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가운데 사는 아름다운 삶

정기옥/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11/01 [12:06]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문자적이거나 상징적인 빛의 이미지들로 가득 차있다. 성경 기록의 첫 번째 이야기는 빛의 창조로 시작이 되고 장차 될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하나님의 빛은 어두움의 흔적을 다 없애신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횃불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추심이라.”(계 22:5)

빛의 출생이 우주 만물의 기원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면 빛의 소멸은 창조의 마지막에 대한 묵시적 예언을 상상이 가능하게 한다. 이 두 기사 사이에 빛의 이미지는 성경의 주제를 설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영적으로 영토를 점령하기 위한 싸움으로 간주되는 빛과 어두움은 현실을 양분하는 실제적인 세력이다. 빛과 어두움의 갈등을 배경으로 놓고 볼 때 빛은 마치 하인이 임금 앞에 서있는 것과 같은 두려운 권세와 함께 통치의 속성을 갖는다. 빛으로 인해 무 존재로부터 존재의 신비가 생성된다. 그리고 그 빛의 존재로 인해 나머지 모든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성경은 그 빛 가운데 사는 아름다운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째, 빛이 비추일 때 혼돈과 무질서는 물러가는 것이다. 며칠 전 친구 목사로부터 빛이 없었던 혼돈과 무질서의 삶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전기가설회사와 요금징수 회사의 실수로 그 친구의 가정에 6일간 전기가 끊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빛이 없는 세계의 불편함이란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혼돈이었다는 것이다. 첫 날 양초를 켜서 거실과 방마다 가져다 둘 때는 그래도 낭만적인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둘째 날이 되자 그 불편함과 혼돈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냉장고의 음식은 상하기 시작했고 음식은 조리할 수 없어 정상적 가정생활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설교를 준비할 수 없어 어려움을 겪고 아이들이 공부를 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온 가족의 삶이 불편과 어려움 가운데 빠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주 오래 전 자기 마을에 처음 전기가 들어 와서 첫 번째 전등불이 마을을 비추었을 때 함성을 지르며 신기해했던 때를 생각했다고 한다. 전기라는 빛으로 인해 그 마을사람들의 삶이 빛과 어두움으로 확연하게 구별하게 된 것이다.

어두움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고 그 삶에 혼돈과 무질서를 준다. 하지만 빛이 임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은 역전되는 것이다. 아름답게 되고 경쾌하고 밝게 되는 것이다. 웅장한 교회의 벽 유리를 장식하고 있는 스탠드 글라스를 상상해 보라. 빛이 비추이지 않는 그 음산하고 혼돈스러운 모습, 때로는 오히려 두려움을 자아내는 괴기스러운 모습. 그러나 빛으로 인해 아침이 열리고 스탠드 글라스가 빛을 받을 때의 오색찬란하고 아름다운 모습도 기억해보라.

우리 인생이 그와 같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에 인생은 혼돈과 무질서에서 아름다운 삶으로 변화된 것이다. “나는 세상의 빛으로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 (요 12:46)

둘째, 길을 찾아 방황하지 않게 된다. 나아가는 목표가 분명해지고 현재 겪고 있는 과정이 왜 필요한지를 의미있게 해석할 수 있다. 길을 알고 걷고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삶은 아름답다.

예전에 몽골 단기선교 중 동고비 사막에 있는 한 마을에 아주 캄캄한 밤중에 도착한 적이 있었다. 예전에도 와본 적이 있는 마을이었다. 그래도 그 마을은 동고비 주에서는 인구가 2천 명이나 되는 에르등이라는 꽤 큰 마을이었다. 수도인 울란바타르를 떠난 지 12시간 만에 도착한 때는 이미 밤 열두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역전의 희미한 불빛을 벗어나자 온 세상은 어둡다 못해 그저 까맣다는 말로 밖에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마을인지 도대체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반딧불만한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두움만 온 천지를 감싸고 있었다. 옆에 엄연히 함께 걷고 있는 현지 선교사님과 몽골 성도들의 모습조차 식별이 불가능한 정도였다.

그런데 우리는 이 어두운 밤에 어느 한 집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손전등 하나와 아홉 명의 멤버들. 그리고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우리가 가야 하는 곳으로 지정받은 전혀 보이지 않는 집 근처에 희미한 불빛 하나. 그것을 향해 아스라히 먼 길을 암흑 속에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았지만 그 빛을 향하여 나아감으로 방황하지도, 길을 잃지도 않고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항해할 때 별을 보고 항해를 했다. 별은 빛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별을 보고 항해하는 것은 그 별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별을 보고 항로를 잡기 위해서이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인생의 항해를 할 때에도 빛이신 예수님만 보고 가면 된다. 내 느낌이나 감정이나 경험이 아니다. 별은 고정되어 있고 변함이 없다. 예수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인생의 빛이다.

예수를 따라가는 인생은 결코 인생을 방황하지 않는다.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 반듯이 목적지에 도착하고 승리의 찬가를 부를 수 있다. 희미하고 작은 빛을 따라가도 목적지에 잘 도착할 수 있거늘 하물며 영원하고 완전하신 빛이신 예수님을 보고 걸어가는 길이 얼마나 안전하고 정확한 인도를 받겠는가? 당신은 무엇을 바라보고 걸어가는가?

셋째, 빛 가운데 사는 삶은 하나님의 은총과 은총이 가져오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우리의 현대 문명은 빛의 문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컴퓨터나, 텔레비전, DVD플레이어 등은 알고 보면 모두가 빛을 이용하는 것이다. 전자기기들은 레이저에서 방출되는 광선을 이용하여 우주통신, 정밀공작 등에 널리 응용되고 있다.

병원에서 의사들이 현대 최신 기계(엑스레이)를 가지고 사람의 내부를 들어다 본다. 이것은 다 빛의 작용이다. 빛이 주는 은총들이고 유익들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빛의 문명이 이토록 인간을 행복하고 즐겁게 해 준다면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통한 은혜와 은총은 어떻겠는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2)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허락하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끔씩 우리 인생을 어두움 속에 가두시기도 한다.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게 하기도 하시고 슬픔의 강을 건네게도 하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어두움 속에서 예수님만이 참된 빛인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 빛을 놓치고 있는 인생들이 다시 그 빛 되신 예수님만을 바라보도록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빛의 신비 앞에는 모든 것이 새롭게 태어난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고유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빛을 발한다. 빛 가운데 꽃들의 웃음판이 펼쳐지고 초록 잎들의 춤의 향연이 벌어진다. 빛 가운데 사는 인생이 그렇게 아름답다.

예수라는 빛 안에 사는 인생은 죄의 그늘에 앉아 우울해 하지 않는다. 사망의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삶의 잠시 고난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오히려 빛이신 주님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린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 삶을 아름답게 하시는 빛이시기 때문이다.


정기옥|안디옥장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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