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좁은 작은 거인(상)

국제사회복지사 김해영 선교사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입력 : 2013/09/30 [11:35]
134, 살아있는 전설
 
그는 작은 거인, 큰 거장,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일찍이 도종환 시인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으랴”고 노래했지만, 그를 대하니, “짓밟히지 않고 맺는 열매가 있으랴”로 바꿔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장애인이란 편견없이 자신을 친구로 받아들인 아프리카 사람들의 순수함에 감동하여 14년 동안 보츠와나에서 장애인을 위한 직업학교에서 헌신했던 김해영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그는 출생 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친척들이 미역을 사가지고 오자, 딸이란 이유로 할아버지는 “딸인데 쓸데없이 돈을 쓴다”고 모두 혼을 낼 정도였다. 그때 아버지가 술을 먹고, 홧김에 갓난아이인 그를 집어던져 꼽추가 되어버렸다.
 
어머니는 늘 입버릇처럼 “쓸데없이 태어난 가시나”라고 말했으며, 키는 자라지 않아 134㎝에서 멈추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긋지긋한 가난의 굴레는 학교 준비물은 아예 마련하지 못했고, 육성회비를 내는 날은 학교에 갈 수 없는 날이었다.
 
일반 여성의 신장에 한참 모자란 ‘134’는 그렇게 주홍글씨보다 더 진하게 그의 온몸에 조각되었다. 그러나 134로도 훨씬 키 큰 사람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꿋꿋이 살아온 그는 분명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초등학교 출신의 장애인에게 요즘은 이름조차도 생소한 ‘월급 3만 원의 식모’가 그의 첫 직업이었다. 단 몇 줄로 요약된 이 질곡의 세월을 헤쳐오는 동안 장애로 볼품없는 외모 때문에 어디를 가도 멸시와 천대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거의 예외 없이 들었던 단어가 바로 ‘얘’‘쟤’‘걔’‘재수 없어’‘기분 나빠’ 등의 말이었다. 이런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뱉어대는 편견이 가득한 한국사회에서 겪었던 모멸감은 성장과정의 정체성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지난 세월의 경험을 담담히 고백했다.
 
“한국 사회는 신체적으로 불리하면 다 불리하더군요”라며 관조하듯이, 잔잔히 들려주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 두레교회에서 간증하는 김해영 선교사(31/8 2013)     © 크리스찬리뷰
 
경북 상주 산골에서 살다 1970년 초 서울로 온 우리 가족은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가난보다 힘든 것은 부모의 부부싸움이었다. 알콜 중독의 아버지, 우울증을 앓는 어머니의 싸움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그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가 외출하면, 어머니는 그에게 화풀이로 무서운 욕설과 매질이 시작되었다. 이유없이 그를 때리면서 온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도 시커멓게 멍투성이가 되어갔다. 어머니의 매를 피해 집을 나와 동네를 빙빙 돌며, 무수히 자문자답했다.
 
‘키가 작고 등이 좀 굽은 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장애를 가진 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인가?’ 어린 그의 마음에는 억울한 질문들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족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해 오는 듯했다.
 
“얘, 키가 작고 몸이 불편한 것은 네 잘못이야, 더 생각할 것도 없어!”
 
부모와 트라우마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한 달 만에 알콜중독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부인과 5남매와 단돈 7만2천 원만 남겨두고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스스로 건너가 버렸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3월 중순, 빗줄기가 내리치는 가운데 장례식이 끝나고, 백부가 장례 제사상의 음식을 건넸다.
 
“해영아, 이리 와서 너거 아부지가 마지막으로 주는 거 같이 묵자.”
 
아버지의 별세로 그의 죄목(?)은 하나 더 추가됐다.
 
“이 년의 가시나, 아주 나가 죽어라. 니가 너거 아부지 잡아 묵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6개월 여 지난 어느 날, 칼을 들고 죽이겠다고 달려오는 어머니를 피해 집을 나왔다.
 
“그때는 엄마 얼굴을 보지 않아야 제가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만 14세. 초등학교 졸업의 집 나온 장애인 여자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힘들게 찾은 것이 월급 3만원 식모! 그의 인생에서 얻은 첫 직업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조건으로 시작했다. ‘부잣집 마나님’의 육아와 가사를 돕는, 소위 ‘입주 가사도우미’이다. 조그만 체구의 장애인인 그에겐 모든 것이 버거웠다. 무엇보다 희망이 없다는 게 괴로웠다. 특히 중학교에 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는 가슴을 도려내듯 아파왔다.
 
어느 날, 주인집에서 쓰레기처럼 버린 반상회보 광고에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무료 직업훈련생 모집, 양재, 편물, 자수, 미용. 6개월 과정….”
 
당시 한남동 서울중부기술교육원은 영세한 서울시민들에게 무료 기술교육을 실시했다. 조심스레 자신의 처지를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교육원에 보냈다.
 
“이 편지 한 장으로 6개월의 짧은 과정이었지만 그곳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기계편물 3급 자격증을 땄다. 더 중요한 것은 편물기술을 가르쳐주며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스승이자 멘토인 최영숙 교사를 그곳에서 만난 것이다. 그 멘토에게서 어느 날, 운명적인 말 한마디를 들었다. 이 말은 그의 인생을 갈라놓았다.
 
“해영이가 이 세상을 살려면 예수님을 친구로 삼아야 할텐데. 교회를 안 간다고 하니 내 마음이 아프다.”
 
“저를 염려해 주는 말, 그것도 살아갈 날을 걱정해 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습니다. 볼품없고 초라한 제게 최 선생님은 예수를 알게 한 것입니다. 입학 당시 종교란에 ‘자신교’라고 적었을 만큼 저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완악한 저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최 선생님이 ‘예수 친구가 필요하다’는 말씀에 마음이 녹아버렸습니다.”
 
예수를 만나다
 
그렇게 배운 기술로 편물 하도급 공장에서 도급제로 일했다. 하루 종일 강도 높은 노동은 척추장애인인 그에겐 죽을 맛이었다. 일을 할수록 늘어나는 것은 수입이 아니라, 허리 통증의 무게였고 눈물의 양이었다. 하루 노동이 끝나면 늘 ‘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 정말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네’라며 절망하고 아파했다.
 
이 무렵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힘들 때마다 아무도 없는 예배당 십자가 앞에서 혼자 앉아 울며 날을 새곤 했다. 허리통증이 계속됐지만 새벽기도, 금요철야에 빠지지 않았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떠보면 주위에 교회 중직들이 있다가, “아이고, 조그만 애가 기도도 잘하네”라며 기특해했다. 기도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그저 울고 있을 뿐이었다. 몇 개월이 지나 손에 일이 익으면서 눈물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스스로 두 가지 약속을 했다. ‘마음 아픈 일 안하기’와 ‘죽을 만큼 열심히 사는 일’이다. ‘어차피 하루를 살아야 한다면 죽을 만큼 살자. 그렇게 살다 죽으면 최소한 열심히 살았다는 말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몸이 아프다고 변명하지 말자. 나 혼자 살아야 한다고 불평하지 말자. 내가 여자로 태어나고 장애인이 된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후의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은 내게 있다.’
 
이러한 생각은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하고 매사 불평하는 태도나 부정적인 생각을 고쳐 나가게 했다. 그리고 항상 ‘참 고맙다’ ‘이만하길 정말 다행이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도하며 마음가짐을 새롭게 했다.
 
공장의 또래 친구들은 대부분 돈을 함부로 썼다. 출근도 잘 하지 않고 꾀를 부리며 불성실한 경우가 많았다. 그는 몸이 아픈 데다 잘 어울리지 않다 보니 여공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됐다. 왕따가 됐다고 마음 아파하는 대신 책읽기와 공부에 집중했다. 공장의 편물기계에 영어단어를 붙여놓았고, 월급을 받으면 서점으로 달려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책을 읽고 있는 ‘조그만 애’를 주위 사람들은 특별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 밀알복지재단 희망사업본부장에 부임한 김해영 선교사      © 국민일보
 
난생 처음 받은 생일상
 
어느 날 아침,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날은 그의 생일이었다.
 
“제가 출석하던 용인교회 인미자 사모님께서 초대하셔서 사택에 가보니 아주 푸짐한 밥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 내게도 생일을 챙겨줄 사람이 있다니!’ 생전 처음 생일이라고 미역국을 먹었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당시 중·고등부, 청년부나 어른 모임에 끼지 못하고 겉도는 저를 직접 맡아 주셨어요.
 
특히 사모님은 연고도 없는 어린 저를 진실하게 보살펴 주셨습니다. 제 방에 쌀과 반찬을 갖다 놔주셨습니다. 두 분의 사랑과 관심은 제게 의문을 갖게 했습니다. ‘아니, 이 분들은 내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단 말인가. 왜 내게 잘해 주는 거지. 나를 걱정하고 신경 쓸 정도로 시간이 많은가?’ 이런 의문은 두 분의 각별한 사랑을 받을 때마다 이어졌습니다.”
 
어느 날 월부 책장사의 방문을 받았다. 사서오경 전집을 샀다. 논어, 맹자, 효경, 중용, 대학, 춘추좌전, 주역, 시경 등 12권으로 구성된 이 책이 도착했을 때. 그는 단숨에 마음이 빨려들었다.
 
“예전에 식모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천자문을 거의 다 떼었기 때문에 책을 읽는 데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불합리한 많은 일을 겪으며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이 거기에 적혀 있었습니다.”
 
독서로 부단히 자신을 담금질했고, 바이올린, 일어 영어도 독학으로 정복해 나갔다. 그렇게 신앙생활한 그곳을 1년도 채 안돼 예기치 않게 떠나야 했다. 공장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송별인사를 나누던 날 그는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다른 곳으로 취직이 돼 송별인사를 하러 갔더니 사모님이 저를 예배당으로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해영씨! 이별선물로 하나님 말씀을 선물할 테니 이것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도록 해요’ 하시면서 사모님은 제게 여호수아 1장 5∼9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손을 맞잡고 기도를 해 주셨어요. ‘주님, 이 딸이 이제 이곳을 떠납니다. 어디를 가든지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두 손으로 만든 옷이 세계 최고의 옷이 되게 해주시고, 이 기술로 다른 사람들을 돕게 해주옵소서. 또 해영이가 하나님 일꾼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 밀알복지재단을 방문한 학생들에게 아프리카 현황에 대해 설명하는 김해영 선교사     © 국민일보
 
그런데 사모님 기도를 들으며 자꾸 웃음이 나와 딴 생각을 했어요. ‘내가 만든 옷이 세계 최고의 옷이 된다고. 웃기는 말이군. 겨우 반제품을 만드는데... 또 이 편물기술로 다른 사람들을 도우라고. 사모님, 제 한 몸도 힘들단 말입니다. 이런 제가 누구를 도울 수 있다고요?’ 마지막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도록 기도해주셨는데, 제 몸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저러시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신자인 당시 신앙으로는 ‘매우 우습게 들린’ 기도였지만, 기도 끝에 으레 ‘아멘’이란 말을 했다.
 
“그렇게 하늘에 올린 기도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였어요. 제가 피식 웃으며 ‘아멘’했던 그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저를 탓하는 대신 믿음으로 드린 사모님 기도를 받아주셨습니다. 사모님이 기도한지 9년 만에 저는 보츠와나 선교사가 되면서 결국 사모님 기도가 모두 이루어진 셈이 됐습니다. 그날 사모님의 기도는 이제 제 삶이자 기도가 됐습니다.”
▲ 전국장애인 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해 장려상을 받은 김해영 양(앞줄 오른쪽)      © 김해영
 
첫 기회
 
그렇게 선물로 받은 ‘마음을 담대하게 가져라’, ‘어디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의 여호수아 말씀을 어디를 가든 성경책을 펴서 읽고 외웠다. 초등학교 졸업 후 유일하게 받은 교육은 6개월간의 직업교육이었다. 그 이후로도 끊어진 가방끈은 한국에서 연결되지 않았다. 어려운 가정형편과 장애로 학교를 다니기 힘들어 공장에서 편물기능사로 10대를 보냈다. 그 어둡고 긴 터널 같은 세월을 보내던 그에게 첫 기회가 찾아왔다.
 
주변의 격려로 17살 때인, 1982년 처음으로 전국장애인기능대회에 출전해 장려상을 받았고, 이듬해엔 금메달을 받았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일반 청소년들이 출전해 실력을 겨루는 대회에 나갈 목표를 세웠다. 불편한 몸으로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지방대회 선발전을 거쳐 84년 인천에서 열린 19회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기계편물 부문 금메달을 차지했다.
 
대회가 끝난 뒤 입상 선수단은 청와대를 방문했다.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영빈관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얼떨떨하게 서있는 그에게 한 노신사가 다가와 반갑게 인사하며 악수를 청해왔다.
 
“얘, 너도 왔구나. 나는 정한주 노동부장관이란다. 지난번 시상식에서 내가 너에게 금메달을 걸어줬지. 그때 일등 단상에 서기 위해 올라 올 때 ‘네 작은 키로 얼마나 노력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많이 감동했단다. 더욱 열심히 노력하거라.”
 
“장관님의 격려는 그날 대통령을 만나고 맛있는 음식을 먹던 그 어떤 일보다 더 제 마음에 남았습니다. ‘아, 사람들은 내가 노력하는 것을 알아주는구나. 그렇게 애쓰고 눈물 흘리고 고통을 참으며 사는 것을 알아주는구나’ 생각할수록 정말 고마운 말씀이었습니다.”
 
▲ 보츠와나를 기억하며...      © 김해영
 
85년 9월, 그는 콜롬비아에서 열린 2회 세계장애인기능대회에 한국대표로 출전해 남미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27명의 선수단이 일본, 미국, 멕시코, 파나마를 거쳐 콜롬비아에 도착했을 때는 추석이었다. 한국에서 단편기로 연습했던 것과 달리 대회에서 처음 사용하는 양편기로 경기를 치렀지만 결과는 매우 좋았다. 대회에서 한국은 종합 1위를 했고, 그는 금메달을 땄다. 이 일로 그는 그해 12월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한국에 돌아오니 제가 한 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으며 세상살이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성공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지?’ 항상 의문이었습니다.
 
20대 초반에 윤 선생님의 추천으로 산업연수생이 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 연구소에서 있을 때, 갑자기 용인교회 사모님이 제 작은 주먹손을 쥐고 간절하게 드린 기도가 떠올랐습니다. ‘이 손으로 만든 옷이 세계 최고의 것이 되게 해 주시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존재가 감사를 넘어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갸우뚱거리던 의문에 답이 보였습니다. ‘아, 그랬구나, 그런데, 그 다음 기도가 뭐였지?’”
 
▲ 직업학교를 세워 14년간 봉사했던 아프리카 보츠와나 굿 호프 마을 이정표 앞에 서 있는 김해영 선교사.      © 김해영
 
끝없는 소녀가장
 
“놀랍게도 사모님께서 드린 두 번째 기도는 제 뜻과 상관없이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이 기술로 다른 사람을 돕고…’ 그 말이 살아 제 앞에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기 전에 가족부터 돕는 것이 순서였습니다. 만 3년의 가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엄마와 동생들은 집 앞 교회 청년들의 전도로 모두 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집에 가니 절 창피하다고 피해 다니던 남동생이 성경책을 손에 들고 반갑게 맞아줬습니다. 변한 동생들의 모습은 가족을 도우려는 제게 또 하나의 분명한 동기가 됐습니다. 이 무렵부터 가족들도 예전처럼 그렇게 저를 학대하지 않고 가족의 구성원으로 받아주기 시작했습니다.”
 
일의 성취와 성공을 걸어가면서 어느새 그는 몸이 불편하다고 타박을 일삼는 어머니와 어린 네 명의 동생을 부양하는 소녀가장이 돼 있었다. 기능대회에서 받은 상금으로 전세금을 충당하고, 회사 월급은 가족들 생활비와 동생들 학비로 지출됐다. 어떤 사람들은 “얘, 네 인생만 잘살아도 돼”라며 충고하기도 했다. 이 말 속에는 ‘장애인인 네가 무슨 가족을 돕겠느냐’는 비아냥거림도 섞여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 힘을 보태지 않으면 어린 동생들과 어머니의 삶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가난을 대물림하며 살아야 할 판이었습니다. 이 가난에서 탈출하려면 배움으로써 갈고 닦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동생을 돌보는 일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끝없어 보였지만, 그가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까지 6년간 했다. “인생에 공짜는 없다”고 했던가. 이후 동생들은 모두 건강하게 잘 성장하여, 두 명의 남동생은 ‘누나를 돕기 위해’ 보츠와나에서 10년 이상 선교 사역을 함께했다. 동생들은 모두 결혼하여 조카들만 6명이다. 이들은 아직 미혼인 그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돼 주고 있다.
 
새로운 도전
 
1989년 12월, 그는 지원한 대학의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없는 것을 보고 쓰러졌다. 두 번째 대입 실패였다. 성탄이 지나고 새해가 왔지만 몸을 전혀 쓰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검사도 해 보았으나 원인을 몰랐다. 성공을 향해 달려가던 인생이 하루아침에 브레이크가 걸려 넘어져 있는 형국이었다.
 
기능대회를 준비하던 그는 10대 후반에 야간학원에 다니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의 검정고시를 모두 합격했다. 20대 초반엔 대학에 가기 위해 회사 다니는 틈틈이 공부했다. 니트 디자이너의 꿈을 꾸며 섬유학과와 의상학과를 준비했다. 대학 문턱은 높았다. 1년간 밤에 학원을 다니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친 것으로 6년 동안 꼬박 공부한 학생들과 경쟁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움직이면 통증이 심하여, 가만히 누워 있는 상태에서 밤낮으로 성경을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성경책 옆에 있던 <빛과 소금>이라는 잡지를 읽게 됐다.
 
“무심하게 기사를 읽어가던 중 거창고등학교의 모든 학생들이 배운다는 ‘직업선택의 십계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제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고민 중에 보게 된 이 기사는 한마디로 충격이었습니다. 열 가지의 주옥같은 교훈은 내 영안을 뜨게 했습니다.”
 
그러던 중 기억의 저장고 한편에 있던 아주 짧은 광고가 뚜렷하게 생각났다.
 
“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 일할 양재, 편물 자원봉사자 모집. 1월 10일까지 연락 바람.”
 
‘그래, 이 문이 안 열리면 저쪽 문을 열면 되겠지. 아프리카 보츠와나, 거기가 어딘데요?’
 
한국에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성공을 좇다 허망하게 죽을 인생이라면 차라리 하나님께서 시키는 일을 하다가 죽는 게 명분있는 일로 생각되었다. 그곳은 월급이 없었다. 황무지이며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곳이었다. 가장자리이며 단두대가 될 수도 있었다. 장래가 전혀 보장이 안 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 자리이기에 ‘거창고 직업 십계명’처럼 무엇보다도 그가 가야할 곳으로 여겼다.
 
그 다음날 광고를 낸 그루터기선교부에 찾아갔다. 마감날짜가 지났지만 때마침 편물교사로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 자리가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의 이력과 경력을 듣고 난 선교부 담당자는 한마디로 인터뷰를 끝냈다.
 
“당신은 이 일을 위해 준비된 사람 같군요. 따로 훈련 받을 필요도 없네요. 학교가 2월 20일 개학하니 지금 준비해서 가십시오. 문제 있습니까?”
 
1990년 2월 17일. 무보수 자원봉사자가 돼 생전 처음 들어본 나라인 보츠와나에서 편물기술교사가 되기 위해 떠났다. 김포를 출발하여 홍콩-태국-모리셔스-요하네스버그-가보로니까지 다섯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긴 여정이었다.
 
아프리카, ‘당신은 아름다워요’
 
보츠와나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적어도 그 무렵 그는 보츠와나 최고 기술자였다.
 
“제 손을 잡고 기도한 인미자 사모님의 세 번째 기도가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기능인 선교사로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제 일터는 생면부지의 넓은 황무지 칼라하리 사막 땅과 그곳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아프리카 남쪽 끝 보츠와나의 굿호프(Good Hope) 마을에 안착했다. 현지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한국 선교사들은 도착하면 바로 현장에 투입됐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다. 뭐든지 생소했고 가만히 앉아서 쉬는 일조차 힘들었으며 항상 배고팠다.
 
오전에는 학생들과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함께 학교건물을 지었다. 밤에는 다음 날 수업준비를 했다. 선교사들은 모두 공동체 생활을 했고 식사는 학생들과 똑같이 현지음식으로 먹었다. 먹고사는 일은 현지인들과 의사소통하는 일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다.
 
영어, 한국말, 보츠와나 현지어인 츠와나어에 손짓발짓까지 써가면서 이들과 소통하는 일은 매 순간이 시트콤이었다. 생활환경도 변변찮아 ‘행복’ ‘만족’이란 단어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황무지의 삶이었다.〠 <다음호 계속>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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