 식품점같은데 가서 그저 한두 알 집어먹을 수 있는 체리같은 것을 막 집어 먹는 것도 따지고 보면 도둑질이잖아요. 그리고 비행기를 타도 이어폰같은 것도 옛날 같으면 그냥 들고 나올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런 유혹을 받아도 그러지 못하지요.” 
  
늦은 밤 호텔에서 여독도 안풀린 그를 만나자, 약간은 피곤한 듯했지만, 음색 하나는 맑고 밝았다. 지나온 날들의 이야기를 하며 쑥스러워하는 그의 삶을 한마디로 ‘평정’하면 ‘전능자의 목마를 탄 작은 거인’이었다. 
 
▲ 타운홀에서 자선콘서트를 마치고     ©크리스찬리뷰
 
  
평생 음악인생, 찬송인생으로 살아가는 그에게 최초로 음악을 가르쳐 준 스승은 다름 아닌, ‘구식 라디오’였다. 대여섯 살 먹던 어린 시절, 그 조그만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통해 노래를 배운 그는 그 속에 ‘사람의 머리’가 들어가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어쩌면 그냥 기계음을 들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머리’로부터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배운 노래는 찬양과는 전혀 달랐다. 유행가가 대부분이었다. 이상하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두세 번만 들으면 가사와 음정을 다 외울 정도였다. 그렇게 외운 곡이 60-70곡이었다. 유치원도 안간 꼬마의 실력이라기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과히 천재적이었다.  
  
“형의 친구들이 저희가 살던 왕십리 깡패들이었습니다. 그 형들이 와서 ‘얘 화진아 노래 좀 가르쳐 줘’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유치원 입학 전부터, 태생적 ‘음악 교사’였던 그가 이제는 미국 대학의 ‘음악 교수’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의 삶은 고생과 고통과 고난으로 점철되어 마침내 성장과 성취와 성공으로 꽉 차있었다.  
 
라디오의 사사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누나”라고 소월이 노래한 왕십리에서 그는 1952년 형제 많은 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책을 만드는 편집인으로서, 야담을 많이 읽고 잘 풀어냈기에  왕십리 그의 집은 밤마다 그의 부친에게 이야기를 듣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의 부친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다가 목이 마르면 “화진아, 노래 한 번 불러봐라”며 그를 불러 세웠고, 그 사이 부친은 목을 축일 정도였다. 
  
물론 ‘라디오 선생님’에게 돈 한푼 안내고 사사를 받은 덕분이었다. 이때 그에겐 진귀한 경험이 또 하나 있었다.
 
▲  간증하는 최화진 교수   ©크리스찬리뷰
 
 
“제가 어렸을 때는 왕십리 감리교회가 왕십리에서 제일 큰 건물이었어요. 크리스마스 때 가서 사탕을 얻어먹기도 했지요. 그 교회 앞을 지나가면 성가대 소리가 천사의 목소리처럼 들렸습니다. 개를 끌고 산보하면서 몇 시간씩 성가대 찬양하는 것을 들여다보며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니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한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때부터 그는 막연히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저 베토벤, 모짜르트같은 유명한 음악가를 꿈꾸기도 했다. 그러다가 테너라는 성악분야를 알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당대 유명한 테너였던 프랑코 코넬리의 노래를 들으면서였다. 
 
“어떻게 사람에게서 저런 아름다운 소리가 나올까? 하며 그의 목소리를 흉내내곤 했습니다. 문득 제대로 음악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음대에 들어가서 코넬리같은 훌륭한 테너가 되고 싶었고요. 그러나 저희 집은 아버지가 사업을 하시다가 부도를 내면서, 커다란 집은 물론 모든 재산을 날려버렸을 때였습니다. 매일 빚쟁이들이 찾아와 돈을 갚으라고 독촉했고, 이사도 몇 번이나 다녀야 했습니다. 고등학교는 겨우 들어갔지만 대학은 꿈도 못꾸었지요.” 
  
이때 그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면서, ‘쟤네들은 돈이 많은데, 우리 집은 왜 돈이 없을까? 사회적인 배경도 좋은 것같은데 우리 집은 왜 그렇지도 못할까? 다른 애들은 키도 큰데 나는 왜 키까지 작을까?’하는 고민들을 하면서 살았다. 그러면서 세상을 점점 부정적으로 보면서 ‘나는 왜소한 체구에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겠구나!’하는 생각도 했다. 그 이후로 부자 아이들을 본다거나, 누가 잘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부자들은 우리 돈 다 뺏어가서 부자 되고, 누가 잘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배가 아프고, 괜히 속이 뛰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처럼 누가 잘됐다는 말을 들으면 그렇게 속이 뒤틀리고 상했다. 
  
고등학교 입학 전에 집이 망한 그는 고등학교 시절 월사금이 없어 거의 매일같이 교무실에 불려가 들볶이는 바람에 학교 가기도 싫었다. 집에 오면 하는 일이라곤, 개 훈련시키고, 목욕시키고 데리고 다니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사람들과 말도 안했다. 가난으로 찌들고, 대학 진학은 꿈도 꿀 수 없고, 노래를 할 수 없게 형편에 처한 그는 어느덧 염세주의자가 되어 방황하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한숨만 내쉬며 세상을 증오하며,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침울해 하던 그에게, 고등학교 2학년 되던  어느 날 한 친구가 찾아왔다. 
  
“화진아, 우리교회 찬양대에서 찬양하면 정말 멋질 것 같아. 우리 지휘자에게 너 소개해 줄께. 이번 주에 함께 교회가서 노래하지 않을래?” 
  
다시 노래할 수 있다는 말 한 마디에 친구를 따라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하여 그는 68년도에 중앙청 옆에 있는 체부동성결교회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교회 들어서자 마자 들려오는 찬양소리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하였다. 
 
염세주의자에게 복음이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내주여 내 발 붙으사...” 
  
“아, 나도 저런 노래를 불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이전의 저의 노래는 전부 유행가였어요. 제 십팔 번 노래가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죽창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사랑은 눈물의 씨앗’같은 노래였습니다. 예배 도중에 지휘자를 만나면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하나, 아는 찬송가는 없고, ‘앵두나무 우물가에’는 할 수 없고, 그래도 학교에서 배운 ‘보리밭’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하며 소위 성가대 오디션에 골몰했지요.” 
  
친구가 지휘자를 소개해주자 그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를 듣고난 지휘자가 그 자리에서 합격을 결정했다.. 
  
“최화진 씨, 고등학생인데 참 소리가 예쁘네요. 테너 파트에 대원이 모자라서 고민인데 봉사 좀 해주세요.”  한 마디로 고등학생이 장년 성가대에 월반 합격한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찬양대에서 대환호였다. 
  
“화진 형제! 정말 노래 잘하네.” 
  
“찬양대 솔리스트를 하면 좋을 것 같아.” 
  
찬양대원들은 하나같이 그를 ‘잘 한다’고 칭찬해 주었다. 갑자기 어깨가 으쓱해지고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막내라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 집에서는 날마다 ‘곰같다’란 소리를 많이 들어온 그에게 교회만 오면 모두 아낌없이 흠뻑 칭찬을 해주었다. 교회에 나가는 것이 즐거웠다. 그렇게 3주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찬양대석에 앉아 찬양을 하는데 갑자기 이상한 기운에 사로잡혔어요. 몸이 뜨거워지면서 하염없이,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는데 눈물이 흘렀어요. 마치 몸속의 모든 물이 눈물로 다 빠져나온다고 여겨질 정도로 많이 쏟아졌습니다. 다른 사람이 알까봐 성가 가운으로 몰래 닦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가운이 흥건히 젖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방언이 터졌어요. ‘바로 이것이 성령체험이구나’하고 느꼈지요. 그동안 저를 부정해왔던 것, 가족들을 비참하게 여겨왔던 것들을 회개하며 앞으로 감사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시드니타운홀에서 열창하는 최화진 교수     ©크리스찬리뷰
 
  
그날 교회 문밖을 나오는데, 하늘이 평소와는 다른 파란 색깔로 보였다. 그 순간 평소에 한 번도 써보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아, 하늘이 아름답다!” 
  
염세주의자였던 그는 그때까지 결코 ‘아름답다’는 말을 써보지도 않았을 뿐더러, 아예 그런 계통의 말조차도 싫어했다. 그러나 성령체험 이후 그를 스쳐가는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때부터 긍정적인 신앙인으로 변했고, 어려운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만히 친구들을 보니 대학 시험준비 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그는 음대 성악과를 가려면 개인 레슨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난한 집안 형편을 생각해 꿈을 접었다. 그리고 교회만 열심히 나가는 중에 어느 날, 신체검사 통지를 받았다.  
 
우연한 만남은 없다
 
도무지 일어날 것같지 않은 기적(?)이 일어났다. 155센티의 단구인 그는 충분히 군 면제 사유에 해당되었다. 그런데 현역입영 판정을 받았다. ‘설마 내게도 영장이 나올까?’하고 있었는데,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 왜소한 체구로 어떻게 군대 생활을 해? 하고 겁이 났지만, 그때 저는 이미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교회 가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일 앞자리에 나가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토록 좋은 목소리를 주셔서 행복합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저의 사는 날까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런데 제가 군대를 가게 되었는데 하나님 겁이 납니다. 어떻게 군대생활하고, 훈련을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하고 말입니다.” 
 
▲ 시드니중앙장로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한  최화진 교수. 그는 키가 작아 보이지 않는다며 강단 앞으로 나와 간증을 전했다.      ©크리스찬리뷰
 
  
어렵게 고교를 졸업을 한 그는 얼마 후 입대했다. 논산훈련소를 마치고 육군본부 합창단으로 배치를 받았다. 단원 대부분이 김자경 오페라단 테너 주역 가수 등 소위 ‘쟁쟁한’ 곳에서 활동하다 온 군인들이었다. 그곳에 가니 선임병이 “야 너 노래 한 번 해봐” 해서 교회에서 부르던 찬송을 부르니 뜻밖의 제안을 했다. 
  
“야, 너 목소리 좋-다! 우리 남성 4중창단을 만들어보자.”하여 시작된 이 중창단을 통해 그의 인생에 새로운 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찬송가를 뒤적여 ‘바다에 놀이 지는 때’(477장)를 네 명이 화음을 넣어 부르는데, 그때 제 느낌은 ‘천상의 하모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 하모니를 가지고 저를 사랑해 준 체부동 교우들에게 찬양 한 번 했으면 죽어도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찬송을 마치고 나자 사병 하나가 우리 군복이 그린 컬러이니 우리 중창단 이름을 ‘그린 콜테스’라고 붙이자고 하여 그 이름으로 영내는 물론이고 여기 저기 찬양하러 다녔습니다. 그때 그 중창단 멤버들이 지금은 목사로, 사역자로, 실업인으로 다들 풍성한 삶을 살고 있어요.”  
  
그 중창단의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외부에서 특송 요청이 쇄도했다. 교회, 강연회, 행사장 등 오히려 부대에 있을 때보다 밖에서 노래하는 시간이 많을 정도였다. 
  
“오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께서 군데군데, 적재적소에 좋은 사람과의 축복된 만남을 통해서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아주 조그만 교회에서 특송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곳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신 분이 바로 극동방송 사장인 김장환 목사님이었습니다. 예배 끝나자 김 목사님께서 뚜벅뚜벅 오시더니 ‘아, 자네들 찬양 너무 멋있어! 내가 말이야 77년 1월에 세계일주 선교여행을 계획하는데, 제대한 뒤 나와 동행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셨어요. 
  
그 제안을 듣자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그 흔한 기차 한번 못타고, 논산 훈련소 갈 때 처음 기차를 타본 저에게 세계 일주라니요. 잠이 안왔습니다.” 
  
드디어 1977년 초 제대 후 바로 김장환 목사와 세계 선교여행을 떠났다. 중동,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비롯해 유럽 아프리카, 동남아 지역 등을 다 돌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미국이었다. 
  
“저희들이 하는 일은 목사님이 말씀 전하시기 전에 4~5곡 정도 찬양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당시 지미 카터 미 대통령과 친분이 있으셨는데, 그래서 백악관까지 초청받아 찬양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3개월 정도 세계일주를 했는데, 김 목사님과 동행한 여행을 통해서 넓은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김장환 목사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미스터 최, 앞으로 뭐 할거야?” 
  
“목사님, 저는 고등학교 밖에 못나왔는데, 취직할 데가 마땅치도 않고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방송국에 나와서 일하지.” 
  
그리하여 그는 극동방송에서 첫 직장생활을 했다. 찬송교실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미국 슈퍼마켓에서 도전 

이듬해 김 목사와 함께 2차 선교여행에 나섰다. 미국 선교여행 때는 제넛이라는 할머니 댁에 머물렀다. 한번은 할머니와 슈퍼마켓에 함께 갔다. 한쪽 진열대에 깡통이 수북하게 쌓여있는데, 그 깡통마다 모두 개 사진이 붙어있었다. 어린 시절 개를 사랑했던 그의 발걸음이 떼지지 않았다. ‘이런 개 한 마리 길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의아해서 할머니께 깡통에 대해 물으니 ‘모두 개 사료’라고 가르쳐주었다. 순간 그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제가 어렸을 때 깡통을 뜯으면 그 안에는 항상 맛있는 먹을거리가 가득했었지요. 그런데 개가 깡통 속의 음식을 먹는단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개가 이 정도의 좋은 음식을 먹는다니. ‘만약 내가 미국에 가면 개보다야 더 잘 먹고 잘 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한시도 미국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극동방송에서 일하며 서울침례교회에서 찬양대 활동을 하면서, 지금의 부인을 만나 1981년 7월 결혼했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신앙 안에서 힘든 시간을 이겨내며 살았다. 그러다 문득문득 무대에서 노래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럴 때면 꼭 ‘미국에 가면 개보다야 내가 더 잘 먹고 잘 살겠지’란 생각이 교차됐다. 그는 계속 부인에게 미국 유학 가서 정식으로 노래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말이 미국 유학이지 모든 게 첩첩산중이었다. 김장환 목사와 다닐 때는, 김 목사의 사회적인 배경 덕분에 비자가 잘 나왔지만, 홀로 유학비자를 신청하는 것은 칼로 풀베기였다. 이전에 김 목사와 함께 미국 순회 전도 갔을 때, 미국 와서 공부하라고 권유한 목사에게 초청장을 보내 달라고 편지를 썼다. 
 
▲  시드니중앙장로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한  최화진 교수. 그는 키가 작아 보이지 않는다며 강단 앞으로 나와 간증을 전했다.    ©크리스찬리뷰
  
 
그리고 저녁에 다섯 시간씩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해 기도했다. 사실 15분 기도하면 기도할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기도하는 자세로 앉아있으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비자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순수한 믿음의 표현이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비자가 나왔는데, 얼마나 기뻤던지 대사관에서 출구를 못찾아 엉뚱한 문을 열고 들어간 에피소드도 있었다. 
  
“막상 비자를 받았지만 미국에 간다고 하니 더 큰 걱정이 생겼습니다. 무슨 돈으로 항공요금을 마련하고 미국에서는 어떻게 생활해야 할 것인지, 가장 큰 고민 아닙니까? 당시 서울침례교회를 담임하시던 이동원 목사님과 이 문제를 상의했더니 명쾌한 해답을 주셨어요. ‘화진 형제는 노래를 잘하니 교회에서 콘서트를 열어 후원금을 모금하는 게 어때요?’ 그래서 교회에서 고별 콘서트를 열고 모아진 돈으로 편도 항공권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돈 40불을 들고 아내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미국 유학, 40불로 시작 
 
그때가 1982년 5월, 존 F 케네디 공항에서 워싱턴 공항으로, 다시 버스를 타고 버지니아의, 아직도 당나귀로 농사를 짓는 신석기 시대를 완벽하게 재현한 듯한 시골마을에 내렸다. 만삭의 몸인 부인과 함께. 
  
“이곳이 미국이구나! 내가 그토록 오고 싶어한 곳이구나! 그런데 첩첩산중을 둘러보고 또 둘러봐도 불빛 하나 없었습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꾹 찔러 넣으니 달랑 40달러 지폐가 잡혔습니다. 순간 무릎이 힘을 잃고 툭 꺾였습니다. 바다 위를 걷던 베드로가 갑자기 파도가 밀려오며 풍랑이 일자 두려워하면서 바다에 빠졌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바로 그 모습이로구나. 내가 물 위에 서있구나. 여기가 물위야’ 하는 생각이었지요. 아내가 저의 손을 꽉 잡았습니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눈빛을 보고 알 수 있었지요. ‘당신을 믿어요. 무엇을 두려워하세요? 예수님이 계신데.’ 마음속으로 외치며 다짐했습니다. ‘그래, 예수님은 물에 빠진 베드로를 구해주셨어. 주님만 바라보고 살자’고 말입니다.” 
  
그들 부부를 초청해준 밥 그윈 목사를 만나 잠시 머무를 곳을 안내 받았다. 그윈 목사가 제공해준 방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었다. 어두침침한 방에 불을 켜니 한쪽에 냉장고가 있었는데 며칠 동안 먹을 수 있는 달걀, 빵, 우유가 있었다. 널찍한 침대에 피곤한 몸을 눕히자 스프링이 털썩 내려앉으면서 침대가 반으로 접혔다. 그리고 갑자기 벽난로에 박쥐 한 마리가 떨어졌다. 일 주일은 빵과 우유를 먹으며 버텼다. 그 다음 먹고 사는 게 문제였다. 
  
그렇다고 초청해 준 그윈 목사에게 도움을 청할 처지도 못되었다. 그윈 목사는 백인 목회를 하던 중 흑인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자 백인들이 그것을 못견디며 떠나가고, 이런 갈등 속에 교회를 사임하고 개척 목회를 시작했다. 교인들이래야 가족들뿐이었다. 그나마 국가에서 나오는 연금은 깡그리 필리핀 선교헌금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 눈에 띄는 대로 낚싯대를 들고 호수로 나가 고기를 잡아올렸고 밭에 널린 감자를 캐어 먹고, 계란크기만 한 새알을 주워먹기도 했다. 그렇게 두어 달을 보내던 어느 날, 그윈 목사와 함께 밭일을 할 때 그가 물었다. 
  
“미스터 최, 당신 돈은 얼마나 가져왔습니까?” 
  
순간 식은 땀이 쏟아졌다. 40불 가져왔다고 하면 얼마나 비웃을 것인가? 그래도 정직하게 말했다. 
  
“40불 가지고 왔습니다.”
  
“그랬구나! 내가 당신 냉장고를 열어보고 하도 이상해서 물어보는 것이오. 그렇다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염려는 하나님 앞에서 죄입니다. 우리 기도합시다.”   
  
그러면서 그를 위해서 그윈 목사는 간절히 기도해 주었다. 
  
“하나님! 이 밥 최(Bob Choi , 최 교수의 영어 이름)가 임신 8개월 된 부인과 함께 미국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밥 최는 스스로 자기를 도울 능력이 없고, 저도 밥 최를 도와줄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 이 청년을 하나님께서 도와주옵소서.” 
  
그리고 다시 그윈 목사는 다짐해주었다. 
  
“밥 최, 당신은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세요, 기도하면 됩니다.” 
  
그를 위로해 주고, 안심시켜 주는 그윈 목사의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다.      
  
“어느 7월 뜨거운 여름날 밤 아내의 진통이 시작됐습니다. 밤 열한 시에 병원으로 갔고 아내는 일곱 시간의 진통 끝에 첫 딸 ‘제시카’를 출산했습니다. 의사는 동양인 아이를 처음 보았다며 예쁘다고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어요. ‘매일 감자만 먹어서 얼굴이 새카만 것일까? 아내가 제대로 먹지 못해 아기가 마른 것일까?’ 무엇보다 병원비가 없었습니다. 의사는 풀이 죽어 있는 제게 밥 최 나는 당신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노래 공부를 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면서요. 병원비는 걱정하지 말아요. 돈이 생기는 대로 한 달에 얼마씩 나눠내면 되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하잖아요..” 
 
 
‘찬양 인생’으로 출발 
 
1982년 9월 2년제 전문대학인 사우스웨스트 버지니아 커뮤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음악 교수가 딱 한 사람이었는데, 피아노 뮤직이론 합창 등을 모두 가르쳤다. 어느 날 음악 교수가 그를 불렀다. 
  
“밥 최, 노래 한 번 불러봐요.” 
  
교수의 반주에 맞춰 ‘주기도문’을 불렀다. 노래가 다 끝나고, 교수가 어떤 말을 해줄까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그 교수는 피아노 앞에 가만히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내가 노래를 잘못 불렀나?’ 교수 앞에서 처음 노래를 부르는 것이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잘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판사의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의 심정으로 서있었다. 잠시 후 교수의 반응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최고였어! 너무나 감동적이었어!”라며 박수를 쳐주었고, 이번 주에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와서 찬양을 해달랐고 요청했다. 당시 그의 형편은 열악했다. 부인은 딸을 낳고 제대로 먹지 못해 젖이 나오지 않았다. 겨우 낚시로 건져올린 물고기와 감자와 고구마로 배를 채울 정도였다. 그나마 주일에 교회에서 먹는 한 끼 식사가 부부의 유일한 성찬이었다. 그런 그에게 찬양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솔직히 그때 저는 ‘어떤 찬양을 부를까’보다는 ‘정식으로 초청을 받았으니 식사는 잘 나오겠지?’라는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미국에서 처음 서는 무대였기 때문에 많이 떨렸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양을 불렀고 ‘앙코르’가 터져나왔습니다. 저의 첫 번째 연주회는 대성공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날 저희 부부는 만찬에 초대됐고, 사례비도 받았습니다. 아내는 그날 밤 미국에서 처음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며 흐뭇해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아내는 딸아이에게 젖을 물렸고 아이 역시 엄마의 젖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 최화진 교수     ©크리스찬리뷰
  
 
기적은 계속 이어졌다. 며칠 뒤 다른 두 교회에서 초청을 받았다. “지난주 찬양을 잘 들었다며 우리 교회에도 와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찬양 전문가’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교회뿐 아니라 결혼식, 결혼기념일, 돌잔치 장례식에까지 불려다닐 정도였다. 특히 주지사가 마을에 온 날은 미국 국가를 불렀고, 주지사와 나란히 앉아 식사도 했다. 지역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그런 그를 두고 “다섯 자 정도 되는 사람이 열자 사람의 소리를 낸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어느새 그는 이 조그마한 마을의 ‘스타’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3개월이 지나자 그는 자동차 한 대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그의 찬양을 듣고 평생 농사만 지어온 한 촌로는 투박한 손을 내밀며 “감동적이었다네. 내가 성의 표시를 하고 싶은데...”라며 꽁꽁 싸맨 1불짜리 지폐 2장을 건네주었다. 또 한 장애인 부부는 “당신을 보면서 용기를 얻었다”면서 주머니에서 동전 4개를 꺼내줬다. 하나님은 촌로의 마음까지 움직여 그를 인도하고 계셨다. 그들은 그를 통해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만, 그는 그들의 사랑에 따뜻함을 느꼈다. 
 
기적은 계속 이어지다 
 
그의 삶에 또 다른 격려자는 팻 와야트 할머니였다. 그가 다니던 학교 영어 교수였다. 어느 날, 남편을 잃고 대저택에 홀로 사는 와야트 교수가 함께 살자는 제의를 했다. 그 교수는 교회에서 그의 찬양을 듣고 그런 결심을 하게 됐다고 했다. 당연히 그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밤이면 박쥐가 떨어지는 어두침침한 그 집에서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었다. 와야트 교수는 그들 부부를 자식처럼 돌봐줬다. 교회 집회를 다니며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찾았을 때 그는 틈틈이 낚시를 즐겼다. 
  
어느 날 낚시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데, 흰 벽돌로 예쁘게 지어진 한 조그마한 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교회를 보자 갑자기 기도가 하고 싶어졌다. 강대상 옆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피아노 한 대 놓여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안 쳤는지 건반을 눌러도 사이에 낀 먼지 때문에 건반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들었어요. ‘제 마음이 이렇게 울적한데 하나님은 어떠실까?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구나. 정말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며칠 뒤 시골의 한 교회에서 열리는 ‘홈 커밍 선데이’ 행사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초청한 교회가 바로 울적한 마음으로 나왔던 그 흰벽돌의 예쁜 교회였습니다.” 
  
그날 그곳에서 찬양을 한 그는 미국에서 제2의 인생을 걸을 수 있는 결정적인 안내자를 만난다. 
  
“찬양을 마치고 사람들과 인사를 하는데, 파킨스 병에 걸린 한 할머니께서 백 불짜리 지폐를 든 손을 덜덜 떨면서 제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밥 최는 왜 이런 시골에 살지? 뉴욕에 가면 줄리어드나 맨해튼 음대에서 공부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되면 더 크게 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왜 시골에서 이러고 있지?’ 갑작스런 할머니의 물음에 말문이 막혔어요. 그저 ‘줄리어드는 알아요. 제게는 딸 둘이 있고 그곳에 가려면 돈이 많이 들어요. 제 형편에 가능할까요?’라고 대답했지요.” 
  
도무지 불가능할 것같은 그 할머니의 제의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두 번째 전환점이 되었다. 집에 와서 잠자리에 누웠지만 계속하여 그 할머니가 ‘기도해 봤어?’ 되묻던 것이 생각났고, 그 할머니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며칠 뒤 뉴욕에서 서류봉투 1개가 도착했다. 그 안에는 줄리어드 음대, 맨해튼 음대 등 음악대학 입시요강이 들어있었다. 시골교회에서 줄리어드를 권했던 바로 그 할머니가 뉴욕 롱아일랜드 헌팅턴감리교회 목사 사모였다. 줄리어드 음대의 입시요강은 영어수필과 뮤직 이론, 실기는 영어, 독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로 2곡씩 부르는 것이었다. 한 번도 독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로 된 노래를 불러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그로서는 참 황당했다. 
 
테이프 사사 

‘8곡을 어떻게 노래해? 나를 놀리는 건가?’ 어처구니 없는 일을 보면서 마구 불평이 쏟아졌다. 그러나 뉴욕에서 날아온 줄리어드 음대 입시요강을 본 날부터 마음이 심란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호미를 들고 멜론 밭에 나가 잡초를 잡아뜯으며 ‘도대체 그런 것은 왜 보내서 사람 맘을 뒤흔드는 거야?’라며 불평을 쏟아냈다. 그때 나를 향해 누군가 질문을 던졌다. 물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밥 최! 그동안 노래는 어떻게 배웠어? 네가 돈이 있어서 레슨을 받았니?’ 
  
‘아니오.’ 
  
‘그럼? 네가 악보를 보고 박자 음정 따져가면서 노래를 배웠니?’ 
  
‘그것도 아니지요.’ 
  
그때 그의 마음이 둘로 쪼개져 서로 문답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나는 그저 귀로 들으면서 노래를 배웠지.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훈련시키셨다’는 생각에 미쳤다. 
“그 길로 백화점에 가서 영어, 독어,  이탈리아어로 부른 오페라 아리아 테이프를 샀습니다. 프랑스어로 된 것이 없어 학교 프랑스어 선생님에게 발음을 부탁해 녹음해서 들었습니다. 그렇게 테이프를 2개월 동안 반복해 들으며 실기시험을 준비했습니다. 테이프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발음을 그대로 흉내내어 혼자 연습했습니다. 시험을 보러 가는 날까지도 닳아서 안 들리는 테이프를 귀담아 들으려고 애썼습니다.” 
  
한적한 시골을 벗어나 대도시 뉴욕 줄리어드 음대로 갔다. 대기실에는 4백여 명의 남녀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잘 생기고 젊은 학생들이었다. 특히 바로 앞에 있는 남학생은 헐리우드 영화배우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멋졌다. ‘저렇게 잘생겼다면 노래도 잘하겠지.’ 그가 시험을 보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귀를 문에 대고 들어봤다. 노랫소리가 하도 괴상하게 들려 ‘픽픽’ 소리를 내 웃었다. 잠시 후 시뻘개진 그의 얼굴이 온통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나왔다. 
  
이윽고 그의 차례였다.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중 ‘공주는 잠 못 이루고’와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을 불렀다. 노래가 끝나고 심사위원들을 보니 흐뭇한 표정을 짓는 듯했다. 자신감이 생겼다. 시험을 끝내고 나오는데 바로 앞에서 시험을 본 그 남학생이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갔다. 
  
“너 누구한테 노래 배웠니?” 
  
(웃으면서) “테이프로 듣고 시험보러 왔는데..” 
  
그는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때 머리가 하얀 한 중년 신사가 그를 불렀다. 
  
“네가 밥 최냐? 열심히 해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가 미래의 ‘영원한 스승’ 오렌 브라운이었다. 
  
2차 시험에서는 독일어로 한 곡 부르고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또 불렀다. 그때 한 여 교수가 ‘브라보’라고 하며 손뼉을 쳐주길래 합격이라고 생각했다. 자신감을 갖고 집에 와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2개월이 지나도 줄리어드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떨어졌구나’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어느 날 그가 다니던 커뮤니티 칼리지 학생처 직원이 물어왔다. 
  
“밥 최, 합격했는지 알아봤어요?” 
  
“2개월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는 걸 보니 떨어졌나 봅니다.” 
  
그러자 그 직원은 자기가 한 번 알아보겠다며 학교에 전화했다. 잠시 후 전화를 끊고 말했다. 
“밥 최, 합격했대요. 정말 축하해요.” 
  
꿈만 같은 사실 
 
그러나 합격의 기쁨도 잠시였다. 입학금과 생활비를 합쳐 약 2만 5천 불을 마련해야 줄리어드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가 갖고 있던 돈은 3천 불 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낚시질을 마친 뒤 어깨에 낚싯대를 걸치고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그때 옆으로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가면서 누군가 말을 붙였다. 
  
“밥 최, 뉴욕에 갈 준비는 잘 돼가요?” 
  
그 지역의 유명 정치가 샌드라 워던 여사였다. 그녀는 시무룩한 그의 표정을 보고 차를 한쪽에 세웠다. 
 
“그동안 당신이 만난 사람들의 명단과 주소를 내일까지 내 사무실로 갖다 주세요.” 
  
미국에 오도록 주선해 주었던 밥 그윈 목사의 도움을 받아 400여 명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워던 여사에게 갖다 주었다. 그녀는 그에게 편지 한 통을 보여줬다. 
  
“친애하는 ○○○씨, 테즈웰이라는 한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한국 청년이 줄리어드 음대에 합격해 공부를 하러 떠나려고 합니다. 이는 우리 마을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입학금과 생활비를 마련하지 못해 공부를 포기해야 할 형편에 놓여있습니다. 도와주실 분은 연락해주십시오.” 
  
워던 여사는 그 편지를 복사하여 그가 준 400여 명에게 보냈다. 
  
‘과연 연락이 올까?’ 초조한 마음으로 3일을 보냈다. 진 해럴드라는 은행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한국전 참전 용사들을 위한 콘서트에서 당신의 노래를 듣고 큰 감동을 받은 사람으로 당신의 앞일에 큰 영광이 있기를 바라며,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부자 고객’들을 대상으로 모금을 한 뒤 연락을 드리겠으니 며칠만 기다려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기 시작하셨다. 마음이 평안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자신의 힘으로 이뤄진 것이 하나도 없었고 매순간 하나님이 함께 해주셨으며, 그때마다 기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줄리어드까지 합격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갈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입학금 접수 마감 3일전 해럴드에게서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밥 최, 내가 얼마나 모았을 것 같소? 놀라지 마시오. 1만 7천 불을 모금했소.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시드니 타운홀에서 찬양하는  최화진 교수  ©크리스찬리뷰
  
 
1만 7천 불에 자신이 모은 3천불 그리고 이런 저런 손길들을 통해 도와준 손길들의 후원금을 갖고 뉴욕으로 갈 수 있었다. 세계적인 테너가 되겠다고 도와준 모든 분들에게 약속하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줄리어드 음대에 1984년 입학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최고의 스승 밑에서 공부하는 첫 날이었다. 교수는 레슨을 시작하기 전 갑자기 그에게 이상한 심부름을 시켰다. 
  
“교무처에 가서 수표를 하나 찾아오게나!” 
  
순간 그는 당황했다. ‘뭐야? 대학생에게도 이런 심부름을 시키는 건가?’ 약간 인격적인 모독을 느꼈지만 어느 면전이라고 감히 거부할 것인가? 교무처로 가서 봉투를 받어다 교수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올해 세 번 오디션을 해서 18명이 입학했다. 그 중 실기가 가장 뛰어난 학생에게 장학금 5천 불을 주는 것이다. 그것을 자네가 받게 됐다네. 진심으로 축하하네.” 
  
다시 그 봉투를 그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아니 개인 레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내가 줄리어드 전체 수석에다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꿈만 같은 사실이 현실이었다. 분명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 속에서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전능자의 어깨에 목마를 타다
 
나이 들어 어린 학생들과 공부하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학생들은 그를 ‘삼촌’이나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러나 힘들 때마다 고향같은 캐슬우드와 테즈웰에서 격려해 주는 많은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열심히 공부했다. 줄리어드에 들어가고 첫 번째 오페라 오디션 날이었다. 세계적인 무대에서 오페라 아리아를 열창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동안 연습해왔던 것보다 더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떨어지고 말았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내가 실력이 모자란 것일까? 아니면 동양인이라고 차별받는 것일까?’ 
  
오페라 오디션에서 떨어진 이유는 ‘단신’이었기 때문이라는 도무지 믿기지 않은 이유 때문이었다. 155센티의 키와 체구로 오페라 무대에 서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적어도 남자배우라면 여배우보다는 키가 커야 했지만, 그보다 작은 여자 또한 한 명도 없었다. 실력이 아닌, 단지 키 때문이란 육체적인 요인으로 떨어졌다니 수용하기에는 너무 억울했지만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솔직히 그때는 ‘내가 성악가로서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오페라 무대에도 서지 못하는데 어떻게 대성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가슴이 저렸습니다. 이렇게 저 자신이 못나게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어루만지시는 경험을 했다. ‘화진아, 너는 나를 위해 살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그것을 잊고 있는 것이냐?’ 고등학교 때 하나님께 서원했던 게 또렷이 기억났다. ‘평생 하나님만을 찬양하면서 살겠습니다’라고 약속했었다. ‘그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따로 있어. 최고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자. 성가를 부르자.’ 
  
오페라 무대에 서겠다는 생각을 과감히 접고 교회 솔리스트로 활동했다. 교회에서 찬양하는 그에게 각계의 초청 연주가 쇄도했다. 한 번은 한 CEO가 직원들을 위한 성탄 축하 콘서트에 전용 비행기와 리무진까지 제공해 주며 그를 초청했다.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편안하게 생각하니 하나님은 예비된 길로 ‘척척’ 이끌어 주셨습니다. 일 주일에 서너 차례 초청 연주회를 다니며 신앙의 동역자들을 만났고 덕분에 우리 가족은 생활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오페라 무대에 서는 것보다 오히려 자유롭게 다니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게 훨씬 좋았지요.” 
  
1989년 뉴욕 챔버 오케스트라와 카네기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그때 뉴욕타임스는 “가장 힘있고 아름다운 소리의 소유자”라고까지 호평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또 다른 기회가 왔다. 닥터 코포넨 씨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뉴욕 나약대 음악과장이었다. 채플 한 시간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 시드니타운홀에서 열린 쓰나미 자선 콘서트 마지막 무대는 헨델의 오라트리오 메시아 중에서 ‘할렐루야’ 합창을 연주했다. 오른쪽 앞줄 끝에 키 작은 사람이 최화진 교수이다.    ©크리스찬리뷰
  
 
나약대는 미국 성결교 계통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미션스쿨이었다. 아름다운 학교 정원, 예의 바른 학생들, 무엇보다 예수님의 일꾼을 양성한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한 시간 집회를 맡은 날 강당에 가보니 총장을 비롯해 교수와 학생 3백여 명이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지나온 삶의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가끔 감격에 겨워 눈물이 나기도 했다. 감사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어느덧 그에게 주어진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채플을 마친 학생들은 “감동적이었다”며 사인 요청을 해왔다. 닥터 코포넨이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밥 최, 당신 같은 사람이 우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강의를 맡아주시겠습니까?” 
  
그 날 채플은 일종의 오디션이었다. 그 날을 계기로 1989년 줄리어드 음대를 졸업하고 90년부터 나약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나약대 교수로 있으면서도 그는 외부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1992년 독일 뮌헨 오페라하우스 오디션 합격,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 출연했다. 테너 싱어를 맡아 잠깐 무대에 선 게 그에게는 생애 첫 오페라 데뷔작이었다. 
  
그때 출연료가 무려 4만 달러였다. 96년 뉴욕 오라토리오 소사이어티 경연대회에서 우승했고 시카고 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등 꾸준히 연주 활동을 벌여왔다. 백악관 초청 연주, 카네기홀·링컨센터 연주, 동남아, 유럽, 중동 세계 순회연주, 쿠바 초청 연주 등 많은 무대에 섰다. 북한에도 초청받았으나 정중히 거절했다. 하나님의 목마를 타자 그는 성악가로서 대형 무대에도 서봤고, 명예도 얻었다. 
  
“저에게 딱 맞는 옷은 따로 준비돼 있었습니다. 찬양 무대에 섰을 때가 가장 편안합니다. 미국에 와서 처음 맞은 성탄절 때 고백했던 게 생각납니다. 서더블로프 교회에서 초청 찬양집회를 하기로 한 날 교회에서 내게 트럭을 갖고 오라고 연락이 왔어요. 가보니 300여 상자의 선물꾸러미가 강대상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모두 우리 가족을 위해 준비해 준 성탄선물이었지요. 
  
옥수수캔, 우유, 아기옷, 돈…. 가난하고 어려웠던 초기 미국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수 많은 천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생활을 처음부터 이끌어준 밥 그윈 목사님, 우리를 친자식처럼 돌봐준 팻 와야트 교수, 작년 3월에 돌아가신 저의 영원한 스승 오렌 브라운 선생님, 샌드라 워던 여사, 진 헤럴드씨 등 셀 수 없는 많은 미국 친구들이 제 옆에 있었습니다. 아내와 저는 선물꾸러미를 풀면서 ‘가난한 것도 행복하다’며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때 다시 다짐하였다. ‘제가 받은 은혜를 다 갚을 때까지 하나님을 위한 무대에서 찬양하겠습니다’라고. 
  
오직 전능자의 어깨 위에서 목마를 타고 ‘찬양 인생의 생애’로 세계를 종횡무진하는 최 교수의 몇 마디 멘트가 경구처럼 들린다.   
  
“생각하고 꿈꾸는 것만큼 이뤄집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잡힌 나는 음악적 욕심을 냈고 대가들의 노래를 들으며 꿈을 키웠습니다.” 
  
“큰 꿈을 갖고 하나님께 매달린다면 주님은 기쁘게 응답하십니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제187호, 7/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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