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좁은 작은 거인(하)

국제사회복지사 김해영 선교사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입력 : 2013/10/28 [11:37]
▲ 밀알복지재단 희망사업본부장 김해영 선교사. 이 사업은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하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학교를 지어주는 사역이며, 복지적 접근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에 관심을 갖게 하는 한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목적이다.                   © 국민일보

나 홀로 기술학교

잘되어 가는 듯했던 기술학교는 네 번째의 신입생을 받은 뒤, 한 학기를 마치고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다. 보츠와나 그루터기선교부는 한국본부에서 파송돼 온 선교사들은 주님의 은혜에 감동해 자원하여 온 평신도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각자의 재능에 따라 사업부와 선교부로 나눠 일했다.

신학도 하지 않는 평신도가 뜨거운 열정으로 ‘기능인선교사’란 이름으로 현지에서 사업을 하고 유치원, 직업학교 등을 하니 선교활동이 아니라며 배척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선교부도 늘 어려움에 직면했다. 처음에는 거주권 확보가 문제였다. 이를 위해 재단법인을 설립했다. 영주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사람이 부족했다. 인원을 확충하고 일이 확장되면서 돈 문제가 대두됐다. 사업이 자리잡으면서 어느 정도 현지에서 재원조달이 가능해지자 초기 개척 선교사들은 건강악화로 지쳐갔다. 여러 이유로 사역자들은 다른 사역지로 떠나거나 한국으로 돌아갔고, 어떤 이는 아예 하늘나라로 떠났다.

기술학교에서 일하던 교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계속되는 어려움에 지친 기술학교의 선임은 1994년 4월에 교사와 재학생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본인도 떠났다. 그만 홀로 남게 됐다. 학교문은 완전히 닫혔고 언제 열릴 것이라는 기약도 없었다.

처음 선교사들은 유서를 쓰고 올 정도로 사생결단했었지만, 선교지의 어려움은 이들도 두 손 들게 만들었다. 아침에는 짐을 싸고 저녁에는 마음이 아파 기도하며 두어 달을 홀로 지냈다.

어느 날 돌려보낸 여학생 5명이 학교로 찾아왔다. 그에게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 달라며 넉 달 뒤 있을 기능시험 준비를 함께 해 달라고 간청했다.

“나밖에 없는데, 어떻게 너희들을 도울 수 있니?”

“선생님이 계시니까 괜찮아요.”

캄캄한 밤하늘, 전기 불빛 하나 없는 사막의 밤은 적막하고 쓸쓸하다. 교사도 다 떠난 학교에 학생들이 찾아와 공부하겠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으론 아이들의 노력이 기특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그는 모래 바닥에 앉아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아무도 없어요. 모두 다 떠나고 혼자 남았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공부하겠다고 와 있어요.”

기도는 침묵이 되고 마침내 눈물이 됐다. 한참을 울고 있는데 마음 밑바닥에서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얘야, 가난하고 병으로 고생하며 나를 모르는 이 마을 사람들에게 내가 와 있는데 너는 어디로 가려 하니. 너는 여기서 나와 같이 살자. 네가 그것 이외에 무엇을 더 바라니?’

칼라하리 사막의 눈물 기도

‘여기서 나와 같이 살자. 네가 그것 이외에 무엇을 더 바라니.’

기도 가운데 들려온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위해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더 묵상했다.
“아프리카의 사막까지 간 네가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 그동안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찬송하지 않았느냐? 이곳에서 네가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교회를 세워 복음을 잘 전한다고 해도 그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내 앞에서 마음을 지킬 일이다”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이렇게 칼라하리사막 한 구석에서 혼자 눈물로 기도할 때 주님은 그를 새롭게 불러주셨다.
‘여기서 나와 같이 살자.’

“그러고 보니 저의 선교사 소명은 아주 명쾌했습니다. ‘그래! 무슨 위대한 일이나 힘든 일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같이 살자 하시는데.’ 이런 생각에 미치자 안타까움으로 흐르던 눈물이 멈췄습니다. 혼자 남았다는 생각을 밤하늘 별들에게 날려 보냈습니다. 주님이 계신 여기서부터 시작하자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이후 두 달간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접고 오직 학교 정상화만을 위해 고민하고 기도했다. 새 학기를 얼마 앞둔 어느 날, 이사회는 그에게 학교를 맡긴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남의 나라 사람들의 인생을 책임자로 선임되어,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던 학교가 1994년 9월 다시 문을 열었다.

그는 재학생과 교직원들을 불러 세 가지 원칙을 정했다. ‘현지인 스스로 하도록 지도하기’ ‘일보다 사람에 우선하기’ ‘매사에 감사하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 원칙을 정하니 그 어떤 일들도 넉넉히 감당해 갈 수 있었다.

그렇게 10년 세월이 흐르면서 학교는 재학생, 교사 및 직원들이 80명이나 되는 큰 학교로 성장했다. 졸업생이 400명을 넘어섰고, 단기교육을 받은 주부 학생도 240명이나 됐다. 어느덧 그는 마을의 지도자급 인사가 돼 보츠와나 어디를 가든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생면부지의 나라에서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됐다. 학교를 운영하며 바친 시간과 노력에 비하면 너무나 큰 보람을 얻은 셈이었다.

▲ 밀알복지재단에서 아프리카 지역을 가리키며 나눔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는 김해영 선교사.     ©국민일보

새로운 도전

문제는 바로 모든 일이 잘 돼 간다는 데 있었다. 그렇게 되니 그의 영혼에 위기를 감지했다.

“학교 일은 제게 더 이상 도전과 열정을 주지 못했습니다. 처음 학교의 책임자가 됐을 때 주님의 은혜를 바라는 뜨거운 열정과 간절함이 안일한 일상에 묻혀버렸습니다. 그러자 ‘앗 뜨거워라! 여길 떠나야겠구나’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위기감은 10여 년간 학교를 운영한 경험을 토대로 전문교육을 받고 싶다는 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학교사역 3년 이후 후임에게 인계하고 2003년 12월 마지막 학기를 끝으로 보츠와나를 떠났습니다.

한국에서 보츠와나로 갈 때는 그곳에 가지 않으면 허망하게 죽을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고, 주님에게 사랑의 빚을 갚는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제 안일한 일상을 거부하고 도전해 보다 나은 인생을 만들기 위해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기회 앞에는 위기가 먼저 와서 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인생의 전환점에 서게 됐지만 제 앞은 이전의 아프리카보다 더 불투명했습니다.”

보츠와나를 떠나 미국 뉴욕의 대표적인 한인타운 후러싱에 도착했다. 미국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해 전문가가 되는 꿈 하나만 안고 날아간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대책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그들 역시 도움을 줄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별다른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추천받은 나약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매우 무모한 도전이었다. 비록 보츠와나에서 영어를 쓰면서 생활했지만 정식으로 영어과정을 단 한 번도 밟아 본 적 없는 그가 미국 대학에 입학하려면 당연히 요구되는 토플점수가 없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살다 온 그가 한순간에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에 서있는 그는 좋게 말하면 도전이지만 실상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었다. 인생사는 예측할 수 없다는 말처럼,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가능하게 바뀌는 때가 비일비재하다. 대학 인터뷰에서 나타났다.

“해영 씨, 어디서 영어공부 했나요.”

“보츠와나에서 14년을 살았는데 그곳에서 배웠어요.”

“그렇군요. 성적이 잘 나왔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곧 서류와 학비를 마련해서 등록하세요.”

‘내 영어 실력이 미국 대학에서 공부할 만큼 된단 말이지!’ 2004년 1월, 나약대학교에서 영어시험을 치른 뒤 축하의 말을 듣고 학교 건물 밖으로 나오니 한겨울 바람이 씽씽 불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시험에 합격하고도 기뻐하지 못한 채, 수많은 걱정거리를 안고 수많은 인종이 오가는 뉴욕 거리를 혼자 터벅터벅 걸었다.

몸보다 더 추운 것은 마음이었다. 길을 건너려다 빌딩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작은 키에 구부정한 상체에다 어깨는 한쪽으로 기운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청바지 위로 변변한 코트도 없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자신 모습에 스스로도 놀랐다.

“참 거지 같은 사람이군. 야, 너 누구야.”

빌딩 유리에 비친 사람이 대답했다.

“나, 김해영이야. 아프리카에서 생존하기 위해 환경과 치열하게 싸워 이기고 온 사람이야. 남들 보기에는 거지 같을 수 있지만 나는 내 모습에 대해 불평하지 않아. 나는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고 어려운 가운데 동생들도 돌봤고 가진 기술로 아프리카 청소년을 가르친 사람이야.”

깜짝 놀랐다. 유리에 비친 사람이 현실의 자기보다 더 당당했다. ‘그렇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사막에서도 한 인생을 구원하고 운명과 같은 인생의 고통과 고생을 불평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풍요로운 이 뉴욕 땅에서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갑자기 다 잘될 것이란 자신감과 믿음이 솟아올랐다. 그의 유학생활은 이 자신감과 믿음으로부터 시작됐다.

▲ 두레교회에서 간증하는 김해영 선교사(31/8/ 2013)     © 크리스찬리뷰

공부가 선교다!

문제는 학비였다. 어느 날, 워싱턴에서 이영호 이영숙 집사 부부가 뉴욕으로 그를 찾아왔다. 이 부부는 굿호프 기술학교를 위해 기도하던 소그룹 리더였다. 주일예배를 함께 드리던 중 조용히 다가와 속삭였다.

“선교사님, 학비 걱정은 마세요.”

일 주일 후, 한 학기 학비에 해당하는 5천 불과 편지가 그들에게서 날아왔다. 편지에는 한국에서 물려받은 재산을 처분해 학비로 보내니 열심히 공부하라는 당부의 말이 적혀 있었다.

“그 편지를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보내주신 학비를 들고 저는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이는 앞으로 일하지 않고 공부만 할 수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가 오다니! 제가 요청한 적도 없고, 날 처음 본 분들이 은혜를 베풀어 준 것에 대해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게 순전한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과 그분들이 베푸는 은혜 덕택입니다.”

2004년 8월 말, 첫 학기 등록을 마치고 4년간의 유학 비자를 받았다.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대학생이 됐다. 후러싱 지구촌선교교회 고석희 목사는 “해영 선교사,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가지 말고 교회에 가세요”하며 살 곳을 마련해줬다. 마침 교회 안에 있는 게스트룸이 그의 거처가 됐다.

가을학기를 시작하고 얼마 후, 도움의 손길이 또 한번 찾아왔다. 텍사스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의 보츠와나 선교를 오랫동안 후원한, 미국에 갓 이민온 청년들로 구성된 그루터기 목장에서 연락을 했다.

“선교사님, 보내는 금액이 일정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공부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 매월 500불씩 보내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청년들이 꼬박꼬박 모아 보내준 귀중한 헌금이 생활비가 됐다. 이들의 지원 덕분에 2학년부터는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고, 여러 장학금을 신청해서 받아 학비를 보충해 나갔다. 대학생으로서 학문하는 즐거움과 기쁨을 마음껏 누렸다. 매일이 기적이고, 행복이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다니!’

학교나 지하철 안, 교회에서 매 순간 감격하고 감동했다. 공부가 선교라고 믿고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 했다. 어느 날, 아프리카 역사를 공부하다 뜨거운 눈물이 터졌다. 그가 가르친 보츠와나 사람들이 그를 위해 기도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공부를 잘 마치고 꼭 돌아와요’라고 했던 부탁의 소리도 들렸다. 그때 그가 하는 공부는 바로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그의 형편을 헤아려 많은 사람들이 주머니와 가방에 돈을 넣어준 것도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였다.

그들이 십시일반으로 유학생활에 필요한 경비를 보내준 것을 계산하니 모두 2억 원이 넘었다.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의 은혜와 하나님의 보호하심! 그것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베풀라는 계시처럼 생각되었다.

그의 전공은 사회복지학이었지만 기독교와 신학 관련 과목을 자연스럽게 수강했다. 수업을 들으며 보츠와나에서 독학으로 익히고 배운 신학지식과 경험을 이론화할 수 있었다. 배울수록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14년 동안의 경험이 마치 퍼즐을 맞추듯 하나의 완성된 그림으로 만들어져 갔다. 이 과정으로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학문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됐다.

▲ 두레교회에서 간증하는 김해영 선교사(31/8/ 2013)     © 크리스찬리뷰

치유와 회복

‘몸이 아프지 않은 사람은 어떤 심정으로 살아갈까?’

이는 평소 그가 가장 궁금하게 생각했던 질문이었다. 그를 끈질기게 괴롭혀오던 것은 다름 아닌 허리통증이었다. 공장에서 일을 할 때는 평소보다 허리통증이 더 심해져 정말 하루하루가 죽을 맛이었다. 늘 울며 날을 세우니 하나님도 아파하셨는지 한 가지 지혜를 주셨다.

1미터가 넘는 큰 수건을 두 번 접어 허리에 감은 다음, 벨트로 꽉 조이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그러자 허리가 곧고 반듯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실제로 앉아 있을 때 통증이 줄어들었다. 며칠만 하려고 했던 이 복대를 이후에도 풀지 못하고 살고 있다.

보츠와나에서 학교일로 바쁜 와중에도 마음 한편에는 ‘아! 복대만 안 해도 살겠다’ ‘허리만 안 아파도 더 많이 일을 할 텐데’란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 고쳐 달라 청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만하길 정말 다행으로 알고 살았다. 1996년 선교대회에 참석차 미국에 방문했다 잠시 한국에 들렀다.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니 그를 본 사람들마다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머나! 해영 씨, 미국 다녀왔다더니 척추수술하고 왔어요?”

그의 어머니도 옷을 갈아입는 그를 보더니 등과 허리를 잡은 채 몇 번이고 쓸어내리며 신기해했다.

“미국 사람들이 너를 엎어놓고 밟았느냐. 허리가 반듯해졌다.”

사실은 복대를 한지 13년, 보츠와나의 청소년들을 가르친지 6년쯤 됐을 때, 그저 꼭 입어보고 싶은 청바지가 생겨 복대를 하지 않은 채 청바지를 입고 며칠을 지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허리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더 이상 물에 젖은 허리수건을 찾으러 다니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또 그는 오른쪽 다리가 왼쪽다리에 비해 2.5cm쯤 짧았다. 이 때문에 걸을 때마다 허리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미국 유학을 고민할 때도 몸이 아플 것을 생각하니 선뜻 용기가 생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미국 유학 3년쯤 됐을 때 우연한 기회에 한 목사님으로부터 안수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짧았던 오른쪽 다리가 길어지면서 두 다리 길이가 같아지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이로써 그토록 괴롭히던 허리 통증은 완전히 사라졌고, 고통 없이 공부하고 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말 그대로 펄펄 날아다니는 몸이 돼 하고자 하는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됐습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던 통증이 사라지고 짧았던 다리가 길어지는 일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일이다. 전공과목을 공부하는 3학년부터 학과 공부와 인턴 활동을 병행해야만 했다. 그야말로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살아야 하는 일정이었지만 건강해진 몸으로 착오없이 잘 해냈다.

더 이상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살지 않아도 된다. 일상생활에서 어떤 문제를 만나도 그 일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치유 체험은 항상 이성을 우선시하던 그의 신앙생활에 감성과 영성을 더하는 계기가 됐고, 이는 균형 있는 신앙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줬다.
 해영, 잘 했어!

2008년 5월, 나약대를 졸업하고, 대학원 준비를 했다. 그가 가고 싶은 학교는 아이비리그이자 사회복지 분야에서 명성 높은 컬럼비아 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이었다. 어렵기로 소문난 이 학교의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감격했는지 며칠 동안 잠을 못 잘 정도였다.

그러나 이내 엄청난 학비에 대한 대책은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기본 경비와 환경은 만들어졌다. 등록금에 필요한 최소 비용이 주변에서 지원되거나 일을 하면서 마련됐기 때문이다. 초졸 학력을 가진 자신이 컬럼비아 대학원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사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성공인데 뭐가 더 걱정일까? 학비에 대한 위기감은 ‘학교에서 오지 말라고 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하나라도 더 배우자’는 비장한 결심을 갖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전 공부에 대한 명분이 분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프리카에 보낼 선물’로써 교육의 기회를 주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2010년 5월 18일, 컬럼비아 대학원 256회 졸업생들 사이에 앉았다. 그때 그는 스스로 칭찬했다.

“‘해영, 잘했어!’ 저 스스로 참 대견하고 마음에 들었습니다. 공부를 위해 뛰어넘은 수많은 장애물과 위기를 이 작은 키로 용케도 잘 넘었습니다. 제 졸업장에는 수많은 사람의 도움과 격려, 아프리카 청소년들의 꿈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그동안 목표였던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2012년 3월, 한 일간지에 2개면에 걸쳐 그의 인터뷰 기사가 나갔다. 기사의 헤드라인은 극적인 삶의 여정을 단숨에 압축했다. 같은 시기에 출판한 자서전 <청춘아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은 월급을 받지 않고 일했던 그에게 좋은 자금원이 됐다. 책을 낸 이후 꼬리를 물듯 인터뷰와 일이 들어왔다. 아예 하나님께서 그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 놓기를 작정하신 듯했다.

또 행정안전부에서는 2012년 국민추천 시민대상 국민훈장목련장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연락도 왔다. 14년간 보츠와나에서 무보수로 자원 봉사한 공적이 인정됐다고 했다. 그에게 전화한 사무관은 행사 일정과 함께 배우자 한 사람을 동행해 참석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줬다.

“저는 배우자가 없는데, 어머니를 모시고 가도 될까요?”

“예, 괜찮습니다. 꼭 모시고 오세요. 국민들에게 희망을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상식 때 뵙겠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솟았다. 많은 일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희생과 헌신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들 450명이 후보로 추천됐고, 그 중에서 수상자로 결정된 24명 가운데 그가 포함된 것이다. 무엇보다 아프리카에 홀로 남았을 때, ‘얘야, 나와 같이 살자’ 하시던 하나님께 형언할 수 없는 감사가 나왔다.

“수상식 날은 우리 엄마 인생에 있어 최고의 무대였습니다. 제가 주연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엄마를 주연으로 삼았습니다. 그날은 아침부터 긴장되고 바빴지만 행복했어요. 엄마와 함께 한 자리에 서는데 47년이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것도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함께 선 자리에서 말입니다.”

‘무학→우울증→맏딸 장애인→남편자살→청과물 시장 일용 노동자→자녀 다섯 중 세 명 선교사→맏딸 국민훈장 수상.’

그 어머니의 삶을 요약하면 이렇게 정리되었다. 돌아보니 어머니가 그보다 더 불행하고 험악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사실에 가슴 아팠다. 그 어머니와 함께 있는 수상식 현장에서 마음속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 김해영 선교사가 가는 길은 첩첩산중으로 둘러 싸인 험난한 길이다. 그러나 그는 이 길을 즐거운 마음으로 걷고 있다.     © 국민일보

함께 걷는 길

“김 선교사님, 밀알복지재단의 정형석 목사님을 꼭 만나보십시오. 아프리카에 학교를 짓는 사업을 추진하려고 하는데 책임자를 찾고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그 일에 적격이라 봅니다.”

그루터기선교회 조성수 선교사 말을 듣는 순간, ‘아! 내가 생각하던 바로 그 일이구나!’하고 바로 전화했다.

“목사님, 내일 당장 만날 수 있을까요. 밀알복지재단이 준비하는 일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선교에 대한 이해, 복지전문가, 그리고 아프리카 문화와 생활에 대한 이해를 가진 사람. 재단이 찾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애원하다시피 매달렸다.

“선교사님, 이 일을 맡아주십시오. 이 일은 선교사님이 꼭 하셔야 합니다.”

이리하여 그는 밀알복지재단의 희망사업본부장으로 부임했다. 주로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를 위해 학교를 지어주는 사업이다. 복지적 접근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에 관심을 갖게 하는 한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이 사업의 목적이다.

질병과 가난, 전쟁과 기아와 무지라는 인생의 장애물을 아이들이 뛰어넘을 때마다 누군가 옆에 있다면 힘이 덜 들 것이다. 눈물을 덜 흘릴 것이다. 약간의 도움만 있어도 생존과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약간의 도움은 때론 손을 잡아주는 일이기도 하고 먹고 입을 것을 건네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장 값진 도움은 옆에 같이 있는 것이다.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인 쉽지 않은 길, 그러나 가야만 하는 길, 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많은 동역자들과 함께 걸어주기에 계속 걸을 수 있고, 즐겁게 걸을 수 있는 길임을 날마다 절감하고 있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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