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만들기

정기옥/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12/26 [11:25]
아름다운 사연, 아름다운 사람? 

 
글을 쓰기로 했다. ‘크리스찬리뷰’ 편집부는 교민사회의 아름다운 사연들을 주제로 밝고 긍정적인 모습과 소망을 전했으면 한다고 주문해 왔다. 아름답지 못한 모습이 적지 않은, 어찌 보면 간혹 추하기도 하고 얽히고설키어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민사회지만 그런 세상 가운데에도 아름다운 사연과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취지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로 이거다!’라고 깊은 공감을 하면서 기쁘게 ‘그러겠다’고 대답을 했다. 게다가 부족하나마 과거 여러 잡지와 신문에 글을 연재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 참으로 좋은 편집방향이다 싶어 자신있게 대답한 것이었다. 아니, 그런 내용을 요구하는 편집 방향이 고맙기까지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막상 컴퓨터 앞에 앉아 아름다운 세상 이야기를 쓰려고 자판에 손을 얹는 순간 갑자기 막막해졌다. 더군다나 한국이나 세계 어느 다른 곳의 사람들과 사연이 아닌 호주 교민사회를 생각해보니 더욱 막연해졌다. 어디 무슨 아름다운 사연이 없나? 읽고 모두가 박수치며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사건이나 에피소드가 무엇이 있나?

그래도 몇몇 사람들은 마음이 하나 되어 그 사람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은 누구인가? 독자들은 무슨 사연이 생각나고 어떤 인물이 떠올릴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게는 금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연도 사람도 없었다. 놀라웠다.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다. 좀 멋있게 표현하자면 적어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일조하기 위해 목사가 되었는데 막상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에서 한 가지 아름다움조차 금방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사건이나 사람도 생각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정말 우리 교민사회에는 그런 아름다운 사건이나 사람들이 없는 것일까? 고민에 가까운 묵상을 하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성의 기도까지 나왔다. 아름다운 사연, 아름다운 사람들은 어디 있을까?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사실 아름다움이란 정의하는 사람마다 다른 의미를 부여할 것이고 개인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런 의견들마다 일견 일리도 있고 아름다움의 의미를 나름 잘 함축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의 절대적 의미를 담거나 완전한 기준은 아닐 것이다. 부분적인 정의요, 주관적 견해일 것이다.

아마 내가 나름 정의를 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지성 중 한 사람인 데버라 로우더 같은 사람은 아름다움은 편견이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새롭게 아름다움의 진정한 의미를 정리해 보는 것은 아름다움 세상을 소망하고 추구하는 우리 모두에게 새해를 맞이하면서 작은 방향 제시는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외적 모습이나 매력, 또는 외형적 치장이나 장식이기보다는 내적가치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외모지상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내적 아름다움을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이런 외모지상주의의 융단폭격에 그 기준을 잃고 휘청거리는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러다보니 이런 외모지상주의의 폐단은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으로 사회의 구석구석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외적 아름다움의 왜곡된 이상 때문에 내적 아름다움의 추구는 미적경쟁의 패배자의 어리석은 외침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상상을 초월하는 경제적 자원낭비와 사기성상술이 판을 친다. 결과적으로 건강을 위협하고 공개적인 차별이 자행되고 많은 사람들의 삶이 자신감을 상실한 채 피폐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쇼핑을 하듯 외모를 사고파는 성형과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과도 바꿀 수 있다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편 허탈감마저 든다. 잘생기면 항상 승리한다는 아름다움이 권력이라는 사고는 사회를 더욱 경박한 외모 지상주의로 만든다. 이런 외적 아름다움의 허상에 빠진 우리의 자녀들은 외모자상주의의 노예가 되어 진정한 아름다움을 가꾸고 추구하는 데 사용해야 하는 귀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추상적 언어유희이기보다는 삶 속에 드러나는 삶의 향기가 아닌가 한다. 가슴과 영혼의 현을 울리고 누군가의 삶에 작은 미풍을 불게 하는 그런 의도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영향력이 아닐까! 단순히 눈을 즐겁게 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마음에 느껴지고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잔잔한 파장과 잊지 못할 메아리가 있는 삶의 여운이 아닐까?

이런 삶이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일상 가운데 저절로 살아질 정도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사람이 많은 사회가 가장 아름다운 사회가 아닐까! 이런 사람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닐까!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가장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세상을 지어가는 주인공들이 아닐까!

 
아름다운 교민사회를 꿈꾸며

이런 아름다운 교민사회를 꿈꾸는 것을 누가 탓하겠는가? 필자도 독자도 다 그리워하는 그 공동체가 바로 이런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여 간단한 제안을 하나 하면 어떨까 싶다. 인간은 관계의 존재이다. 관계는 곧 조화이다. 세상 모든 것이 관계와 조화가 그 아름다움의 모습을 결정한다. 인간의 조형물과 하나님의 창조물의 엄청난 차이도 둘 사이의 관계와 조화를 어떻게 배치하고 배열했느냐에 따라 아름다움이 빛을 발한다.

오케스트라가 가장 아름답게 들릴 때에도 각양의 다양한 악기의 다름과 개성들이 관계와 조화로 승화될 때이다. 우리 사람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이 관계와 조화를 위해 내 삶의 어느 곳엔가 타인을 위해 빈 공간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 공간에는 나의 어느 부분도 숨겨 놓으면 안 된다.

그냥 상대방이 그 모습 그대로 들어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온전히 비워주고 받아주는 여유로운 관계의 품을 가져 보면 어떨까?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안목과 이해가 필요하다. 인간은 모두 부족한 죄인이고 고독하고 삶의 아픔에 고통소리를 지르는 존재임을 감안하면 상대를 비판하고 정죄하기보다는 끌어안고 품어 주게 될 것 같다.

마치 담쟁이를 담담하게 받아주는 말없는 담처럼, 자신의 아름다운 빛을 가리고 지나가는 구름을 슬쩍 흘려보내는 공중의 달처럼 그렇게 자신을 내주다 보면 아름답고 조화로운 관계가 은은한 향기를 발하는 아름다운 교민 사회가 되지 않을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겸손하게 찾아오셔서 보잘 것 없는 우리와 관계를 맺기 위해 자기를 비우고 조화로운 삶을 사셨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받아 주며 사랑과 관용으로 관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

 

정기옥/안디옥장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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