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반 위에서 날렵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끝은 ‘신이 내린 손’이었다. 그 손끝에서 예술이 재창조되고 있었다. 마치 피겨여왕 김연아에게 얼음 위의 발끝이 그러하듯. 얼음과 건반, 그리고 손끝과 발끝의 차이로 새로운 예술이 창조되는 차이랄까? 이 달에 초대한 피아니스트 김소영 씨는 손끝으로 소리의 신비를 창조한다. 만질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소리를 ‘때려서’ 잡았다가 늘였다가 높였다가 놓아주면서 관객의 귓속을 뚫고 관자놀이 지나 심장까지 전해준다. 그 소리가 온 몸의 혈관을 달구기도 한다.
그 손끝으로 구워온 케익을 먹으며 부부가 듀엣으로 연주하는 ‘백조’를 들었다. 문득 음악인의 삶이 ‘백조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대에서 보여주는 아름다운 연주와 우아한 모습이 수면 위를 노니는 백조를 닮은 때문이다. 또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탈락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물갈퀴를 젓는, 숨은 노력도 닮았다. 아니 어쩌면 등산의 삶과도 같다. 한 정상을 정복하고 하산하면 다른 정상을 정복할 준비로 분주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그가 정복한 산들도 무수하지만, 그때마다 손끝의 지문이 닳도록, 손끝이 돌덩이처럼 거칠고 단단해지도록 건반 위를 문지르며 손끝을 혹사시키며 숱한 눈물을 훔쳐야 했다. 부부의 연습실에는 호주-네덜란드 수교 400기념식에서 네덜란드 여왕과 호주 총독 앞에서 연주하는 장면이 한쪽에 수줍은 듯이 자리 잡고 있다. 여러 오페라 단원들과의 찍은 사진, 그리고 네덜란드를 떠나올 때 단원들이 선물로 주었다는 단원들의 사인이 든 보면대도 눈에 뜨였다. 7년 반 정도 남편의 나라 네덜란드 등 유럽에서 활동하다 호주로 귀국한 그와 그의 남편 테이여 힐케마(Teije Hylkema, 첼리스트)는 새로운 생활 출발선 앞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었다.
“남편이 라디오 카마 챔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로 일하고, 시리즈로 하고, 활동하다 애들이 있으니 조금 활동하기 어려웠습니다. 아이들에게 공기도 맑고 나라도 넓고 라이프 스타일이 네덜란드보다 모험이라고 생각하면서 언제 기회가 있으면 살 수도 있겠다고 남편도 항상 호주 이민을 열어두고 있었습니다. 마침 네덜란드 정부에서 문화 예산을 삭감하고 감원하기 시작했어요.
정부에서 지원하는데 사회복지 시스템처럼 정부에서 후원하는데 오케스트라도 예산을 삭감했어요, 해마다 반복해왔는데 이번에는 너무 지나치게 삭감하여 세계 음악인들이 데모할 정도였습니다. 문화의 나라, 렘브란트의 나라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항의했습니다. 그래도 정부는 문화 예산보다는 복지 예산이 우선이라 우리도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이때 마침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남편 티이여 씨를 게스트 솔로 첼로 리더로 초청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어쩌면 기다린 기회가 지금인가? 프랑스, 이태리 등 유럽에서는 미련없이 활동했으니 이제는 호주로 가야될 시점이 된 것 같았습니다. 엄마 아빠도 여기 계시니 말입니다. 특히 애들도 여기 호주라는 좋은 나라에서 자라고, 제가 자랐던 것처럼 맨발로 뛰어다닐 수 있지 않아요? 네덜란드는 춥거든요.” 음악은 순간의 예술 이렇게 결단을 내리고 지난 4월 호주로 이들은 도착했다. 남편이 호주의 여러 오케스트라에서 많이 초청받아 활동이 시작됐다. “이삿짐이 6월 말에 와서 아직도 정리하는 중입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음악과 쉴새없이 동행하며, 삶 자체가 음악이라고 할 그의 예술론을 다시 들어보자. “음악은 순간의 예술입니다. 그 순간이 잠깐이지요. 집은 지어놓으면 계속 즐길 수 있지만, 음악은 연주만 끝나면 끝이지요. 퍼포밍 파트는 콘서트가 중요합니다. 그 한 순간이기 때문이지요. 역사적인 이야기도 그곳에 있었던 것과 뉴스에서 보는 것과 다르듯이, 음악도, 연주할 때 느낄 수 있습니다. ‘관객과 나와 같이 있나 없나’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저의 비전, 저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데 소화시켜서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니까 잘 연습하고, 최선을 다해서 발표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와 관객의 일치된 기분을 맞았을 때 말로 표현하지 못하지만 그걸 다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완전은 없지만 완성도를 높여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기대안할 때 생기기도 합니다. 중요한 콘서트라고, 많이 연습했다고도 생기는 것도 아니고요. 작은 뮤직클럽에서 친구랑 듀엣을 했는데도 아주 재미있는 곡들을 많이 하면서 웃다 보니 청중들도 웃고 즐기면서 그런 걸 느낍니다. 여왕이나 총독 앞에서 하는 큰 이벤트가라서가 아니라 기대하지 않은 작은 곳에서도 사람들과 마음과 호흡이 맞았을 때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특히 네덜란드 있었을 때, 그때 참 좋았다고 기억에 남은 연주는 노트르담 두런 홀에서 연주했을 때, 대만족이었다고 하였다. 네덜란드에서는 특별히 출중한 음악인들과 함께 연주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분출하는 에너지가 달랐다고 했다. 그리고 호주 ABC 방송에서 새천년 특집 오케스트라 솔로로 콘서트 할 때와 벨기에에서 오케스트라 솔로로 연주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고 하였다. 프로의 세계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가 정상을 달리기까지 성실함, 절실함과 그에 따른 지독함이 없었다면 감히 이루지 못할 일이 많았다. 그에 따르면 연습량은 곡마다 다르고, 콘서트마다 다르다고 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결코 작은 노력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쉽게 이룰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상의 고수’는 자기만의 비법이 있기 마련이다. “콘서트가 솔로 리사이틀은 혼자서 치는 게 90분입니다. 혼자서 오랫동안 음악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집중력입니다. 가령 학생들도 집중력이 2시간인 아이는 2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지, 4시간 앉았다고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다행히 그 점에 장점이 있습니다. 특히 애들 때문에 짧은 시간에 그 시간을 잘 쓰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짧은 시간에 그 시간을 잘 쓰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몰입에 가까운 집중을 합니다. 그것 때문에 강점이지만 약점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늦게 연락이 와도 빨리하기 때문에 남보다 단축됩니다. 남이 6개월 할 것을 3개월에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다음 주에 하려고 하려는데 할 수 있느냐?’하며 일 주일 앞두고도 연락이 오면 한다고 하고 그에 맞춰서 해야 합니다. 그게 프로페셔널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훈련받아 왔습니다. 학생 때는 제일 좋은 프로페셔널은 어느 상황에서도 소화해 내는 것입니다. 어느 상황에서! 그러나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요. 제 사정과 상황이 어떠했느냐, 연습을 했느냐, 못했느냐, 할 수 있는 상황이었느냐, 없었느냐 이런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들이 원하는 수준 이상으로 연주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프로의 세계이다. 프로는 상황을 변명하지 않고, 오직 결과만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마치 올림픽 메달의 색깔은 다 다르지만 땀의 색깔은 동일하듯, 그날이 오기까지 땀을 소나기처럼 흘리며 정상에 오른 프로의 세계에서만 통하는 불문율이 바로 관객의 ‘결과 대만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은 인간의 한 부분 프로의 세계에서 더 높은 정상을 향하여 날마다 달음질하는 그는 전형적인 1.5세이다. “77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이민 오기 전 5살 때 한국에서 피아노를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을 따라 86년 9살 때 호주로 이민왔습니다. 한국의 제 또래가 대부분 그렇듯이 '엄마 세대들‘은 피아노를 하고 싶었는데 그런 기회가 없었던 반면 저희 세대는 엄마들의 욕심과 열정으로 시작하게 되잖아요? 그때는 멋모르고 했습니다. 항상 피아노를 싫어한 것 없었고, 특별히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하다보니 달란트가 있었는지 대회에서 많이 수상했어요. 이곳에 이민와서도 많이 했어요. 시드니에서 처음 피아노는 이경희 학장(시드니 국제음대)에게서 배웠고, 그분이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이 선생님 이후에도 때에 맞게 상황에 맞게 좋은 선생님들이 딱딱 연결돼 그 선생님들이 때맞춰 도와주셨습니다.” 명문 시드니 걸스 하이스쿨로 진학했지만 11학년 한 달하고 음악학교로 진학했다. 그리고 음악과 더불어 평생을 살아가기로 결정했다. “16살 때쯤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저한테 ‘음악이 왜 중요한가?’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 음악은 사람들과 관계이다. 즉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느끼는 것을 전달해줘서 그 사람이 잠깐이라도 제가 음악으로써 볼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커뮤니케이터로서의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음악은 있으면 몰라도 없으면 사람들이 느낄 거예요. 얼마나 중요한지 말입니다. 지금은 음악이 많이 있으니 잘 체감하지 못합니다만, 사실 사람은 심장부터 탁탁 뛰는 리듬이 있으니 음악을 몸 속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과 음악과 문화는 분리될 수 없고 항상 함께 있는 것입니다. 특별한 게 아니라 인간의 한 부분입니다. 그만큼 중요하니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해서 제일 좋은 것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나누는 것이 제 삶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그는 음악도의 길로 들어서 시드니 콘서버토리움에서 폴 리카드 포드 박사로부터 배우며 대학과정을 마쳤다. 이후 멜본대에서 스티브 맥킨타이어 교수 지도로 음악석사학위를 받았다. 계속하여 로트르담 콘서버토리움에서 대학원 과정을 공부했다. 이밖에 그는 암스텔담에서 얀 바인, 런던에서 프랭크 위바우트 등 세계적인 거장들로부터 사사했다. 그에게 음악이 일취월장 성장하는 기회는 2000년에 오스트렐리안 내셔널 아카데미 오브 뮤직(Australian National Academy of Music)에 합류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올림픽 선수 훈련소처럼, 정부에서 장학금을 지급하며 세계 음악계의 정상들을 모셔와 호주의 미래 음악인들을 집중적으로 훈련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그는 3년째 펠로우로 합류했다. “1998년도에 시작했는데, 학생이 아닌 펠로우로는 제가 처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학생인데, 그들과 차이라면 저는 레슨도 받지만 선생님들과 같이 연주도 하고 그랬습니다.” 피아노 전공했지만 성악을 부전공으로 했다. 처음엔 성악 클래식 반주를 계속하니 레슨을 계속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성악이 자연히 스며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자연적으로, 또 간접적으로 하는 것과 직접 하는 것은 다릅니다. 보컬 코칭을 많이 하면서 성악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제가 코칭하려면 어느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몇 년 동안 성악을 했습니다. 선생님이 대회도 나가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만 했고, 피아노만 했습니다. 피아노가 굉장히 좋아요. 만족감을 느끼고요.” 콘서트는 95년부터 많이 했는데, 오케스트라에서 솔로 콘서트도 많이 하면서 그의 음악성은 쑥쑥 성장했다. 삶의 아름다움, 음악의 아름다움 2004년은 그에게 특별한 해이다. 평생 음악동지가 될 남편 테이여 씨를 만난 것이다. “남편이 첼리스트로 4중주 그룹이랑 같이 멜본에 왔을 때 만났습니다. 만나서 친구로 사귀다가 제가 네덜란드에서 공부할 때 사귀고 결혼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남편이랑 듀엣으로 3중주로도 연주를 많이 했습니다.” 그녀가 만난 남편 테이여 씨는 암스텔담에서 음악을 사랑하고 또 높게 평가하는 상류층 가정이었다. 시아버지는 인터니스트 의사 전문의, 서양역사를 공부한 시어머니는 플릇을, 큰 시누이는 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전속(바이얼린)이고, 작은 시누이는 의사이면서 바이얼린 콘 졸업할 정도로 음악을 사랑하는 가족이었다. 그리고 그의 남편은 첼리스트이며, 법대를 졸업한 시동생은 변호사로서 판사 공부 중이라고 했다. “음악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항상 집안에는 음악이 많고, 음악적인 분위기이고, 음악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게 편합니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도, 음악으로 마음이 많이 통해요. 닥터보다 음악하는 사람을 올려주기 때문에 저한테 한없이 편안합니다. 저의 콘서트를 많이 지원하고 가족들도 제가 뭘 하는지를 볼 수 있고, 항상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요. 일만이 아닌 같이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이제 호주에 와서 우리가 같이 나누지 못하는 게 아쉽고 힘듭니다.” 무엇보다 네덜란드를 떠나오는 게 힘들었다고 하였다. 호주의 위치조차 모르는 시댁 식구들은 그들 가족을 땅끝으로 보내는 심정과 같았을 것이라고 했다.
“저희도 어려웠지만 시댁 식구들도 어려워했습니다. 우리 친정 가족은 떠나는 게 어렵지만 익숙한 면도 있잖아요? 유럽은 여행을 많이 하지만, 다 가깝기 때문에 유럽공동체라고 하잖아요? 호주가 어딘지 모르고 세상 끝으로 간다고 생각하며 너무너무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호주에 한 번도 와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어려워하고 계세요.” 결혼할 때 양가에서 반대가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1.5세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간단히 피력했다. “저는 맏이지만 어려서부터 음악을 했기 때문에 음악을 엄마 아빠가 많이 이해하고 기회를 주시고, 저를 많이 믿어주셨습니다. 아빠와 남편도 한두 번 잠깐 만나 보시고 허락하셨으니까요. 그래도 내심 쇼크였을 거예요. 엄마 아빠는 한국 분인데 음악을 통해서 제가 서양사회로 들어가는게 이해하시기 어려웠을 거에요. 이해 안될 때 답답하기도, 섭섭하기도 하셨을 거고 말입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 속에서는 제가 호주사람이라고 생각돼요. 어떨 땐 동양 사람이라는 사실을 까먹습니다. 제가 동양인이라고 느낀 것은 동양에 있을 때, 중국에 갔을 때였습니다. 유럽에서 처음엔 어색했지만, 영어를 2년 쓰다가 그 다음엔 네덜란드 말 쓰다가 7년 반 동안 있었습니다.” 음악을 하면 은혜받는 기분 그러면서 가정에 대한 애틋함, 음악에 대한 절절함 간간이 묻어났다. “음악이 싫은 것은 아니었는데 때로는 연습하기가 싫은 적이 많았습니다. 날마다 엄마랑 싸운 기억도 있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연습을 못합니다. 즐기면서 하는 연습! 요즘에는 그런 연습을 많이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시간이 없으니까요. 아마 철도 들고 생각하는 게 세상을 보는 게 달라질 때 사춘기인 16살 때 음악으로 살아가겠다고 한 것, 참 잘했다고 생각해요, 음악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게 섬세한 말로 표현하지 못하지만, 종교적으로 말하면 ‘은혜 받는 기분’이랄까요 그런 걸 느껴요.”
그리고 그는 고급음악의 대중화를 소망했다. “음악이 교회랑 비슷한 것 같아요. 클래식 콘서트를 가려면 예의도 잘 갖춰야 되듯이 교회도 가면 일어나야 하고 그러면 꺼리고 불편해서 안오는 사람 많듯이 말입니다. 우리 세대에서는 사람들과 꺼려하지 않고 함께 즐기려고 노력하는 콘서트였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피아노가 TV처럼 보편화되었지만, 피아니스트는 오케스트라 전속 단원은 못된다고 한다. “피아노 없는 음악이 있기도 합니다. 피아니스트가 멤버로는 20세기부터 오케스트라로 들어갔고, 피아노가 음악기구로 들어갔습니다. 피아니스트는 다른 악기 연주자와 다르고 더 필요한 게 자기 일을 항상 자기가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가 ‘자기 매니저’를 해야 합니다. 혼자하기 때문에 성격이 다릅니다.”
그래도 그의 일정은 바쁘기만 하다. 4월에 와서 가르치고, 시드니에서 제일 큰 컴퍼티션인 시드니 에스테드포드(Eisteddfod) 심사를 비롯하여, 9월 초 시드니 심포니, 10월에는 멜본에서 8년 동안 해오던 석사과정 학생들과 교사들을 가르치고 워크숍하고 콘서트하는 일정이 잡혀있다. 10월에 캔버라 가서 대사관에서도 연주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그의 아름다운 손끝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이 이제부터 유럽을 지나 남반구를 적실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귀가 즐거워진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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