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우디오는 로마의 제4대 황제로 AD 41-54까지 13년간 통치했다. 본명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이다.
한국 성경은 그를 글라우디오 황제라 부른다. 전임황제 가이오(칼리굴라)가 근위병들에게 무참히 살해될 때 현장의 커튼 뒤에 숨어 있다가 졸지에 황제가 되었다. 그는 어릴 때 앓은 병 때문에 다리를 절었고 가는 귀가 먹은 장애자였다. 그를 황제로 세운 이들은 그의 흠잡을 것 없는 혈통과 함께 그의 장애를 눈여겨 보았다고 한다. 온전치 않으니 쉽게 다룰 수 있으리라 여겼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 황제에 대하여 두 가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사도행전 11:28의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성령으로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했는데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는 말씀이다. 실제로 이 흉년은 AD 45-48년에 있었고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했다.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 18:2의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도 전임황제들과 마찬가지로 제국내의 소수민족들에게 일정정도의 자유를 허락하는 포용정책을 폈다. 유대인들은 로마나 알렉산드리아에서 비교적 자유를 누렸고 특히 신앙과 관습의 유지에는 거의 애로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천하를 어지럽히는 염병, 즉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전하는 이들로 인하여 유대인 공동체뿐 아니라 유대인과 로마인, 유대인과 헬라인 간의 갈등과 충돌을 심하게 일으켰던 것이다. 황제는 첫 단계로 충돌을 자제할 것을 권하다 여의치 않으니 집회를 금지하게 되고 그마저 별무효과이니 아주 추방명령을 내리게 된 것이다. 로마의 사가 수에토리우스는 “이 추방령은 크레스투스에 의해 촉발된 유대인들의 계속되는 소란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크레스투스를 크리스투스의 오자(誤字)로 보면 추방령의 원인이 기독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추방령에 의해 로마를 떠난 사람이 약 25,000명이며 그 중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포함되어 있다. 그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나사렛 칙령이다. 나사렛 칙령이란 글라우디오가 유대총독에게 보낸 명령으로 무덤을 훼손하거나 시체를 손상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한 것이다. 총독은 이 칙령을 헬라어로 대리석 판에 새겨 예루살렘, 베들레헴, 나사렛에 비석처럼 세웠다. 그 중 나사렛의 비문이 발견되었으므로 이를 나사렛 칙령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현재 파리의 메달레스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문은 쿠몬트(F. Cumont) 박사가 번역하여 역사잡지에 소개함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이렇다. “선조들을 기리는 장엄한 기념비를 세운 지하무덤과 분묘들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분묘들을 부숴버리거나 그곳에 장사된 시신들을 끌어내거나 혹은 고의로 다른 곳으로 이장하는 일을 한다면 신들에게 죄를 범하는 자와 또 같은 형벌을 가할 것이다. 땅 속에 묻히어 잠자는 자들을 결코 방해해서는 안된다. 무덤을 약탈하는 자들에게 최고의 형벌을 가하는 것이 내 뜻이다”. 무덤이나 시체를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 왜 이런 엄중한 금지가 이스라엘에 내려졌을까? 이렇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라는 신흥종교가 있는데 그 종교를 믿는 자들이 제국 내에서 염병과 같은 폐해와 소란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는다. 역사와 종교에 대한 관심이 컸던 황제는 더 자세한 내용을 살피다 <예수>라는 사람의 존재와 가르침,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듣게 된다. 부활이란 것이 실제는 시체를 훔쳐간 제자들이 퍼뜨린 헛소문이라는 불신자(?)의 설명을 듣고 기독교는 시체를 도적질한 사람들이 만든 종교로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괘씸한 마음으로 나사렛 칙령을 반포한다.제국의 안전과 질서를 위한 그의 칙령이 세월이 흐른 뒤 주님의 부활을 간접적으로 증거하는 <돌들이 외치는 소리>가 될 줄은 그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 최성은|시드니선민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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